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는 완성품 제조 기업의 전성시대였다. 대량 생산 기술의 확산은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완성품 대량생산 시스템을 만든 포드 자동차를 시작으로 GE와 같은 가전 회사, 일본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소니와 파나소닉 등을 비롯해 완성품을 제조해 판매하는 회사들에는 엄청난 기회였다. 한국 역시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 LG전자 등 모두 완성품을 만드는 기업들이 세계에 진출해 나아갔고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되었다. 한 마디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처럼 공장을 두고 완성품을 생산하는 공업 산업 기반의 회사들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완성품 제조 기업들은 근본적으로 브랜드의 노출에 있어서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비해 유리한 고지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구매자의 관점에서 제품을 구매해왔지 부품을 구매해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완성품 제조 기업에 부품이나 부분 제품을 납품하는 회사들은 자신의 브랜드를 노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완성품 제조 기업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에 조연 같은 역할을 주로 맡았다. 부품을 공급하거나 부분 제품을 공급하는 회사들은 좋게 포지셔닝하면 파트너사, 결과적으로 하청업체가 되는 역할 구조가 성립했다.
이런 부분에서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물건을 팔기는 하지만 자신의 브랜드를 노출할 기회가 적었던 인텔은 인텔 기반의 PC에 자신들의 브랜드 스티커를 붙이거나 언뜻 듣기만 해도 인텔 브랜드를 느낄 수 있는 브랜드 사운드를 만드는 등 번외의 노력을 통해 고객들이 인텔을 인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PC라고 하면 HP, 델, 혹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떠올리지 인텔을 떠올리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PC, 스마트폰, 노트북, TV 등을 제조하는 기업들이 주요 부품인 패널, CPU, 메모리 등을 생산하는 기업들과 자유롭게 거래를 하면서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꽤 차이가 크다. 아마 자동차는 인명에 관련된 부분이 있어서 국가별로 법과 규제가 존재하고 최근 들어 배기가스 등 환경 이슈까지 겹치면서 차량 제조사들이 서로 개별적인 개발 프로세스를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차량 생산 영역에서 생산 회사와 국가를 넘어서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예를 들어 트랜스미션 쪽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ZF나 아이신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들은 삼성이 아이폰의 AP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삼성폰을 위한 엑시노스 AP로 생산하고 메이주와 같은 중국 기업에도 엑시노스 AP를 공급하는 것과 같이 BMW, 캐딜락, 포르쉐 등 다양한 기업에 미션을 공급하고 있다. 다만 삼성은 자체적으로 스마트폰이라는 완제품을 함께 생산하지만 ZF는 자동차 자체를 만들지는 않는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자면 자동차 산업 역시 PC나 TV 산업군과 같이 부품 산업이 완성품 산업과 완벽히 분리가 가능하다. 글로벌하게 공용화 모듈이 확산될 수 있다면 현대모비스 같은 회사가 현대차 이외에 벤츠나 푸조, 혹은 링컨에 부품을 공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것은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의 공용 플랫폼화다. 그리고 전장 부분에 대한 산업을 기존의 자동차 회사가 아닌 전자 회사들이 점점 그 역할을 분담해 나아가고 있다. 거기에 더해 전기차의 시대로 옮겨가면서 테슬라 같은 기업이 특허를 자진해서 공개하고 구글이나 애플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필두로 기존에 탄탄하게 구성된 PC와 모바일 기반의 플랫폼을 차량으로 이식하는 과정에서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자동차 역시 스마트폰처럼 글로벌 플랫폼이 생길 수도 있다.
2016년 8월,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차량부품사업부인 ‘마그네티 마렐리(Magneti Marelli)’를 삼성전자가 인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삼성전자가 이 자동차 부품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지불할 것으로 예상된 금액은 30억 달러였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물론 직접 비교는 어렵지만 재규어·랜드로버가 2009년 타타에게 매각되었던 23억 달러나 중국의 지리자동차가 2010년 볼보를 인수하며 쓴 20억 달러보다 훨씬 큰 금액이다. 세계 30위권의 부품 회사가 그보다 훨씬 지명도 있는 완성차 회사들보다 기업가치가 높은 것이다.
한편 많은 기사가 삼성전자가 마그네티 마렐리를 인수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삼성전자가 보유하고 있는 유보금의 1.86%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나 삼성전자가 드디어 인수합병 시장에 큰 바이어로 등장했다는 부분, 삼성이 완성차 시장에 다시 뛰어들 가능성에 대한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우리가 더 집중해서 봐야 하는 부분은 이제 삼성의 관심이 완성차 외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삼성은 완성차 사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회사다. 또한 완성차 사업은 점점 품질 이슈로 리콜이 증가하거나 유로6와 같은 환경 규제 등으로 인해 조금씩 어려움이 증폭되는 사업이다. 단순히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이 자동차 마니아이기 때문에 완성차 사업에 다시 욕심을 낼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는 매우 위험하다. 만일 삼성이 완성차 브랜드가 탐이 났다면 시간차는 조금 나지만 30억 달러로 지명도 있는 완성차 브랜드를 샀을 것이다.
완성품 제조 기업의 경쟁은 분야를 막론하고 심화되고 있다. 스마트폰 이전의 시대에는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세계 최고의 휴대폰 브랜드였지만 이제 더 많은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경쟁하게 되면서 수익성이 악화되고 정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전 세계적인 표준이 없던 시절 강자들은 제품에 대한 표준이 안드로이드나 iOS같이 전 세계적인 기준으로 정립되고 확산되어 감에 따라 설 자리를 잃었다. 그들은 모두 과거 휴대폰 계의 벤츠였고 BMW였다.
소비자들은 똑똑해지고 있다. 과거 피처폰 시절에는 자신의 휴대폰에 어떤 부품이 들어 있는지 관심도 없고 알기도 어려웠지만 이제 정보의 범람 덕분에 자기 휴대폰의 부품 종류와 성능, 그리고 만족도를 바로 찾아볼 수 있다. 아이폰 매니아들은 애플의 아이폰에 공급되는 AP의 제조사가 삼성인지 TSMC인지를 확인하고 그에 따라 가려서 제품을 구매한다. 삼성의 메모리, LG의 디스플레이 패널이 들어가는 해외 제조 스마트폰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자동차 산업에서도 이런 변화가 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완성품 제조 회사들에게 큰 어려움을 준다. 소비자가 부품에 대한 이해를 높일수록 완성품 제조 기업은 제품 자체에 대한 경쟁력 확보가 어려워진다. 과거 소비자는 부품의 성능이 완제품의 성능이라고 받아들였지만 이제 ‘아이폰도 좋지만 AP는 꼭 TSMC에서 생산된 것이어야 해’와 같이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손쉬운 원가 절감이나 이윤 증대는 점점 어려워지고 결국 디자인과 최적화 등으로 영역이 좁아짐에 따라 완성품 제조 영역은 점차 레드오션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노키아와 모토로라는 영광의 길을 뒤로하고 각각 IT 플랫폼 회사들에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지금은 시장의 변두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반면 삼성과 LG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부품 생산·공급·판매 능력을 통해 스마트폰 사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별도의 B2B 판매를 통해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결국 부품 산업이 이중으로 효자 노릇을 한 것이다.
결국 완성품 시장의 과열 경쟁과 수익 구조 약화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면 컴포넌트 사업은 상대적 안정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완성품 회사가 최종적으로 고객에게 제품을 판매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전 세계 60억 인구 가운데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PC, 스마트폰, 또는 자동차를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안정성이 바로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ARM홀딩스를 인수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 결과 여태껏 2선의 경쟁 영역이었던 부품 산업이 1선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자동차 산업은 유난히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변화의 시작으로 인해 글로벌 차량 플랫폼이 공유되고, 그것을 기반 두고 자동차가 만들어져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그 신뢰성과 낮은 R&D 비용으로 인해 짧은 시간 안에 자동차 산업도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동일한 부품과 동일한 기술임에도 각 회사가 각자 투입해왔던 차량 개발 비용으로 인해 소비자들이 지불해야 했던 높은 차량 구매 비용이 줄어들 수 있다면 그 변화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내연 기관 시대의 종말은 이처럼 완벽히 산업의 구조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 자동차 산업은 앞서 말했듯 사일로(Silo)한 버티컬 시장이었다. 스스로 하청업체들에게 부품을 공급받고 내가 생산해 내가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각 자동차 회사마다 서로 설계 기준이 달라 부품을 공유하기 어려웠다. 카센터 등에서 자동차를 AS 받기 위해 방문해보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다. 이제 이런 자동차 산업은 차량용 소프트웨어의 공용화, 전장 시스템의 공용화 등을 통해 바뀔 것이다. 심지어 반도체 설계만 하고 생산은 위탁하는 팹리스(Fabless) 형태의 자동차 회사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완성차 업체의 역할은 섀시의 설계, 차량 내부와 외관 디자인, 안전장치, 그리고 완성품의 밸런스 정도만 남게 될 것이다. ‘과연 자동차 산업의 퀄컴이나 ARM, TSMC는 누가 될 수 있는가’는 이 산업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키 포인트다. 삼성전자는 비록 전장 산업에 진출한 시기는 경쟁 기업에 비해 조금 늦지만 부품 산업과 전장 산업을 통합하는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다. 분명히 가능성이 높은 배팅이다.
완성품 제조 산업이 저물어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미래의 칼날은 노키아와 모토로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폭스바겐과 도요타 등 완성차 업체의 목을 겨누고 있다. 20-30년 후 그들이 생존하지 못한다면 퀄컴이나 ARM이 모바일 산업 성장과 수익을 거두었던 것처럼 삼성같이 부품 산업의 근간으로 자동차 산업을 파고든 회사들이 실질적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