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노자는 힘들다
얼마 전에 ‘나는 프로그래머다’라는 팟캐스트에서 인터뷰를 했다. 그 후에 본 감상 중에:
“아이 뭐야. 초딩 때 남아공으로 이민가서 영어가 더 편한 사람이네. 아 짜증이야. 나 같은 말 못하는 어버버 외노자와는 출발선이 다르자나. 완전 샘남.”
자. 나 역시 영국에 외노자로 왔다는 건 차치하고.
나는 남아공에서 거의 20년을 살았다. 유색인종으로, 여자로, 인종차별로 전세계에 명성을 떨친 남아공에서 학교를 마치고, 공대 1년 다니다가 취업하고, 대학교 중퇴하다시피 하고, 계속 일을 했다. 그러니까 내 커리어의 첫 10년은 – 고졸, 유부녀 (결혼을 23살에 했음), 유색인종, 여자…로 한 거다.
영국 오기 전에 학사는 마쳤다. 무려 전공이 정외과. 영국에서는 듣보잡인 아프리카 잡대에서 마친 전공. 그리고 유부녀, 생긴건 아시아계인데 아프리카 출신 외노자. 뭐, 네. 영어는 잘 해요. I got THAT going for me, which is nice.
남아공에서는 한국에서 넘쳐나는 정부 지원 코딩 학원도 없고, 인터넷 속도는… 음. 말하지 말자. 브렉시트 이전에 날 제일 열받게 할 수 있는 토픽이 남아공 인터넷상황이었다고만 하고 넘어가자.
영국에 와서 이민법이 바뀌고 석사 필요하고 뭐 어쩌고 해서 석사 시작한 거고, 옥스포드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석사를 몇 년 전에 마쳤다. 그러니까 내 커리어 10+ 년은 학벌 버프 없이 쌓은 거고, 솔직히 말해서 IT 에서 학벌, 특히 석사 어디에서 했다 이런 건 진짜 별 소용 없다. 면접까지 가는 데만 좀 도움 된다.
기술적으로 정치적으로 후진 남아공에서 20년을 유색인종 여자로 썩고, 거기에서 고졸 유부녀로 IT 경력 쌓아서, 영국에 아프리카 학사를 가진 아프리카 외노자로 와서, 역시 유색인종 외노자 여자로 취업해서, 일하면서 석사 마치고 애 낳고 지금까지 오는게 – 이래도 자신과 출발지점이 다르니까 (영어 할 줄 알잖아!!) 내가 이룬 건 별 거 아니다라고 생각하시는데.
나도 사실 동의한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
1. 언어
우선, 한국어 → 영어는 정말 진짜 어렵다. 언어 진짜 잡다하게 많이 공부해 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이 장벽 넘기가 쉽지 않고, 말만 통하는게 아니라 영어권 정서와 문화 이해하는 게, 기술직이라도 필요하다. 동료들이랑 사적인 얘기 안 할 건가? 농담 안 할 건가? 영어가 가능하다는 것, 그 동네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정말 큰 이점이다.
2. 노동 분위기
나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 아니다. 그렇지만 커리어 17년 동안 회사 다니면서 늘 따로 공부하는게 가능했다. 난 학사 석사 다 파트타임으로 마쳤다. 중간 중간에 IT 관련 온라인 코스 듣고 하는 것도 다 일하면서 했다. 참 많은 회사들을 거쳤지만, 그 모든 회사들이 그게 가능할 정도로만 일을 시켰다.
지금도 난 하루 아홉시간 근무 딱 지키고 주말이 완전히 비니까 이렇게 글 쓰고 책 읽고 앉았지, 매일 야근시키고 주말 없고 하면 학사 석사 끝내는 건 택도 없었다. 아, 그리고 임신하고 아이 둘 낳고 또 그 아이들 키우는 동안 직장에서 그 어떤 차별도 겪지 않았다는 점도 추가.
3. 입시
이거 좀 엉뚱한 얘긴데, 난 고등학교 1년을 두 번 했다. 외국 나오면서 보통은 한 학년 꿇기 마련인데 난 그냥 바로 들어갔거든. 마침 아프리칸스도 제 1외국어로 해야 한다 해서, 부모님한테 난 1년 번 셈이니 아프리칸스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서 고등학교 1학년 내용 다시 하겠다고 하고 갔다.
6개월 하고 나서 음 별로 효과가 없군, 해서 나온 다음 집에 있으면서 내가 과외 선생님 부르고 내가 교과과정 혼자 공부했다. 그 때 라틴어도 배우고, 별 희한한 책도 다 읽고, 뭐 그러다가 다시 영어 학교로 들어가서 고2 고3 마쳤다. 그 동안에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 하고 읽고 싶은 책 다 읽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 많이 한다. 난 내가 싫은 공부는 정말 못하거든. 끈기도 없고.
외국 남자 개발자들 보면 대학 가기 전에 이미 5-8년 개발 경험이 있는 애들이 많은데, 한국에서는 입시에 신경을 썼다면 그냥 불가능한 얘기다.
4. 여자로 공대가기, 남초 직장
내가 과연 한국에서 공대에 갔을지, 개발자로 일 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공대에 가고 남초직장에서 일했다면 내가 겪은 환경과는 아주 달랐을 거라는 데에는 확신한다. 길게 말 하지 않겠다.
자. 똑같은 말 몇 번 반복한 것 같지만 다시 정리해보자.
한국은 절대 쉬운 나라가 아니다
한국에서 영어 못하는 개발자로 일하면서 해외에 나가려는 상황은, 무려 후지고도 후진 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 받으며 자란 유색인종 여자가, 있는 건 영어 할 줄 밖에 없고 그나마 고졸에 일찍 시집가서 취업하려는 여자가 개발자로 경력 쌓으면서 공부하려는 것보다…. 힘들다. 두번째 케이스 스터디인 내가 보증한다. 그만큼 한국인에게는 영어가 어렵고, 한국 노동시장이 후지고, 여자로 살기 힘들고, 입시 준비 드럽고, 대입을 실패하거나 첫 취업 잘못하면 돌이키기가 힘들다. 아프리카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인 한국이지만, 개개인에게는 절대로 쉬운 나라가 아니다.
원문: 양파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