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계에서는 잘 쓰지 않지만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용어들 중에 살리에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1인자를 넘어설 수 없는 2인자의 심리를 의미한다. 영화로도 유명한 희곡 <아마데우스>의 등장인물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이름을 붙인 것인데, 누구든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음악신동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그늘에 가려 늘 2인자로 살아야 했던 그의 모습이 바로 이런 감정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최근 신자유주의와 고용없는 성장이 축적된 결과 경쟁이 끝없이 심화되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좌절감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살리에리 신드롬과 통하는 면이 있다.
아들러와 에릭슨의 ‘열등감’과 그 극복
개개인의 모든 자원을 수치화 시켜 비교하려 드는, 소위 ‘스펙’ 풍토 속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 열등감이야말로 살리에리 신드롬의 핵심적인 감정이다.
열등감을 다룬 대표적인 심리학자로는 알프레드 아들러(A.Adler)와 에릭 에릭슨(E.Erikson)을 들 수 있다. 아들러는 평생의 주제가 열등감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어릴 적에 큰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도 늘 병약했고 구루병까지 있어 키도 작았다. 억눌리고 찌푸린 그의 성격은 친구관계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손위의 형은 건강하고 쾌활해서 그를 더욱 열등감에 빠지게 했다.
어른이 되어 의학과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그는 성욕이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에너지라고 보았던 프로이트와는 달리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욕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아들러가 보기에 인간은 성욕에 집착하는 동물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존중받고자 하는 사회적인 욕구를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성욕을 어떻게 숨기고 왜곡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본 프로이트에 반대하여, 형제와의 경쟁에서 오는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성격이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주장 때문에 프로이트와 결별했지만 아들러는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삶 자체가 바로 열등감 극복을 위한 투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들러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열등감은 우리에게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던져준다. 우리에게 열등감이 없다면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잠재력을 낭비하는 바보가 될 것이다. 따라서 열등감은 우리를 자극하는 고마운 채찍이다. 에릭 에릭슨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에릭슨이 주목한 것은 학교였다. 우리는 집을 벗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또래들을 만난다. 또래 중에는 나보다 못한 아이도 있지만 반드시 어떤 면에서 나보다 우월한 아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우월한 아이 앞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열등감에 직면하고는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여기까지는 아들러와 동일하다.
에릭슨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 자체 보다는 노력을 통해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얻는 과실인 근면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내가 노력하면 해낼 수 있구나”라는 믿음, 그것이 근면성의 근본이다. 이 근면성은 자신감의 근원인 자기효능감(self-efficacy)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나기도 한다. 모차르트를 만난 살리에리처럼.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근면성의 한계도 배우게 된다. 자신이 노력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과 노력해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남은 평생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배우게 된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기정체성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렇게 보자면 열등감을 직면하고 그것에 노력으로 대응하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인 승리와 패배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살리에리 신드롬에 빠지지 않는 법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함정이 존재한다. 노력만이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칙을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있다. 문제는 반칙을 이용해 열등감을 극복하면 허울뿐인 승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열등감을 노력으로 극복하면 우리는 성취감과 근면성 그리고 자기효능감을 얻는다.
하지만 반칙을 이용해서 열등감을 극복하려들면 적어도 그 순간에는 일시적으로 열등감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경쟁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돌이킬 수 없는 패배자로 남는다. 희곡(그리고 영화 속) <아마데우스> 속의 살리에리가 광인이 되어버린 이유도 그 궁극의 패배감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인간적 약점을 발견한 그는 모차르트를 음악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계교를 이용해서 제거해버린다. 반칙으로 이겨버린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이 절대로 모차르트를 실력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
다행히 실제 살리에리는 반칙이 아니라 노력으로 모차르트에 대응했다. 그는 모차르트 만큼이나 많은 좋은 곡을 남겼고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을 양성했다. 덕분에 비록 모차르트만큼 유명하지는 않았어도 당대에는 훌륭한 음악가로 행복한 삶을 영위했다. 천재의 광기를 부러워하기 보다는 꾸준한 노력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살리에리 신드롬에 빠지지 않고 행복을 얻는 비결일 것이다.
원문: 싸이코 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