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R.R.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소설로서만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서도 판타지 문화에 큰 영향을 준 작품입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3편으로 구성한 영화는 많은 내용을 생략하면서도 자그마치 558분(9시간 18분)에 이르렀죠. 확장판을 더하면 736분(12시간 16분)에 이르는 이 작품은 자그마치 11개의 아카데미상을 휩쓸며 전설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판타지 영화의 하나로, 이후 제작되는 무수한 판타지 영화의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이 성공한 이후(여기에 같은 시기 <해리포터> 시리즈에도 힘입어), 판타지 영화의 제작붐이 일어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작가인 J.R.R.톨킨의 친구이자 서로에게 영감을 준 C.S.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를 시작으로,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하는 환상 세계를 무대로 한 대작 판타지 영화가 무수하게 쏟아졌고, 판타지팬을 열광하게 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 어떤 영화도 <반지의 제왕>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판타지 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호빗의 등장
그리고 10여년의 시간이 흘러 그 붐을 계승하겠다며 등장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반지의 제왕>을 만든 웨타 워크샵과 피터 잭슨 감독이 손을 잡고 J.R.R.톨킨의 또 다른 작품을 무대로 한 영화, 바로 <반지의 제왕>의 이전 이야기를 그려낸 <호빗>이었습니다.
사실 <호빗>의 제작 계획이 처음 소개되었을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하고 다소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서사적인 대작이었던 <반지의 제왕>과 달리 <호빗>은 아동용 동화였거든요. 하지만 <판의 미로>를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가 감독을 맡는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기대를 더했고, 어느 순간 피터 잭슨이 다시 맡게 되면서 2편이 아닌 3편으로 제작된다는 이야기가 더해지자 의문 속에서도 <반지의 제왕> 프리퀼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2012년, 드디어 선보인 <호빗> 시리즈는 아동용 동화였던 원작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반지의 제왕> 만큼은 아니지만, 전체 상영시간 474분(7시간 54분)에 달하는 작품이 등장한 것입니다. 확장판으로 계산하면 532분(8시간 52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작품으로 쏟아져 나왔지요.
피터 잭슨과 웨타 워크샵이 손을 잡고 만든 <호빗>은, 확실히 놀라운 작품이었습니다. 마틴 프리먼이 연기하는 젊은 날의 빌보는 소설 속에서 그대로 살아나온 듯 했고, 드워프와 호빗이 여행하는 중간계 북방의 모습은 <반지의 제왕>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매력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제껏 영화 속에서 선보인 모든 환수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모습으로 그려진 고대룡 스마우그의 위용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몸을 사르는 듯한 연기가 더해져서) 사람들의 눈을 사로 잡았죠.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 맞먹는 인기를 누립니다. 전세계 매출이 각 편당 9억 달러 이상이었습니다. 3편을 합쳐서 30억 가까운 놀라운 흥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3편의 영화가 끝났을때 사람들의 반응은 <반지의 제왕>과 달랐습니다. 어마어마한 분량에 이르는 <반지의 제왕>의 엔딩부분을 보고서도 중간계를 떠나야 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몇 번이고 작품을 다시 찾아보던 관객들은, <호빗>이 끝나는 순간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에 말이죠.
팬들이 제작진의 과욕에 대처하는 자세
<호빗>은, 영화를 볼 때는 재미있는 작품이었지만, 영화관을 나올 때는 뭔가 고개를 젓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분명히 장면 하나하나가 멋있고 흥미를 끌지만, 지나치게 길고 지루한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처음 이야기가 시작되어 빌보가 떠나는 부분까지 자그마치 40분 이상을 낭비하고 마니까요. 이러한 장면이 하나 둘이 아닌데,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부분들이 이야기의 전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도리어 영화에 대한 몰입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반지의 제왕>과 달리, 사실상 CG들로 떡칠된 전투 장면에선 눈 앞에서 사건이 벌어진다는 박력과 현실감보다는 만화 영화나 게임을 본다는 느낌이 더 들었습니다.
분명히 꽤 재미있었고, 당연히 극장에서 봐야 했지만, 정작 확장판은 사 놓고도 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반지의 제왕> 때와 달리 실패를 걱정하지 않은 웨타와 피터 잭슨이 그들의 취미를 최대한 발휘하고자 영화 길이를 늘리려고 작정했음을 잘 느꼈으니까요.
제작 다큐를 보면, 그들이 이 작품에 ‘드워프의 바람개비 화살’ 같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는 설정을 더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시 말해 ‘중간계 덕질’에 얼마나 열중했는지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나 원작으론 몇 쪽 안 되는 내용을 3시간 가까운 분량으로 늘려버린 <다섯 군대 전투>는 3편 중 가장 짧음에도 가장 부담되었죠.
하지만 <호빗>은 버리기에는 아까운 작품입니다. 단지 편집을 느슨하게 해서 너무 늘어질 뿐, 스마우그의 박력, 빌보의 재치, 여기에 <반지의 제왕>에선 거의 드러나지 않은 드워프 군대의 위용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팬들은 훨씬 짧게 구성된 작품을 기대했지만, ‘확장판’은 내주어도 재편집판은 내줄리가 없는걸 잘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팬들은 스스로 이 작품의 편집에 나섭니다. 바로 영화 역사상 보기 드문(적어도 영화학과의 과제를 제외하면 찾기 힘든) 팬 편집판(Fan Edit)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DVD나 블루레이가 나온지 1년 반도 안 되었는데, 2015년 8월에 처음 나온 3시간 버젼(There and Back Again Cut)부터 현재까지 자그마치 6작품, 시간으로 보면 2시간 분량에서부터 확장판을 포함하여 4시간 20분 정도의 작품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온 것입니다. (심지어 앞으로 더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모두 ‘톨킨’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각기 해석을 더하여 완성했습니다. 공통적으로 보면, ‘뮤지컬 부분’이 많이 줄어든 걸 볼 수 있죠. 가령, 빌보의 집에서 드워프들이 접시를 던지는 내용이나, 고블린 소굴에서 고블린왕의 노래 같은 거 말입니다.
그리고 전투 부분도 대폭 줄어들었는데, 이를테면 확장판 포함 4시간 21분짜리 버젼(Maple Film’s JRR Tolkien’s The Hobbit) 같은 경우에도 다섯 군대 전투를 고작 30분으로 줄어버렸습니다. 당연히 얼음판에서 벌어지는 마차 레이싱 게임 같은 확장 장면은 몽땅 날아갔습니다.
푸짐한 한정식이 질릴 때 찾아먹는 팬 편집판의 매력
이따금 우리는 극장에서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조금 더 보고 싶다는 마음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삭제 장면을 찾아보거나 확장판을 기대하죠.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영화가 잘 편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터지게 먹으면 만족감이 떨어지듯, 영화 역시 다소 아쉬운 느낌이 들어야 더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피터 잭슨의 <호빗>은 온갖 요리로 가득한 한정식 같은 영화입니다. 분명 맛난 음식이 많지만, 지나치게 많이 쏟아붓다보니 배가 터질 만큼 가득차서 지치게 만듭니다.
팬들 자신이 ‘맛있다’라고 판단한 부분만을 골라모은 ‘팬 편집판’은 피터 잭슨의 원작과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맛난 부분도 있지만, 취향에 따라 골라낸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제각기 색다른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골라먹는 재미, 그것이야 말로 ‘편집’의 묘미입니다.
팬 편집판 <호빗>은 창작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넘치는 것보다 다소 부족한게 더 낫다는 진리를 새삼스레 깨닫게 하는 동시에, 사람의 취향이 다양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더욱이 9시간 분량의 ‘확장판 원작’을 이용해서 나 만의 편집판을 만들어보는 재미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죠. 여러분도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원문: 표도기의 타임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