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의미는 서로 간의 관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의 시간대와 또 다른 시간대 간의 관계로서 대개 아주 중요하게 생각된다. 아인슈타인이나 모차르트가 쓰던 의자는 다른 의자보다 더 중요해 보인다. 오래된 향교에 가면 거기서 보는 것은 다 의미가 있어 보인다. 어릴 적에 살던 집에서는 그리운 냄새가 나고 거기 근사한 나무라도 하나 있다면 그 아래가 마치 아빠나 엄마 품처럼 그립게 느껴진다. 이것은 모두 역사 때문이다.
우리의 관점은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관계는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중에서 특정한 관계를 주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특정한 관점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여러 가지 관점들은 다양한 역사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우리의 관점을 바꾸게 되지만 거꾸로 우리가 가지는 관점과 철학이 역사를 만들어 내고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이 뭔가를 정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집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한두 가지 새로운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과거를 보는 한 가지 방식으로 시대를 과학 이전의 시대, 과학의 시대 그리고 지금 전개되고 있는 정보화시대 혹은 망의 시대로 보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구분은 정보처리라는 관점에 그 근거를 가진다. 삶이란 불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는 과정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판단을 어떤 방식으로 내리는가, 우리가 우리의 질문에 대해 어떤 식으로 답을 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그런 부분의 차이는 우리의 문명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이 될 수밖에 없다.
과학 이전의 시대란 종교의 시대이며 우리가 가진 정보가 매우 적었던 시대다. 그 이유는 언어나 문자나 인쇄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보를 모으고 축적하는 일이 매우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 내는 시대는 권위의 시대이고 영감의 시대일 수밖에 없다. 합리적으로 이게 왜 이런가를 설명하면서 판단을 내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아는 것이 없었다.
과학의 시대란 이제 상당량의 정보가 모이는 시대다. 사람들이 신세계를 찾아서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데 광분하는 시대이며 도서관에 그 정보가 효율적으로 축적되고 다시 많은 사람에게 배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곧 단순 정보의 가치는 줄어든다. 정보가 너무 많아진다. 그 정보를 제대로 다룰 수 없을 때 더 많은 정보는 오히려 판단을 더욱 비합리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비대해지고 느려진 정보처리 시스템은 자기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뭐든지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정보를 압축해야 한다. 체계를 만들고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정보 압축의 왕좌에 있는 것이 바로 물리학이고 좀 더 넓게 말해서 과학이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걸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자 세상은 다시 단순하게 보인다. 온갖 미신이 사라지고 부정부패와 모순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간은 스스로의 발전에 도취되기 시작한다. 19세기쯤에는 이미 이 세상에는 우리가 더 이상 발견할 자연법칙도 인간이 그때까지 알려진 법칙에 의해 설명하지 못할 미스터리도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망의 시대는 전자통신의 시대다. 세계는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정보는 더더욱 폭증한다. 그 정보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세상에 대해 뉴턴의 법칙 같은 단순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폭증하는 정보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준다. 구체적 이론 없이도 합리적 판단은 내려질 수 있다. 바로 얼마 전 알파고가 바둑계 인간 최고수를 이기는 모습에서 보여줬듯이 말이다. 빅데이터와 강력한 컴퓨터 계산능력은 인간의 이론을 추월한다.
망의 시대는 지금 전개 중이며 지금까지의 과학의 시대와는 다른 원리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는 시대다. 그것은 훨씬 더 유동적으로 변하는 시스템이며 민주적인 사회이고 지방 자치와 협동조합의 시대다. 그것은 게임의 법칙은 존재할지언정 전체라는 관점에서 옳고 그른 것을 논하는 것은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다. 이런 세상에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이며 최상위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으로 계속 신뢰받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우선 과학 이전의 시대, 이성 이전 시대의 건축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처음에는 전통적인 주택의 형태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우리는 그저 건축에 대한 전통을 반복하게 된다. 전통을 어기는 것은 어리석고 생각할 수 없으며 두려운 것이다. 전통의 스타일이란 마치 신처럼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되는 절대적 신성함을 가진다. 실제로 그것은 종종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집의 여러 부분은 신에게 바쳐진 것이거나 신의 권위를 잊지 않게 해주기 위해 존재했다.
원시적인 시대에 건축이라고 할 만한 것의 형태에 대한 고민은 실용적이기 전에 종교적이었을 것이다. 건축물의 기둥이며 지붕은 다른 무엇보다 신의 축복을 바라고 악귀의 저주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소망을 표현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에 비하면 기술도 물자도 부족했을 과거에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집을 잘 짓는 대신 피라미드 같은 엄청난 건축물을 세웠다. 서구 중세시대에 지어진 성당의 모습은 물론 실용적인 이유보다는 주로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호랑이 문신을 몸에 새기고 그 힘을 느끼며 독수리 깃털을 모자에 꽂으면 주술적 힘이 거기에 있다고 느끼곤 한다. 물론 과학적이고 기능적인 의미에서 그런 문신이나 장신구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그런 것들은 실제로 심리적인 힘을 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심지어 심리학적 연구라는 형식을 통해서 주술적 장신구나 건축이 과학적 근거를 가진 것으로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어떤 집은 신비한 치유의 능력을 갖췄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타고난 정신적 특징이 그렇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점점 더 다양한 지식을 가지게 됨에 따라 신적 권위는 어떤 집을 지어야 할 것인가를 답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기록이 없었을 때는 전통은 전혀 변하는 것 같지 않았겠지만 더 긴 과거에 대한 기록을 가지게 되면 전통도 변해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여행을 해서 더 먼 곳의 사람들을 보게 되고 그 소식을 서로 전할 수 있게 되면 지역에 따라 전통이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한옥에 살던 사람이 처음으로 서양의 집을 봤다든가,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집에 대한 생각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통의 신성함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린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지식을 해결해야 하고 신성함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좋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이유를 원한다. 우리는 인간을 초월하는 추상적 가치를 추구한다.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과학의 시대가 왔을 때 신에 대한 믿음을 대체한 것은 위대한 과학자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이 세상에는 불멸의 자연법칙이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신적 권위가 도움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자연의 법칙에 의존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신화 이상으로 추상적이다. 특히 지동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추상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우리는 멀미를 느끼지 않는데 실은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자 세상의 수없이 많은 사건은 이제 중력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다만 그것은 추상적이라 누구에게나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보이지는 않는다. 오직 선구적 과학자 같은 사람이 그걸 보여줘야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역사에 즉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는 그 법칙이 이랬는데 오늘은 다르다는 식의 것은 법칙이라고 통상 불리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세상을 보기 전에는 즉 과학 이전의 시대에는 사람들은 시간의 맥락에서 세상을 봐야 했다. 즉 인간이 이러저러한 죄를 저질렀으므로 지금 이런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돌아봐야 했다.
그런데 자연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불멸이고 불변이다. 적어도 그렇게 되는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자연의 법칙에서 역사는 중요하지 않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가 과학이론을 만들어 낸 과정 자체는 중요하고 재미있지만 본질적인 중요성은 없다. 일단 법칙이 밝혀지고 나면 그 법칙은 누가 언제 어디서 발견했는가와 상관이 없다.
자연의 법칙이 가지는 의미는 그 보편성에서 나온다. 중력의 법칙이 런던에서 다르고 서울에서 다르다면 자연의 법칙이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모든 장소에서 자연법칙은 세상과 같은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자연법칙이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우리는 건축이 가지는 가치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의 사고를 전개할 수 있다. 우리가 건물에서 추구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기하학적 비례와 완벽함이다. 우리는 삼각형, 사각형, 구형 등의 기하학적 구조가 집에 대칭과 균형을 주는 것을 느낀다. 집의 아름다움과 의미는 거기에서 나온다. 따라서 건축물의 기능적 미적 가치는 시공을 초월한다. 런던에서 아름다운 것은 서울에서도 아름다운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런던에서나 서울에서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기하학으로 생각되듯이 말이다.
과학법칙이 강력하지만 추상적인 것처럼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가 된다. 그것은 보편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매우 추상적인 것이 되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건축가들도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심지어 세계를 창조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 아름다움은 모두의 눈에 당연히 보이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건축가들이 보여줘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온갖 주술적이고 권위적인 장식, 그리고 역사적인 전통은 우리를 억압해 온 근거 없는 야만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이성적으로 개혁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게 할 능력도 있다. 바로 그 근거 없는 억압을 물리치는 것이다. 20세기 초에는 다른 예술도 그러했지만 건축도 세상을 바꾸는 수단의 하나로 생각됐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는 세계 3대 건축가 중의 하나로 불리는 모더니즘 건축의 선구자다. 모더니즘 건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는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그로서는 건축에서 논리적·기능적 근거가 없는 역사적 장식 따위는 모두 빼버려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세계의 도시 풍경을 바꾸는 데에 있어서는 그 어떤 건축가보다도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뉴욕의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은 1958년에 세워진 것인데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해 보인다. 온 세상의 도시가, 특히 한국의 도시가 비슷한 빌딩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또 다른 대표작은 체코의 빌라 투겐타트(Villa Tugendhat)다. 그는 오늘날에도 현대적으로 보이는 이 집을 1928년에서 1929년에 설계했다. 오늘날의 집은 말하자면 어느 정도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사람들의 이상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모더니즘 건축은 그가 학장으로 있었던 독일의 건축학교 바우하우스 출신의 사람들이 전 세계, 특히 미국에 유행시켰다.
빌라 투켄타트를 발표했을 때 ‘디 포름(Die Form)’이란 잡지에 비판이 실렸다. “이런 집에 사람이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사는 사람은 그 집의 구조 때문에 그림 하나 맘대로 걸기 쉽지 않았다. 빌라 투켄타트에 대한 비판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다른 3대 건축가 중의 하나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모더니즘 건축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건축가란 건물의 기능을 생각하는 이상으로 자신의 미적인 이상 혹은 철학에 집착하는 예술가다. 그래서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집을 지으면 종종 자기 자신도 그 집에 살면서 곤란함을 느끼게 된다. 설사 곤란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이상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가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이 지어준 집에 사는 사람에게도 그럴까? 우리가 미술관에 가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과 피카소 스타일의 옷만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느 정도 그렇다. 특히 아파트가 주된 주거인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한국의 아파트는 역사가 없는 집 그 자체다.
과학의 경우 매우 엄밀하게 아주 많은 사람이 검증하는 것이므로 역사와 무관한 성질을 가진다는 사실이 큰 문제가 안 된다. 그만큼 보편성을 달성할 수 있다. 실제로 과학은 대단한 취급을 받을만한 과정을 거쳐서 과학이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미국이나 독일에서 작년에 증명된 과학이라면 그것은 한국에서 내년에도 진실일 것이다.
건축은 물론 미학적인 면에서건 기능적인 면에서건 과학만큼 엄밀하게 그 보편 타당성을 검증받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절대적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떤 한 채의 집이 시공을 초월하고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사람을 초월하는 상태에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이나 기능성에 도달할 수 있을까? 뉴욕과 서울의 집은 달라야 하고 해안도시인 여수와 내륙도시인 대구에서 집은 서로 달라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모든 역사를 우리의 건축에서 지워버리거나 어설프게 남의 역사만을 뒤죽박죽으로 덧칠한다면 거기에서 의미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는 일제강점기가 주는 공백으로 인해 뒤죽박죽이며 역사가 없거나 비약이 많아 한국을 사랑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층아파트로 채워진 서울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20세기 이래 만들어진 것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있어 온 것이나 자연환경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직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자랐던 골목에 대한 추억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응답하라 1988’ 같은 드라마에서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추억과 애착이며 내가 성장함에 따라 가지게 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애착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에 비한다면 똑같은 복제품 빌딩이 늘어선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나는 요즘의 아이들은 뭔가를 상실한 채 사는 것이 아닐까? 전보다 요즘 훨씬 더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사는 데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무의미한 건물들, 역사가 없는 집으로 한국을 채운 일이 이런 현실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은 아닐까?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