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물타긔!
지난 14일, 검찰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을 국정원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국가정보원이 원세훈 전 원장의 ‘원장님 말씀’에 따라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유리한 글을, 야당 대선후보였던 문재인과 이정희에 대해서는 불리한 글을 조직적으로 유포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기사를 통해 문제의 글 일부를 직접 읽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도 직권남용, 경찰공무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사건을 조작, 은폐할 것을 지시하고 대선 전 급조한 거짓 수사결과를 발표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국정원 대선 개입 활동을 알린 국정원 직원에 대해서도, 국정원 심리정보국 활동을 누출했다는 이유로 국정원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가정보원의 첫 번째 원훈은 이 기관이 얼마나 특수한 기관인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정보전 및 첩보전, 각종 정보 수집과 기밀 보안을 담당하는 기관인만큼 보통 사람은 가까이 접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런 특성은 역으로 수많은 오명을 이 기관에 선사하기도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다양한 간첩 사건, 전 대통령의 시해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어두운 역사 가운데 이 기관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첩보전과 기밀 보안 등 지극히 특수한 업무를 담당하는 국가의 정보기관이 현 대통령, 즉 당시 여당 대선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골적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대선은 물론 대통령의 정통성까지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다. 뿐만 아니라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나서 수사를 조작하고 은폐했다는 것 또한 수사권력, 나아가 공권력에 대한 신뢰를 뿌리채 뽑아버리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누리당은 이를 두고 민주당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새누리당은 국가정보기관의 선거 개입 문제를 별 것 아닌 것처럼 포장했으며, 이에 대한 민주당의 의혹 제기를 민생을 팽개친 정치 공세로 규정했다. 또한 민주당 측에 국가정보원 심리정보국 활동을 누출했다는 이유로 또다른 국정원 직원이 불구속 기소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이를 매관 공작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해 볼 때 물타기로밖에 볼 수 없는 일이다. 이건 단순히 불법선거운동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보통 사람은 그 실체에도 접근하기 어려운 국가의 정보기관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수사권력은 그 사실을 은폐했다.
직접적인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는 글이 몇 개 없다고는 하나, 직접적인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기 어렵다 해서 문제가 없는 글이었으리라 볼 순 없다. 또한 선거법 위반으로 적발된 글의 갯수가 적다는 것이 이 사태의 엄중함을 가릴 수는 없음도 물론이다. 조선이 보도한 댓글 전문은 정말 이게 국가의 정보기관이 맞는지 싶을 정도이며, 실소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국정원 사태의 흐름
새누리당은 이번 사태에서 여러 차례 물타기를 기도했다. 최초 이 의혹이 알려지고 민주당 관계자와 기자가 ‘댓글 공작을 벌였다’고 의심된 국정원 직원의 오피스텔 앞에 진을 치고 그의 입장 발표를 요구했을 때, 새누리당은 이를 ‘죄 없는 여직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민주당을 규탄했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당시 대선후보) 역시 같은 입장이었으며, 대선토론회 등에서 문재인 후보의 사과를 촉구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흑색선전과의 전면전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12월 17일, 3차 대선토론회가 끝난 직후 대선을 단 이틀 앞두고, 경찰이 ‘국정원 직원이 대선 개입 댓글을 달았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중간수사결과를 내놓으며 새누리당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새누리당은 이에 대해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에게 “법적, 도의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물론 이때까지는 새누리당의 입장에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 민주당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했으며, 당시 가장 신뢰할만한 기관이라 할 수 있는 경찰의 중간수사결과도 새누리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청장의 수상한 행보를 비롯해 새누리당을 의심하게 되는 정황이 많긴 하지만, 어쨌든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면 분명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그 경찰의 수사결과가 조작되고 은폐된 것이라는 검찰의 수사결과가 나오고, 나아가 언론을 통해 당시 경찰의 수사 내용과 국정원 직원들이 올렸다는 글의 세부적인 내용이 알려졌다. 그러나 여전히 새누리당은 똑같은 물타기를 반복하고 있다.
물타기의 여러 사례
비슷한 일로, 이명박 정부 당시 민간인 사찰 사태가 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에 관련된 대규모의 자료가 공개되자, 공개된 문건 중 대부분이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기 기록임을 들어 “노무현의 참여정부도 민간인 사찰에 나섰다”는 공세를 폈다.
이에 민주당은 참여정부와 관련된 문건은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인 사찰이 아니라 공무원 등에 대한 합법적인 감찰을 다룬 문건이라고 해명했으며, 이는 실제 이후 밝혀진 내용과도 대체로 상응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찰이나 감찰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 “솔직히 전 정권이라고 사찰을 안 했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이 물타기는 대단히 효과적으로 작동하여,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민간인 사찰 문제가 청와대가 아니라 야당 탓이라는 응답이 더 높게 나올 정도(동영상 뉴스)였다.
또다른 공무원의 정치 개입 사태였던 초원복집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는 14대 대선 당시 부산 초원복집에 법무부 장관, 부산시장, 부산지방경찰청장 등 주요 공직자들이 모여 지역 감정을 부추기자는 내용의 대화를 나눈 것이 당시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에 의해 폭로된 사건이다. 그러나 대선후보 김영삼 측은 오히려 이를 음모로 규정했고, 주요 공직자가 모여 지역감정을 부추기려 했다는 사실보다 이를 도청했다는 사실이 더 심각하게 보도되었다.
다소 경우가 다르지만 민주당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불법선거자금에 대해 “이회창 후보가 받은 것의 1/10이 되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위의 민자당-한나라당-새누리당 계열의 물타기와는 다소 경우가 다르지만, 이 역시 전형적인 물타기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심각성, 쉽게 다가오는 선정성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은 초원복집 사건과 여러모로 비슷한 데가 많다. 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공직자들이 노골적으로 선거개입에 나섰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외부에 알려진 이후에도 문제를 제기한 측의 흠결을 내세워 물타기가 이뤄졌다는 점 등에서 그렇다
국정원 사건의 경우 국정원 직원의 오피스텔 앞에서 압박을 준 일, 국정원의 내부 활동 자료를 누출했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고, 초원복집 사건의 경우 해당 대화가 도청된 것이라는 점이 물타기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초원복집 사건도 그러했지만 이번 사태는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크다. 그러나 여권 측에서 “글 갯수가 몇 개 안 된다”는 점을 들어 별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그 전말 역시 복잡해 쉬이 와닿지 않는다. 혹 어떤 사람은 “정부기관이 여권 편 좀 드는 게 어때서 그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반면 물타기에 동원된 논리는 선정적이면서도 즉각적으로 와닿는다. “가련한 ‘여’직원을 감금하고 부모님의 출입까지 막는다” 같은 얘기가 물타기에 동원되었다. 사람들의 감성을 쉽게 자극한다. 국가 정보기관의 거대한 음모 같은 건 쉽게 와닿지 않지만, 부모자식도 못 만나게 하는 패륜아들이란 이미지는 대단히 쉽게 와닿는다.
또한 “수천 건 중 문제의 글은 수십 건에 불과”하다는 주장 역시 숫자를 통해 대단히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어려운 이슈일수록 묻히기 쉽고, 감성적이거나 말초적일수록 세간에 쉽게 회자된다는 점이 물타기에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그 놈이 그 놈’ 논리까지 결합하면 완벽하다. “너희는 뭐 깨끗하냐” “너희도 틀림없이 더러울 것”이란 얘기가 나오면서 사건은 적당히 묻혀버린다.
민간인 사찰 사건도 비슷하다. “노무현 때 문건이 더 많다!”는 말은 쉬이 와닿지만, “합법적 감찰과 불법적 사찰은 다르다”는 말은 복잡하고 어딘가 구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 이번 사태도 물타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런 것 같다. 한 여론조사에선 국정원 사태의 책임이 민주당에 있다는 응답이 27%나 나왔고,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은 여전히 급속히 상승하고 있다. 그리고 ㅍㅍㅅㅅ는 국정원 사태를 규탄하는 대신 재미있는 개드립을 찾아 인터넷을 동분서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