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이 떠오르세요?
A. 여성의 권리. / 동일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이요. /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여성에게 있다, 이런 것들 정도?Q.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세요?
A. 아니요. / 그렇다고는 할 수 없죠.Q. 왜죠?
A, ‘페미니스트’가 정확히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Q. 제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란, 여자들도 같은 권리를 갖고, 사회에서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인데요. 그런 걸 지지하시나요?
A. 네, 그런 게 페미니스트의 진짜 정의라면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겠네요.Q. (지금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세요?
A. 그렇죠. (출처: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한동안 이 영상을 보고 느꼈던 찝찝한 기분을 설명해야지 설명해야지, 생각하면서 정신이 없어서 쓰지 못했다. 지금 떠오른 김에 쓴다.
2004년 정도에, 나는 나보다 약간 어린 지인 남성의 블로그에 댓글을 단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나는 “그건 내가 아는 페미니즘과는 좀 다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여성들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대하며 보호해주고 싶어하는지’를 역설하며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 시기에 이런 남성들은 꽤 많았다. ‘내가 얼마나 여성을 위하는데’, ‘여자들은 소중한 존재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여성도 성적으로 해방되어야지(그래서 나랑 섹스해야지)’라는 맥락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는 사람들. 나는 그 남성들에게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지키기’ 위해 논쟁했던 기억들이 상당히 있다. 내가 생각했을 때 페미니즘에는 ‘결’이 있었다.
물론 영상에 나오는 대답들이 그 남성들의 대답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저 남성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말하기도 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말하기도 하고, 발언권을 말하기도 한다. 그들이 하는 말은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영상 속의 남자가 말하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모든 사람은 동일하거든요’ 같은 말을, 내가 경험했던 저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말하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제 모두에게 합의된 명제다. ‘여성도 성적으로 해방되어서 나랑 섹스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해서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니까, 생리휴가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거는 얼마든지 ‘여성과 남성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고, 나는 그것을 지지하니까’일 수 있다.
그 남성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했던 것은 당연하게도 운동의 성과다. 그리고 저 남성들이 ‘인간에게는 동일한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운동의 성과다. 나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운동의 성과를 이런 방식으로 재확인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생산하는지가 의문인 것이다. 저들은 왜 처음에는 ‘제가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던 것일까.
최근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그런 글을 매우 많이 본다. “저는 여성을 사랑하니까 여혐이 아니라니, 머가리 댕청댕청. 여혐은 그런 게 아니거든!” 나는 이 영상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마구 떠오르고 말았다.
여성과 남성에게 같은 권리가 있고,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걸 기반으로 ‘여성혐오’를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여성과 남성은 평등한데, 여성이 남성의 등을 쳐 먹으려고 하는 김치녀는 욕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저는 페미니스트예요.”
페미니스트라는 말에는 분명 낙인이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도 그 낙인을 뿌리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매우 명확하다. 그렇다면 낙인을 뿌리치기 위해서 우리는 ‘결’을 폐기해야 하는가? 그것이 실제로 페미니즘의 외연을 넓히는 데, 혹은 페미니즘 운동을 깊게 하는 데 효과적인가? 그 점 때문에 나는 이 영상을 보면서 영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페미니스트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국어 사전에도 페미니즘은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성별로 차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분명히 말해서 없다. 일간베스트의 헤비 이용자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를 우리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립국어원 사전은 파시즘을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나타난 극단적인 전체주의적·배외적 정치 이념. 또는 그 이념을 따르는 지배 체제. 자유주의를 부정하고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일당 독재를 주장하여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국수주의·군국주의를 지향하여 민족 지상주의, 반공을 내세워 침략 정책을 주장한다.”라고 정의한다.
나는 이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념, 지배 체제라고 하기보다는 ‘대중 운동’이라는 점을 크게 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반공을 내세워’ 라고 무 자르기에는 나치는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이었다. 여기엔 ‘결’이 있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외연은 확장될 수 있다. 확장되다 보면 훨씬 속류화된 형태가 나올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속류화를 지향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로 성장한다는 것이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씌워진 낙인을 벗기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여성과 남성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고 질문하는 것일까.
물론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웃으면서 말하는 저 남성들의 자기 선언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영상이 향유되는 애티튜드를 머뭇거리며 생각한다.
원문: 이서영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