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고: 〈유주얼 서스펙트〉, 〈식스센스〉, 〈혈의 누〉등의 스포일러가 솔찮게 깔려 있음. 위의 영화를 아직 안 봤으나 볼 계획이 있는 분들은 지금 당장 돌아가시오.
※ 참고: 이 글은 2005년에 작성되었습니다.
요즘 영화들은 개나 소나 반전 하나씩은 숨겨둔다. 관객들도 영화에 반전이 없으면 상당히 시시하게 여긴다. 반전이 얼마나 참신하고 놀라운지에 따라 전체 영화의 수준이 판가름나는 것 같은 분위기다. 거의 “반전 강박증” 이라 할만 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분위기가 되었던 것일까?
우리나라 관객들을 반전의 재미에 맛들이게 만든 첫 번째 영화는 아마도 1995년작 〈유주얼 서스펙트〉 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 이전에도 나름대로 복선과 반전이 담긴 영화들은 많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게 반전 하나 만으로 먹어준 영화, 반전을 알아버리면 김빠진 맥주 마냥 보는 맛이 확 변하는 영화는 이 〈유주얼〉이 최초였다.
이후 반전에 목숨거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스포일러’ 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영화의 막판 반전을 미리 알려줘 버리는 행위가 천인공로할 짓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유주얼〉 보러 들어가는데 “아무개가 카이저 소제”라고 외치며 도망가던 자식이 기억난다. 그 영화를 보기 전에는 내가 방금 당한 게 얼마나 치명적인 테러인지 미처 몰랐기에 그냥 넘어갔다만,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아야 할 놈’이 있다면 바로 그런 놈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전영화 붐의 서막에 불과했다. 〈유주얼〉 이후 3~4년 간 이어진 반전영화 춘추전국시대를 단칼에 잠재우며 혜성처럼 등장한 반전영화의 본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1999년작 〈식스 센스〉였다.
보통은 “나에겐 죽은 사람이 보여요”라고 해석되지만, 현재형으로 해석해서 “나는 (지금) 죽은 사람을 보고 있어요”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바로 그 함축적인 대사, “I see dead people” 속에 서늘한 복선을 숨겨 두고 막판에 터트린 이 영화의 반전은 〈유주얼 서스펙트〉류의 반전에 익숙해진 관객들을 경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달랐기에 그런 충격이 왔던 것일까? 다시 말해서 〈유주얼 서스펙트〉의 막판 반전과 〈식스센스〉의 그것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뭘까?
그것은 속이는 자와 속는 자의 일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유주얼 서스펙트〉류의 반전을 제1유형 반전이라고 하자. 이 반전은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다르다. 다시 말해서 범인에게 주인공이 속는다. 여기서 반전이란 결국 주인공이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과정이다. 결국 속는 놈이 하수고 속이는 놈이 고수인데, 영화의 막판에야 누가 최고수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자기가 속이고 있는 줄 알다가 결국 속는 놈, 맨날 멍청한 척 하다가 맨 마지막에 뒤통수를 치는 놈 등이 등장한다.
이런 반전은 주로 〈스크림〉 같은 공포영화나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추리영화들, 그리고 〈미션 임파시블〉 같은 첩보영화에서 사용된다. 그 이후 〈와일드씽〉은 아예 이런 반전들로만 줄거리를 채워나가는 담대함을 보였고 최근 장예모의 〈연인〉도 어설프게나마 같은 계보를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제2유형의 반전은 〈식스센스〉 류의 반전인데, 여기서는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같다. 예를 들어, 〈식스센스〉의 주인공도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자신을 속인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봐요”라는 말이 주인공의 뒤통수를 때린다.
잘 설계된 경우, 이런 속이는 자와 속는 자가 일치하는 반전이 주는 타격은 앞서 첫 번째 유형의 반전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남이 나를 속였다는 걸 뒤늦게 아는 건 그냥 “저놈이 나보다 한 수 위구나” 정도의 충격으로 끝난다. 하지만 원래 알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고, 나 스스로 나를 속여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나 자신을 포함한 세상이 완전히 뒤집혀진다.
이런 유형의 반전도 나름 역사가 깊은데 필립K딕 원작 영화들인 〈블레이드러너〉, 〈토탈리콜〉이나 미키루크 주연의 〈엔젤하트〉 등에서 이런 반전을 슬쩍 내비친다만, 이 두 번째 유형의 반전은 〈식스센스〉 이후 하나의 대세가 된다.
그런데 왜 이 두 번째 유형의 반전이 대세가 된 것일까? 그것이 단순히 충격량의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사실 이제 영악해진 관객들은 반전이 있다고 하면 대략 이쪽 반전일 것이라 짐작해버린다. 〈혈의 누〉가 개봉했을 때 “차아무개가 범인이다”라는 헛소리가 떠도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렇게 되면 반전이 주는 충격 효과도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반전은 인기가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작금의 상황을 보자면 이 제2유형의 반전은 이제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가 어떤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1유형 반전과 2유형 반전이 골고루 포진한 혈의 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영화 〈혈의 누〉였다. 〈혈의 누〉에는 첫 번째 반전과 두 번째 반전이 다 들어있다. 추리영화의 기본이랄 수 있는 제1유형 반전에 가려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제2유형 반전도 사실 나름 중요한 요소였다. 이 영화에서도 제2유형 반전은 주인공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믿음이 뒤집어지고 그 결과 지금까지 자기가 경험해온 세상에 대한 생각의 틀 전체가 뒤바뀌는 반전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도 가끔씩 일어난다. 예를 들어, 요즘 문제가 되는 중고등학생들의 두발단속 문제를 보자. 예전에도 교사들이 머리카락 긴 학생들 잡아다가 고속도로 내는 일은 아주 흔했다. 그리고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건 당시 당연한 학생지도활동 이었고, 그런 행동을 한 교사는 교사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인권침해라고 지탄받는다. 이전 시대에는 당연히 할 일을 했던 교사가 이제는 갑자기 인권을 침해하는 나쁜 교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최근에 후배 군기를 잡다가 경찰서에 끌려 들어간 개그맨의 사례도 그렇다. 그 개그맨이 경찰서에서 중얼거렸듯, 예전에는 후배 불러다가 때려가며 군기 잡는 것은 관행이었다. 피멍좀 들었다고 그걸 경찰서에 꼰지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예전과 똑같은 행동이 군기와 규율을 세우는 모범적인 행동이 아니라 범죄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후배 규율을 잡는 꼭 해야 할 일을 하던 선배는 졸지에 범죄자가 되고 말이다.
박정희도 그렇다. 지금 중고등학생들 머리에 고속도로 내는 일이 문제라지만, 박정희 때는 다 큰 어른들의 머리도 그렇게 고속도로를 내버리곤 했다. 치마길이가 너무 짧아도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고 말이다. 그때 경찰이 하던 행동은 법질서 유지였지만, 지금 같은 행동을 하면 이건 욕을 바가지로 퍼먹을 인권유린이 될 거다. 박정희때 있었던 일들이 대개 그렇다. 그때는 다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던 것들, 요즘 사람들에게 같은 짓을 시키면 몇 명이나 그때처럼 얌전히 말들어 먹을까?
이런 예들은 부지기수다. 지금 성희롱이라 불리는 행동들도 한때는 친밀감의 표현이었고, 지금 착취라 불리는 계약관계도 한때는 가족적인 관계라고 불렸다.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반전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제2유형 반전은 세상의 가치기준이 급격하게 변할 때 우리들이 저절로 경험하는 반전들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상의 가치기준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우리들에게도 조만간 다음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반전을 거부할 것이냐. 아니면 뒤바뀌어진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반전에 동참할 것이냐…
나는 죽은 사람들이 보여요. 그들은 자기가 죽은 줄 모르고 있죠.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거든요.
이 대사는 말콤 크로 박사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원문: 싸이코 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