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전력의 핵심 지프가 인기 자동차가 되기까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세가지만 기억하라.
지프, 다코타 수송기 그리고 항공모함.
흔히 육상 전력하면 탱크를 떠올리지만 초대 나토군 최고사령관이자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육상전력의 핵심으로 지프를 지목했다. 지프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누비며 정찰, 기습, 구급활동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한 전쟁 영웅이었다.
지프는 현재 자가용 자동차로도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SUV라는 단어가 쓰이기 전까지 한국에서 찌프차는 곧 4륜 구동차를 의미했다. 인기 최정점에 있는 브랜드만이 이처럼 일반명사로 쓰이는 명예를 얻는다. 그러나 이런 인기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미국의 자동차 회사 윌리스 오버랜드(Willys-Overland)는 전후시대를 대비해야만 했다. 36만여 대의 지프 윌리스 MB를 미 국방성에 납품해왔지만 전쟁이 끝나면 경영 위기를 맞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윌리스는 군납 외에 마땅한 수익모델이 없었다.
윌리스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간용 지프를 출시할 계획을 세우고 소비자 조사를 실시했다. 군수 시장에서 누린 인기를 민간 시장에서 재연하리라 기대했지만 조사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누구도 지프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비자 조사 결과대로라면 지프는 민간 시장에 내놓아서는 안될 제품이었다.
하지만 군납을 위해 대량 생산한 ‘윌리스 MB’는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했다. 결국 재고처리를 목적으로 민간용 지프 출시가 강행되었고 Civilian Jeep-1, CJ-1을 시작으로 CJ-2와 여러 바리에이션들이 시험적으로 제작되었다.
1945년, 여러 시험 끝에 드디어 민간용 지프 CJ-2A가 출시되었다. CJ-2A는 농가와 산업현장에 팔리기 시작했다. 전역한 군인들은 길이 아닌 곳을 마음대로 누비는 자유를 느끼기 위해 CJ-2A를 구입했다. CJ-2A는 다음 모델인 CJ-3A가 출시된 1949년까지 총 21만 4천7백6십여 대가 생산되었다. CJ-2A에서 시작된 민간용 지프는 그날의 소비자 조사를 비웃듯 지금까지도 크라이슬러를 통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시장 분석과 예측, 얼마나 의미 있을까?
사람들은 제품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른다.
1998년 5월 25일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이다. 애플은 실제로 시장 조사를 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잡스는 소비자 조사보다는 자신과 동료들의 직관을 더 신뢰했다. 과연 직관을 따라가는 게 합리적일까? 다음에 소개하는 우스꽝스러운 프레젠테이션을 본다면 그렇게 말하기 힘들 것이다.
와이어호그에 투자하지 말아야 할 10가지 이유에 대한 프레젠테이션
Slide1. 와이어호그는 매출이 없음
Slide2. 와이어호그는 음악업계로부터 소송을 당할 것임
…
Slide8. 파자마 입고 미팅에 늦게 나타났음
Slide9. 와이어호그는 션 파커와 관련 있는 회사임 (가장 큰 이유)
Slide10. 여기 온 이유는 단지 롤로프 보타 씨가 불러서임
2004년 겨울 어느 날, 세콰이어 캐피털(Sequoia Capital)에서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발표자는 파자마 차림이었다. 세콰이어 캐피털이 세계 최고의 벤처 투자사이며 매우 진지한 분위기임을 감안하면 조금은 황당한 복장이었다. 발표 내용은 반 장난이었고, 션 파커(Sean Parker)와 사이가 나빴던 세콰이어 캐피털의 중역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를 노골적으로 비꼬고 있었다. 세콰이어 캐피털 측 사람들은 모두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은 마치 의도된 듯이 완벽하게 실패했다. 발표자의 이름은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였다.
세계 최초의 MP3 공유 서비스 냅스터(Napster)의 공동창업자였던 션 파커는 페이스북의 장래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저커버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둘은 그렇게 만나 의기투합했고 파커는 페이스북의 사장이 됐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외에도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었다. 그중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던 것은 P2P 서비스였던 와이어호그(Wirehog)였다.
파커는 저커버그가 오직 페이스북에만 집중하기를 원했다. 파커는 이미 냅스터로 P2P 서비스 사업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와이어호그가 가진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대학에서만 서비스되고 있는 페이스북이 소셜 서비스로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이미 미국에는 마이스페이스나 프렌드스터 같은 소셜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저커버그는 페이스북보다는 와이어호그에게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대다수 동료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파커가 아무리 설득해봐도 저커버그는 와이어호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와이어호그가 페이스북의 앱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하나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와이어호그는 독립적으로 실행되는 프로그램이었고, 회사도 와이어호그라는 이름으로 따로 존재했다. 결국에는 오히려 파커가 설득되어서 와이어호그의 5대 주주가 됐다.
2004년 11월, 와이어호그가 출시됐다. 결과는 시장의 외면. 저커버그는 깨끗이 자신의 오판을 인정했다. 저커버그는 와이어호그를 비롯한 모든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페이스북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거기에 더해서 와이어호그와의 작별을 위한 재미있는 이벤트를 기획한다. 바로 파커와 악연이 있는 세콰이어 캐피털에 와이어호그로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천재적인 글로벌 소셜 네트워크의 창시자도 자신이 만든 서비스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다. 사람은 제품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과연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 변수가 많은 불확실한 일에 지나친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맥도날드의 전략
자본주의의 상징 맥도날드가 요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메뉴수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고 하는데, 메뉴수가 적은 신생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선전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이것에 대해서는 음식점, UI, 게임을 관통하는 한 가지 법칙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하지만 위기의 맥도날드라도 배울 점은 있다. 바로 현지화 전략에서 엿볼 수 있는 실험정신이다.
한 남자가 맥도날드 매장에 들어선다. 하지만 평소와 너무 다른 낯선 풍경.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간다. 간판을 확인한다. 맥도날드가 맞다. 창밖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가죽점퍼를 입은 포마드 머리의 청년들이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과 로큰롤 댄스를 추고 있다. 그때 뜨는 자막. ‘지금 맥도날드는 1955년’
2013년 5월 25일, 한국 맥도날드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케 하는 복고풍 광고 영상을 유튜브에 게시했다. 한국 맥도날드 25주년을 기념하여, 맥도날드가 처음 창업했을 때의 맛을 재현하는 취지로 기획된 1955 버거의 광고였다. 1955 버거는 2013년 6월에 출시되었고, 한 달 뒤에는 1988 버거가 출시되었다.
1955 버거는 한 달 만에 250만 개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한정메뉴로 출시되었었지만 2014년 1월에 정식 메뉴가 되었다. 2016년 현재는 바리에이션으로 리우 올림픽 기념 ‘리우 1955 버거’가 나올 정도로 지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1988 버거는 어떻게 됐을까? 사라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방금 글로벌 기업 맥도날드의 현지화 전략을 배웠다.
린 스타트업 방법론과 최소 요건 제품
맥도날드의 신제품 출시 방식은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방법론과 닮아있다. 린 스타트업에서는 전통적인 시장 조사와 분석 대신 경험을 통한 학습을 제시한다. 먼저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고, 시장의 반응을 측정하고, 측정을 통해 배운 결과를 토대로 제품을 개선시켜 나갈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지를 결정한다. 정리하자면 창조(Build) – 측정(Measure) – 학습(Learn) – 개선 혹은 방향 전환(Pivot)의 반복 순환이다.
맥도날드야 만들기 쉬운 햄버거니까 그런 것이 가능해 보인다. 만일 음식점 창업을 고민하고 있다면 수억 원을 들여 매장을 내기 전에 주력 상품이 시장에서 먹힐지 길거리에서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집약적인 정교한 제품도 이런 방법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오히려 기술집약적인 사업일수록 린 스타트업 방법론이 유용하다. 애초에 린 스타트업 자체도 기술집약 산업인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나온 방법론이다.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은 시장 조사 및 분석 – 기획 – 개발 – 테스트 – 출시 – 유지보수의 단계로 진행된다. 이것을 워터폴 모델(Waterfall Model)이라 부르는데, 가장 큰 단점은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수년이 지나서 제품을 출시한 이후에야 시장의 반응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워터폴 방식에서의 실패는 곧 수년에 이르는 시간과 비용을 한방에 날려버림을 의미한다. 가까운 예로 최근에 서비스 종료를 결정한 서든어택 2를 들 수 있다. 개발기간 4년에 300억의 개발비용을 들였지만 출시 두 달 후에 서비스를 종료해야 했다.
린 스타트업은 워터폴의 치명적인 단점을 최소 요건 제품(Minimum Viable Product)으로 해결한다. 워터폴이 모든 기능이 들어간 복잡한 제품을 장기간에 걸쳐 한번에 만든다면, 린 스타트업은 최소 기능을 갖춘 제품을 최단시간에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다. 그 후의 제품의 방향은 시장의 반응에 맡긴다. 시장의 요구에 따라 기능을 개선하거나 추가하고, 인기 없는 기능은 제거한다. 창조 – 측정 – 학습 – 개선 혹은 방향 전환의 반복 순환인 것이다.
페이스북도 비슷한 방식으로 탄생했다. 처음 페이스북에는 프로필 사진 한 장외에 다른 사진을 올릴 수 없었다. 페이스북은 최소 기능만을 가진 상태로 빠르게 출시됐다. 시장의 반응에 따라 기능들이 추가되었고, 인기 없는 기능은 제거되었다. 지금도 페이스북은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페이스북은 이미 세계 최고의 소셜 서비스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지프를 기억하라
다시 지프로 돌아가 보자. 아이젠하워가 왜 지프를 육상전력의 핵심으로 지목했을까? 전쟁터에서 지프의 보닛은 지도를 펴는 작전 테이블이 되기도 하고, 연설을 하는 단상이 되기도 했다. 목적에 따라 응급차, 기관포를 장착한 장갑차, 대전차포를 장착한 장갑차로 개조되기도 했다. 도시에서는 어떨까? 한국에서는 시발택시가 됐고, 필리핀에서는 지프니가 됐다. 윌리스 오버랜드는 지프가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될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지프를 기억하라! 사람들 손에 쥐어지기 전까지는 그 제품이 어떻게 사용될지 예측할 수 없다. 신생기업이든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는 사업부이든 상관없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시장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 최소 요건 제품을 만들어 시장의 반응을 측정하라. 그것이 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며, 끝없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생존의 기술이다.
-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책 및 자료들: 데이비드 커크패트릭 ‘페이스북 이펙트’, 에릭 리스 ‘린 스타트업’
원문: 여현준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