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서는 IoT이니 4차 산업혁명 같은 말이 떠돈다.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센서가 깔리고 그를 통해 무선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시대가 오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이미 그렇다. 어느새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가려는 거리의 스트리트 뷰를 보고 도로의 실시간 교통상황을 보여주는 CCTV 화면을 확인하며 내비게이터가 시키는 대로 운전하는 일 같은 것에 익숙해졌다. 자동차는 통상 피스톤으로 움직이는 기계로 인식되지만 전자제품 같은 것으로 변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가까운 미래에는 우리의 자동차가 우리에게 오늘은 기분이 어떠냐고 질문을 던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물론 집이 하나의 전자제품처럼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게 되는 날도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망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풍요롭다. 원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값싸게 구해, 클릭 몇 번이면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나에게 배송된다. 향신료를 구하겠다는 콜롬부스에게 대상단을 꾸려주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던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오늘날의 현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집을 이야기한다면 집이 가지는 새로운 의미, 새로운 기능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의 발명이 거듭해서 보여주듯 강력하고 편하고 빠른 것은 좋은 동시에 해로운 것이다. 망의 시대란 풍요롭고 편리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나의 정체성이란 결국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이며 이 세상과 가지는 관계다. 그런데 빠른 정보기술은 우리의 관계를 해체한다. 사회가 해체되고 가족이 해체된다.
그런 것들이 존재했던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망의 시대는 우리가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소비자나 시민 중의 하나일 뿐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게 된다. 이것이 곧 정체성의 위기다.
정체성의 위기는 고상한 지식인의 위기가 아니며 모든 사람에게 생겨나는 것이다. 전 세계를 연결하는 망은 전 세계를 보편화·평준화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만약 당신이 한국어 교사인데 전 세계가 갑자기 영어만 쓴다든지, 당신이 민속촌 직원인데 한국에 디즈니랜드나 라스베이거스식 카지노만 가득하다면 당신의 직업은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의 의미,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직업은 모두 우리의 특수성에 의존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 주변의 불규칙한 지형적, 사회적 모습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직업을 구하고 자신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지고 당신이 그저 보편적이기만 하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신이나 자연법칙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인간이 스스로를 순수한 이상 그 자체로 생각한다면 그는 결국 순교자나 일 중독자가 되든지 한 번의 실수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또 보편적이기만 한 시스템은 1등만 의미를 가지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도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심지어 그 단 한 명의 1등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보편성만 가지고는 우리 스스로가 자기 삶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상도 당신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배우자는 서로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없고 가족이나 이웃, 같은 국가에 사는 사람 사이에도 그렇게 느끼게 된다. 결국 우리의 정체성은 해체되고 우리의 의미는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나 개인의 정체성뿐이 아니라 집도 해체된다. 서양에는 커다란 성이 많이 남아 있고 한국에도 부자 양반 가문의 커다란 수십 칸짜리 집이 남아 있다. 옛날에는 그 안에서 주인 가족과 하인이나 노비 등 많은 사람이 같이 살았다. 전만큼 부자가 없어서 그런 집이 잊힌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그런 집이 존재할 이유가 있었다. 일종의 작은 자급자족 공동체로서 존재했고 시장의 기능이 약했던 과거에는 그것이 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마을이었고 소비하는 동시에 생산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대저택의 기능은 해체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 파편들을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본다. 서양의 호텔이 가지는 모습은 바로 서구의 옛날 저택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모습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오늘날에는 설사 성을 소유할 정도의 능력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필요할 때 호텔을 빌리고 레스토랑을 빌리면 되기 때문이다. 즉 저택은 해체되고 그것이 하던 기능은 소위 아웃소싱을 통해 바깥에서 구하게 된 것이다.
집은 종교의 시대에서는 종교적 의미가 강조되었고 과학의 시대에서는 추상적이고 보편적 조형미가 강조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집은 어떤 기능과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집은 하염없이 해체되어 가까운 미래의 우리는 관처럼 생긴 곳에 들어가서 잠만 자고 나오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인가. 이런 시대이기에 오히려 집이 꼭 가져야 할 기능은 없는 것일까?
일단 집의 해체는 앞으로도 더 일어날 것이다. 카페나 레스토랑, 펜션 같은 것의 역할에 더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에 살던 사람이 요즘의 집을 보면 그것은 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듯, 우리가 생각하는 집은 해체되어 미래인이 말하는 집은 지금의 집 개념과 다를 수 있다. 그걸 전제하고 말한다면 망의 시대에 집이 꼭 가져야 할 기능은 바로 관계의 기능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기능이다.
물론 이제까지도 멋진 건축물이란 어떤 절대적 존재와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인간은 누구인가에 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과의 관계이거나 어떤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원리와 인간과의 관계였다.
이제 집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주변의 사람, 주변의 땅, 주변의 기억이다. 보편성을 달성하는 것이 건축의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이나 집단이 특수성을 달성하도록 돕는 것이 건축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시대다. 이제 우리는 관공서가 딱딱한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모습을 가지는 계몽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과로 유명한 고장의 시청은 사과를 연상시키는 모습인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다.
아주 중요한 관계의 한 가지는 바로 역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다. 모더니즘이 건물에서 사회의 역사를 지워버렸을 때 그것은 사회의 역사를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권위주의적 사회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쳤을 때 우리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과거의 연장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집이 나이가 먹는 부분이 있었으면 한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바로 집이 기억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 중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무다. 나무 한 그루 심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집 앞에 심은 나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라날 때 그 나무는 집이 나이를 먹는 것을 측정해 주는 기준이 되며, 그 집을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집으로 만들어 준다. 모든 나무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그 나무가 성장할 때 그 옆에서 살았던 것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요즘 집에 대해 말할 때 자연환경을 강조하는 일이 많은데 자연을 우리 정체성의 일부로 보는 일도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집은 좋지 않다. 일부는 거주자가 바꾸고 수리할 수 있는 집이 좋다. 그런 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주자와 단단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세월의 흔적은 때로 디지털 사진이나 동영상이 기록할 수 없는 것을 담는다. 집의 펜스를 직접 고치거나 마당의 잔디를 직접 관리했다면 그런 흔적들은 나의 적극적 참여의 흔적으로 남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 있다고 해서 그 벽이나 그 집이 무너져도 좋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유동적 구조를 가진 집도 좋을 것이다. 집의 구조가 가변적이거나 모듈식이어서 거주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구조를 변경할 수 있는 집이다. 그런 집은 거주자의 발상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집을 짓는 일은 기술과 돈, 그리고 좋은 안목과 긴 자유 시간이 필요하다. 기초부터 자기 집을 세워서 괜찮은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한 가지 시도는 바로 작은 집을 짓는 것이다. 규모를 최소화하면 건축은 보다 쉬워지고 심지어 집을 가구처럼 들고 다닐 수도 있다. 요즘에는 3D 프린팅 기술로 집을 빠르고 값싸게 짓는 기술도 주목받고 있다. 철근 콘크리트와 유리가 20세기 건축을 바꿨듯이 3D 프린팅 건축은 21세기 건축을 완전히 바꿔 버릴지도 모른다.
도시 사람들이 작은 텃밭 가꾸기에 주목하듯 사람들은 점점 나만의 집을 꾸미는 데 주목하고 있다. 집 구조의 부분적 변경이나 인테리어 변경을 통해 자기를 나타낼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것이다. 해체의 힘이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일단 이런 집의 기억기능에 대해 주목하고 나면 우리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넘어서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바로 마을의 환경보존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같은 현대적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마을은 시간과 싸우는 장소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수리되면서 나이가 들고 따라서 기억을 축적하는 장소들이었다. 우리는 이런 마을들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 마을의 여러가지 것들은 기억을 가진다.
그런 예에는 길이 있다. 자주 걷는 길은 기억을 가진다. 특히 그 길이 구불구불하면 더 그렇다. 그런데 자동차에게 그 길을 빼앗기고 나면 그 길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길은 평평해지고 넓어져서 가보고 싶은 곳이 되기보다는 그저 빠르게 지나칠 통로가 될 뿐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걸어서 지나다니지 않으니까 상권도 사라진다. 골목 끝에 있던 문방구며 구멍가게가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게 된다. 집 앞에 종종 나와 있던 평상들도 자동차에 밀려 대부분 사라졌다. 삭막한 도시 풍경에 지친 사람이 자기가 나고 자란 골목이 아닌데도 가끔 보존된 골목길을 보면 뭔가가 충전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기억이 없는 환경이 우리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모든 것을 보존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관점이 필요하다. 마을의 어느 부분이, 나아가 한국의 어느 부분이 우리의 정체성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했던 것보다는 더 많이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오늘날 한국에서는 개발이란 곧 오래된 마을을 밀어내고 아파트 단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정도다. 이래서는 우리 스스로 정체성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다. 보존은 부자의 여유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것이고, 직업을 잃지 않기 위해, 살맛을 잊지 않기 위해 행하는 노력이다. 보존을 해야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즉 우리가 보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다.
관계에는 정적인 것도 있다. 다시 말해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 혹은 누군가와 만나게 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집에는 커다란 식탁과 편안한 의자가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1인용 의자도 좋지만 긴 소파형 의자면 더욱 좋다. 커다란 식탁과 편안한 의자는 그 집에 사는 가족이 서로 만나게 되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거실에다가 적당히 밥상을 차리고 티브이를 보면서 밥을 먹다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서 밥을 먹어보면 여러 가지가 참 다르다. 가족이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되며 대개 훨씬 명랑한 기분이 된다. 식탁은 가족들이 나란히 앉게 하거나 서로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만나는 것은 적어도 이따금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반대로 서로를 너무 만나게 해서 문제인 것도 있다. 한국의 아파트는 대부분의 경우 공간 분리가 잘 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거실을 중심으로 방들이 있어서 방문을 열고 나오면 거실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거리가 가까워서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뭘 하는지 너무 잘 알게 된다. 이것은 서로를 온종일 조금도 여유 없이 계속 만나게 하는 구조다. 그런 집에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설사 부부라도 때로는 각자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6면체 구조의 집에 익숙하지만 어쩌면 집이란 ㄷ자 모양으로 휘어진 공간인 쪽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이상적인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절대적 답은 없겠지만 각자의 공간을 가지면서도 생활 일부에서 서로를 꼭 만나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할 텐데 아파트는 이와는 완전히 극단적으로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옛날의 마을에는 옆집 사람이 지나가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아파트는 종종 이웃끼리도 절대 얼굴을 볼 수 없는 구조다.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내 집에 바로 들어간다.
내 집에 들어가고 나면 가족끼리는 서로 피할 구석도 없다. 그러니까 잔소리 듣기 싫은 아이나 사람에 지친 어른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바깥으로 떠도는 일도 많이 생긴다. 우리는 어느새 부모에 대해서도 아이에 대해서도 이웃에 대해서도 서로서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게 된다. 우리가 서로를 모를 때 윤리적 파탄은 일어나기 쉽다. 게다가 새로운 추억도 생기지 않는다. 좋은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기 마련이다.
요즘은 하천을 복원한다든가 재래시장을 활성화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많다. 그런 복원도 관계의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하천의 복원은 지역 시민이 서로를 만나게 만든다. 천변의 길을 걸으면서 서로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재래시장과 현대식 마트가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손님과 주인이 만난다는 것이다. 실질적 권한이 없어서 로봇이나 다름없는 마트 직원은 손님과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재래시장의 상인은 손님을 만나고 종종 단골도 만든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을 살필 수 있는 권한과 여유가 있다. 단골 식당이나 단골 카페가 있다는 것은 그 마을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도록 만든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관계에 대해 자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미를 뒤에 남겨두고 온 것을 후회한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집은 우리가 우리의 장미를 지키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의 추억, 우리의 역사,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이름의 장미를 말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