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나는 ‘진보’가 밉고, 싫어질 때가 매우 많아졌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을 시작했다. 마음이 아프다. 과반을 넘으면 세월호특별법을 해결할 것처럼 말했는데 지금은 국회선진화법을 이야기하며 180석이 안 되어 어렵다고 말했단다. 당연히 야당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고 더욱 큰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세월호특별법 문제는 당연히 애초부터 180석을 넘거나, 집권을 통해 ‘행정력’을 장악할 때만 해결가능한 일이다. 물론, 과반을 차지했을 때도 ‘바터'(협상, 주고받기)를 통해 다른 것을 내주는 대가로 따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강하게 정부 차원에서 반대할 경우 ‘협상’을 통해 돌파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잔인하도록 무책임한 주장
나는 우리가 과반이 되어도 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집권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주장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더 진보적인’ 주장이 아니라 ‘더 무책임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따뜻한’ 보수라는 표현을 썼다. 따뜻한 보수의 반대말은 뭘까? 나는 ‘잔인한’ 보수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진보를 구분할 수 있다면 ‘무책임 진보’와 ‘책임 진보’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보수의 다수파는 ‘잔인한’ 보수이고, 한국진보의 다수파는 ‘무책임’ 진보라고 생각한다. 무책임한 주장을 일삼게 되면, 현실의 복잡다단함을 일도양단식 선악대결로 치환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서 도피’하면서도 현실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할 수 있게 된다.
무책임해도,
진지한 고민이 없어도,
사회과학적인 원인분석을 하지 않아도,
정치적-여론의 어려움에 대한 복잡다단함을 생략해도,
아무 이야기나, 아무렇게나 과감하게 발언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선명한’ 야당 정치인의 행세를 할 수 있게 된다. 시끄러운 소란이 끝나고 ‘실제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그들의 선명함은 ‘현실에서 도피’했기에 가능한 그런 선명함이다. 일종의 ‘망상’인 셈이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과반의석이 되거나, 집권을 해도 바뀌는 것은 거의 없다. 왜? ‘현실’과 정직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대면하는 것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에 ‘현실도피적인’ 선명함이다.
정부가 싸인하고 국회에서 비준된 한미FTA을 마치 ‘팩스 한장’으로 폐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더 진보적인’ 사람이 아니라 ‘더 무책임한’ 사람이다.
최저임금이 5580원일 때, 다음 년도에 단번에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릴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역시 ‘더 진보적인’ 사람이 아니라 ‘더 무책임한’ 사람에 불과하다. 최저임금 인상률을 두배에 가깝게 올리는 결정은 우리가 집권해도, 우리가 과반, 아니 180석 이상을 차지해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한계상황에 있는 소상공인이 대거 몰락하게 될 것이 너무 너무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과반이 넘으면 세월호특별법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유가족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은 현실을 잘 모른 무책임한 주장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당의 책임있는 분들은 혹은 책임있는 시민단체 지도자들은 유가족을 설득해야 한다.
유가족들이 아무리 많이 단식을 해도, 설령 무슨 안 좋은 불상사가 생겨도 세월호특별법은 박근혜 정부 하에서 쉽지 않다고. 심지어, 야당이 집권해도 여론의 반발이 있을 것이기에 강력한 리더십과 지혜로운 대응을 할 때만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나는 진보인가?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진보’라는 말이 ‘무책임’이라는 말과 동의어 비슷한 시대가 되어버린 까닭이다.
“이상을 간직한 현실주의”
내가 생각하는 사민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보수의 혁신이 ‘따뜻한 보수’가 다수파가 되는 과정이라면, 한국진보의 혁신은 ‘책임 진보’가 다수파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반사이익(=반감)에 의존하는 승리가 아닌, 호감의 결집을 통한 집권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직, 그 길은 아주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원문: 최병천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