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테파니 스투더라는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이 한국에서의 첫 결혼식에 참석하고 나서 쓴 글이다. 원 제목인 ‘AND THE GUEST WORE YELLOW’는 타이타닉이 침몰하던 순간에도 밴드가 연주를 했던 것처럼 앞으로 끔찍한 상황이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혼란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 정도의 오마쥬 같은 문장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결혼식이라는 게 얼마나 형식적이고 경직되어 있으며 축하 또는 기념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내가 당분간 비혼주의자로 살겠다고 결정을 내린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기형적인 결혼식 문화다.
이 문화가 일종의 전통이라고 불릴 만큼 타당한 근거나 유래가 있는 것이라면 어금니를 물고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건 뭔… (수많은 결혼 유경험 독자들을 위해 생략.)
한국의 결혼식에 초대되다
이웃의 살던 아주머니가 내 집으로 직접 찾아와 딸 결혼식 청첩장을 건네던 어느 날 저녁에서야 나는 비로소 서울에 정착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작년에 한국의 수도에 왔다. 외국인들이 몰려 사는 게토를 피하기로 결정, 다소 뜬금없이 매력적인 구시가지 한 켠에 거처를 마련했다. 동네가 워낙 조용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택시 기사들조차 그 이름을 듣고 그런 동네는 없다는 이야기를 한결같이 할 정도였다.
마침내 한국식 축제 행사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청첩장을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어떤 색의 한복을 – 어떤 의식이 있을 때 입는 전통 비단 의상으로 내가 꼭 한 번 입어보고 싶었던 – 입어야 할지 곰곰히 생각했다. 아마 결혼식에 가면 여유 있게 점심을 먹으면서 다른 한국인 하객들과 한담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어쩌면 내가 신부의 부케를 받게 될 수도 있지 않나.
한국의 결혼식을 알게 되다
먼저 나는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할지, 그 민감한 질문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한국에서는 새 지폐를 새 봉투에 담아가서 신랑과 신부의 친척들이 앉아 있는 책상에 내고 오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한 친구가 설명하길 그 돈의 양은 결혼하는 커플과의 관계에 따라, 때로는 돈을 주는 사람의 나이에 따라, 최소한의 격식을 차린 30,000원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나 가족인 경우 200,000원 정도까지 다양하게 결정된다고 한다. 이제 막 자라나는 이웃 관계가 위태롭게 되지 않길 바라며, 나는 다른 두 친구와 축의금을 비교해 50,000원을 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슬프게도 내게 한복 옵션은 없는 것임을 곧 알게 되었다. 한복은 신랑, 신부의 어머니와 가까운 가족들에게만 허용되는 예복이었다. 겨우 망신을 피했다고 생각했다. 서양에서는 타인의 결혼식에 흰색 드레스를 입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에 발랄한 노란수선화색 드레스를 입기로 결정했다. 전혀 무례하지 않은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결혼식에서 저지른 나의 첫 번째 실수였다.
청첩장에 써 있는 주소에 도착했다. 높게 솟은 빌딩의 지하에 위치한 “웨딩 홀”이었다. 한국에서는 교회가 굉장히 흔한 편인데도 수백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홀을 가진 곳이 결혼식 장소로 더 선호된다. 이런 웨딩 홀은 결혼식 배경에 들어갈 꽃 장식부터 시작해 점심 식사까지(그리고 그 점심은 항상 부페 형식이다.) 혼례와 관련된 온갖 서비스를 패키지로 제공한다.
내가 알아낸 바로 한국의 웨딩 산업은, 하객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결혼식의 속도감에 많은 것을 기반하고 있다. 연중 인기가 있는 봄이나 가을에는 기간에는 같은 날, 같은 공간에 여러 결혼식을 치르게 되는데 따라서 대부분의 결혼식이 2시간 안에 속전속결로 끝이 난다.
수백 개의 짙은 색 정장, 짙은 색 타이, 짙은 색 드레스와 마주쳤다. 하객들이 검정색을 선호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조금 더 시끌벅적할 뿐인 장례식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친구들이 말하길, 그런 점잖은 의상을 입는 것은 신부에게 향해야 할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 것을 막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 나는 꽃 향기가 진동하는, 아주 기깔나게 꾸며진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신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녀와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다.
내 앞의 줄이 점점 짧아지던 중 신부가 입장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장면을 놓칠세라 나는 시끌벅적한 홀로 잽싸게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식장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식장은 조용해지지 않았다. 하객들은 – 친구들, 지인들,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동창들, 직장 동료들의 가족들, 신랑 신부는 모르지만 그들의 부모가 초대한 사람들 – 그저 식장을 들락날락거릴 뿐이었다.
한국에서 결혼식은 단지 부와 인맥을 보여주는 기회가 아니다. (체면치레를 위해 하객의 수를 늘리려고 특별한 에이전시가 연예인을 섭외하는 경우도 있다.) 결혼식에 더 많은 하객이 참석할수록 이 행사에 들어가는 터무니없는 비용의 손익분기점을 맞출 가능성이 높아진다. 심지어 몇몇 하객들은 식장에는 한 번도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그네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농담이나 나누다 가기도 한다. 몇 차례의 서약과 이 행사의 진정한 주인공인 장인 장모와 시댁에게 하는 큰절로 구성된 예식은 30분 정도면 끝이 난다.
다른 하객들이 점심을 먹으러 쏜살 같이 이동하는 사이, 나는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소중한 부페 쿠폰과 맞바꿈할 나의 돈 봉투를 주기 위해 식장 바깥에 마련된 책상으로 갔다. 하객들의 모든 선물(현금)은 나중에 전표로 정리되는데 이는 새 부부가 미래에 있을 그 사람들의 결혼식에 적당히 가격대가 맞는 선물(현금)을 주기 위함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다른 모두의 결혼식에 같이 돈을 쓰는 셈이다. (하지만 주최자에 대한 판단이 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역시 부페의 퀄리티.)
펼쳐진 방명록에 자신감을 가지고 이름을 내 이름을 적어내려갔다. 하지만 곧 나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 표정을 알아차렸다. 나는 정확히 15분 안에 결혼하는 또 다른 커플에게 축의금을 내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내가 참석한 결혼식의 방명록은 이미 없어졌고 안내원들은 홀에서 꾸물거리는 사람들을 식장 밖으로 안내하고 다음 결혼식을 위해 런웨이를 치우고 있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봉투를 안전하게 전달해야만 결혼식 점식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나는 신부에게 가서 축하 인사와 함께 봉투를 직접 건넸다. 무례한 행동이었을까? 이 봉투가 가진 진정한 가치가 제대로 전달된 걸까?
신부는 내가 건넨 봉투를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내게 친절히 말하길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내 결혼식에 대한 일종의 보증금을 줄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내가 재차 정중하게 봉투를 내밀자 그녀는 고마워하며 봉투를 받아 어머니에게 건넸다. 나는 부페 쿠폰을 받았고 스테이크, 볶음밥, 잡채, 김치 등이 진열된 부페에 줄을 서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노란 얼룩의 이방인
결혼식에 가기 전에 기대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웨딩 케이크 한 조각 정도를 집에 가져가는 것이었고, 모두가 바라는 부케를 내가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머지였다.
케이크에 대해 말하자면, 신랑과 신부가 자른 케이크는 어디론가 실려가더니 그 뒤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부케 행사는 온통 조작된 것으로, 이미 선정된 행운의 친구를 향해 신부가 직접 부케를 던지는 식이었다. 이 정도로는 그 끔찍함이 부족했던 듯 부케를 던지는 행위는 몇 차례나 반복되었다. 받는 사람의 양팔 위로 털썩 떨어지는 완벽한 부케 사진을 – 그 배경으로 그저 구경꾼일 뿐인 우리들의 박수가 들어가는 – 찍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위에 적은 그 무엇도 이 행사에 참석하게 된 나의 흥분을 감소시키진 않았다. 내 사랑스러운 이웃은 몇 주 뒤에 집으로 찾아와 웨딩 앨범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미 운명이 정해졌던 부케도 있었고, 누구도 손 대지 않은 웨딩 케이크도 있었다. 그리고 여러 친구들 사이에서 축하를 받는 행복한 커플 사진 속, 우울한 정장들 사이에 노란 얼룩도 보였다.
원문: 이한결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