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에 대해서 쓸 때 될 수 있는 대로 등장인물의 성격분석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영화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이라고 하면 보통 바로 그걸 하리라고들 기대하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인물 성격분석 말고도 영화에 적용할 수 있는 심리학의 효용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별로 성공적인 시도는 아니었던 듯 싶다. 지금까지 재미있다는 평을 들은 글은 주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건드린 것들이고, 그런 분석이 빠진 글은 사람들에게 심리학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평을 더 많이 들으니 말이다. 물론 이는 심리학의 한계가 아니라 내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가족의 탄생>도 그런 영화에 속한다. (그렇다. 이 장황한 서설은 아래 글에 대한 변명이다.)
가족의 탄생
이 영화는 등장인물 ‘경석(봉태규)’의 대사처럼 구질구질한 소재를 다룬다. 시작은 철도 없고 무책임한 가족구성원 때문에 속만 썩이는 두 사람 ‘미라(문소리)’와 ‘선경(공효진)’의 이야기다.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꼭 있다. 자기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남 일에 참견이나 하고, 지 멋대로 일은 저질러 놓고 정작 책임은 애꿎은 다른 가족에게 미루는 피붙이로 인해 겪는, 남에게는 창피해서 말도 못하는 고난 말이다.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피붙이는 실제로도 대부분 ‘남자’다. 우리 사회가 남자에게 부여한 권한이 무책임한 행태를 계속하면서도 뻔뻔하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허용한 덕분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비루한 소재를 조금씩 색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더니 마침내는 신선한 결말로 마무리 한다. 피는 못 속이고, 피가 물보다 진하고, 모든 것은 핏줄로 연결된다고 주창하는 요즘 드라마들에 비교하자면 이 영화의 결말은 참신하다 못해서 생뚱맞을 정도다.
마지막에 탄생한 가족은 그놈의 핏줄개념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고 심지어는 성역할과도 무관하다. 혈연관계도 아닌 두 여자가 엄마 역할을 하는 집과 아버지가 다른 누나가 가장 역할을 하는 집 사이의 연합이니 말이다. 익숙한 소재를 낯설게 다루는 것이 잘 된 영화의 기본이라는 원칙은 여기서도 통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참신한 대안가족의 탄생을 흐뭇하게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찜찜함을 버릴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오지랖 넓은 채현(정유미)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정은 많지만 책임감은 없는 인물이 셋 등장하는데 처음 두 명은 어떻게든 정리가 된다(한 명은 병으로 죽고, 다른 한 명은 그야말로 내쳐진다). 하지만 마지막 인물인 채현은 참으로 걱정이다.
그녀는 누가 돈이 필요하다고 우는 소리를 하면 자기가 가진 돈을 홀랑 다 줘버리고, 쓸쓸하고 외롭다고 하면 언제든 술친구가 되어주고, 아는 사람이 초상이라도 당하면 밤을 새가며 빈소를 지켜주고,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애인과의 약속도 무시한 채 그를 위해서 달려간다. 얼핏 보면 천사도 그런 천사가 없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이렇다고 생각해보라. 경석(봉태규)이 투덜거렸듯, 그녀에게 자신이 진짜 중요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 넓은 오지랖에 포함된 one of them 에 불과한지 의심이 드는 게 당연하다. 이런 의심은 태도를 바꾸면 되는 주관적인 문제라고 치자. 현실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다.
아마 만약 그녀와 결혼을 해서 같이 산다면, 당신은 매일같이 그녀가 오늘은 또 누구에게 뭘 퍼줬는지, 혹시 불쌍함을 전략으로 내세운 장사꾼에게 속아 쓸데없는 물건을 수십만 원씩 주고 사지는 않았는지, 중요한 일은 팽개쳐두고 또 누구를 도우러 나갔는지 걱정해야 할 것이다.
의존성 성격장애
영화에서는 그녀의 이런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넘치는 애정과 관심 때문이라고 묘사하는 듯하지만, 의심 많은 심리학자의 눈으로 보자면 그녀의 행동은 ‘의존성 성격장애’ 에 가깝다. 의존성 성격장애자들은 혼자서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별것 아닌 일조차 부모나 파트너 혹은 친구에게 맡긴다. 언제나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하고 혼자 있게 되면 불안해서 참지를 못한다.
오카다 다카시의 책 <나만 모르는 내 성격>에 의하면, 의존성 성격장애는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무조건 남에게 들러붙고 의지하려는 ‘어린아이’ 형이다. 이 유형은 기본적으로 생활능력이 낮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능이나 생활능력이 충분한 경우에는 이와는 반대로 ‘헌신형’이 된다. 영화 속 채현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남에게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기를 피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남을 돕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자기 행동의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왜 그랬느냐고 질문하면 대답은 한결같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너무 간절하게 요청을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로 내 책임이 아니다).’
이 의존성 성격장애자들에게는 자기 생각이나 자신의 판단 보다는 남들의 필요나 감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감정도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한다. 애초부터 자기가 어떻게 느끼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경석이 채현에게 ‘나는 너에게 뭐냐?’ 고 질문할 때 채현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다. ‘더 이상은 못 견디겠으니 떠나겠다’ 는 경석에게 채현이 내놓은 대답은 고작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는 말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답은 ‘나는 너를 사랑하며, 그 사랑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감정의 주체가 되어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녀는 바로 그걸 두려워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녀가 경석 같은 비교적 정신이 건강하고 책임감도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점이다. 이런 유형과 최악의 조합은 병적으로 남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 들이다.
의존성 성격장애자들의 눈에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매력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반사회적 성격장애자는 뻔뻔하지만 그 덕분에 확고한 자기 의견이 있고(그 대부분은 내 맘대로 남을 착취해도 상관없다는 내용이지만), 적극적으로 남을 조종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조종당하고 싶어 안달인 의존성 성격 장애자에게 이만큼 잘 들어맞는 궁합이 또 있겠는가. 둘이 만나면 의존성 성격장애자들은 반사회성 성격장애자들에게 휘둘리면서 마약도 먹고 범죄도 저지르고 팔려가기도 하는 등 온갖 이용은 다 당하면서도 그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순종한다.
주변에 의존성 성격장애인 사람이 있다면
그럼 이런 채현과 살게 될 경석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충고는 뭐가 있을까? 언제나 그렇듯, 아무리 큰 문제라도 피하기보다는 아예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일단 그녀는 전문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는 직업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녀만큼 이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에 아마도 그녀는 그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을 것이고, 그런 경험은 그녀의 자신감과 주체성을 키워주고 결과적으로 자신감 부족에서 기인한 그녀의 의존성향은 줄어들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영화를 보고 걱정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극장을 나설 수 있으려면 그만큼 이 세상이 덜 삭막해지고 여유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 세상일수록 채현 같은 사람이 불쌍한 피해자가 되기보단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씩 그런 세상에 가까워지길 바랄 뿐이다.
원문: 싸이코짱가의 쪽방
※ 이 글은 2006년 6월 5일자 <무비위크>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