골을 울리는 멋진 이야기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정보를 제한적으로만 제공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완결된 것 같았던 이야기에 어떤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그 의문은 그간 제공되지 않았던 어떤 정보의 등장으로 인해 풀리게 된다.
더 좋은 방법은 이야기 사이에 약간의 공백을 만드는 것이다. 공백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그 공백이 너무 크면 전체 이야기의 완성도를 저해하고, 공백이 너무 작으면 반전이라고 할 수가 없다.
또 다른 방법은 아예 상충되는 정보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야기의 긴장도 커지지만, 그만큼 그것을 수습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커진다. 사람들은 ‘사실’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라쇼몽>과 절대 진리
<라쇼몽>은 세 번째 양식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은 하나다. 하지만 그 사건을 증언하는 네 사람의 증언은 모두 다르다. 각각의 진술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며, 심지어는 설득력도 있다. 문제는 이야기들 간에 완벽히 상충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어렸을 땐 이 영화를 보며 어떻게든 연출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사실의 존재를 증명해보고 싶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걸 넘어 모두의 진술과 동기를 포괄할 수 있는 그런 절대적인 사실 말이다.
그게 정말 덧없는 일이라는 걸 넘어, 그런 초월자적 욕망 자체가 작품이 그리는 인간상에 포함된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벌어진 사건은 인지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 그 컵에 물이 반밖에 안 남으면서도, 반이나 남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초월자가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은 초월자가 될 수 있을 줄 안다. 왜 그럴까.
논평 과잉의 사회
SNS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세상 모든 것이 논평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SNS 시대 논평의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와 ‘어떻게 믿고 싶은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에 대한 욕망은 초월자에 대한 욕망에 다름아니다. 내가 이렇게나 사건을 객관적으로 지켜보고 있다, 내가 이렇게 너희가 모르는 점까지 알고 있다. 물론 이런 욕망 자체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학문에선 의식적으로 초월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지 자기 함정에 안 빠진다.
초월자가 되려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나에 한해서 정리하자면 믿는 바를, 원하고 희망하고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진실로 만들고자 초월자가 되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흠결 있는 초월자가 탄생한다. 초월자는 초월자이기에 그 어떤 공백의 존재도 인지하지 않는다. 흠결 있는 초월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현실로 만들고자 초월자가 되었고, 자신은 초월자이기에 내가 원하는 바가 곧 사실이 된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공백은 상상되고, 상상은 사실로 둔갑한다. 그리고 그것은 <라쇼몽>의 증인들이 그랬듯, 꽤나 설득력 있고, 합당하다. 사실 당사자들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아는 것부터가 이미 초월의 영역이다.
초월자는 없다
결국 인간이란 <라쇼몽>의 관객이 아닌, 그 속의 캐릭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초월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인지해야만 한다. 스크린 밖에 있지 않는 그 누구도 초월자가 될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라쇼몽>이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여전히 초월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 논평을 쏟아낸다. 어차피 우리는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실과 맥락을 알 수 없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원판단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판단이 바뀌었다고 한들 그 역시 <라쇼몽>의 다른 증언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포장하든, 그것은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느냐, 그리고 자기가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믿고 싶으며 어떻게 믿고 있느냐에 대한 고백에 다름아니다. 나는 그렇게 내 자리를 인지하고, 내 위치에서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고,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증명하려 애쓰며 살아갈 것이다.
원문: 김고기의 영화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