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살롱: 세상을 1%씩 바꾸는 사람들
시즌5, 에피소드 4회 주인공 김조광수 감독
만약 당신의 사랑이 사회에 지탄을 받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번 1%살롱은 영화를 통해 소수자의 시선과 목소리로 대중과 소통하는 김조광수 감독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김조광수 감독님은 학생 운동가 출신 영화감독입니다. 대표작으로 <친구사이?>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등 성소수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연출하였으며, 청년필름의 대표이자 신나는 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영화 제작사 레인보우팩토리 김승환 대표와의 결혼 스토리도 사회의 큰 뉴스가 되었었지요.
1% 살롱에서는 그를 모시고 감독으로서의 삶, 성소수자로서의 삶, 그리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감독님은 왜, ‘영화인’이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젊은 시절, 영화라는 예술장르를 선택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저희 형이 극장구경을 시켜준다고 해서 따라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알고 보니 어머니 지갑에서 형이 돈을 훔쳤던 것으로 드러나서 엄청나게 혼났지만). 첫 영화로 킹콩을 보면서, 극장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라는 대상에 매료되어 그 세계에 빠져드는 경험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감동적이었어요. 영화감독이라는 것이 마술사처럼 느껴졌던 거죠.
고등학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진로를 결정할 즈음엔, 막연하게 국어를 제일 좋아하니 국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날, 국어 선생님의 ‘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이인데, 국어교육과보다는 연극영화과가 어울려보인다’라는 한 마디가 제 인생을 바꾸었어요. 당시에 연극영화과는 속칭 날나리들만 간다고 생각해와서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오지 않았었죠.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감독님께서 ‘성소수자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기까지는 어떤 변화과정들이 있었나요?
저는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사이의 시기가 ‘성적 지향’에 대한 내밀한 고민으로 인해 힘든 시기를 겪었어요. 독실한 미션 스쿨을 다녔었기 때문에 남자를 흠모한다는 것이 굉장한 죄라고 느끼고 주기도문 1000번을 외워야 겨우 잠이 들곤 했어요.
대학 진학 후 광주민주화운동과 독재로 인한 탄압을 경험하면서 ‘나는 나만의 고민에만 빠져 살았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래서 저는 대학 10년 동안 학생운동만 하며 보냈어요. 영화라는 것에서는 솔직히 말하면 멀어져 있었죠. 그 당시의 운동권 안에서는 ‘동성애’라는 것이 곧 ‘미제의 썩은 문화’라는 생각이 팽배했어요. 그 당시 저에게는 성적 지향보다 학생운동이 더 소중하다고 느껴졌고, 제가 동성애자인 것이 밝혀지면 이 일을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더 숨기고 지낼 수 밖에 없었어요.
그렇다면 어떤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성소수자 운동을 시작하시게 되셨나요?
어릴 때 가졌던 ‘나의 자아에 대한 고민들’이 다시 들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어요.
1993 년, 탑골공원에서 가두시위가 있었는데 500명이 넘는 ‘백골단’에 쫓겨서 도망가던 중 피신한 곳이 당시에 ‘게이들의 극장’으로 유명했던 ‘P극장’이었어요. ‘나의 성적 지향’에 대한 고민을 15년간 미뤄뒀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 극장의 분위기를 이성적으로 거부했으나 학교에 돌아와서도 계속 생각이 나는겁니다. 큰 맘 먹고 다시 찾은 ‘P극장’에서 한 명의 형을 만나게 되면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 형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권이 보장되는 스웨덴으로 이민을 갈 거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 형과 반대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나와 같은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 형과의 대화를 통해 지금까지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 때문에 나는 사회를 향해, 다른 사람을 향해 계속 나를 혐오하지 말라고 외치기만 했지, 반대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5 년만에 이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15세에 게이라는 것을 알았고, 30세에 나를 인정하게 된 것), 나와 같은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소수자 후배들은 적어도 ‘나를 인정하는 데 나처럼 오랜 시간을 겪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후 잘 준비해서 ‘꼭 커밍아웃을 해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내 주변에 믿고 따를 만한 당당한 게이가 있다’는 사례가 되는 것만으로도 이 땅의 소수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커밍아웃은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독님을 ‘영화감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회운동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각각의 위치에서, 감독님께서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며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커밍아웃을 한 이후에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방송인 중에는 홍석천씨가 굉장히 좋은 역할을 해 주시고 계시지요. 이를 통해서 적어도 ‘동성애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혐오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음을 피부로 체감해요.
동성결혼을 알리고, 행하고 난 후에는 많은 성소수자들에게 가능성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큰 차이거든요.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면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될 것이며,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되면 결국 바꿔내고 말 것이니까요.
감독님과 화니님, 벌써 4년차 부부시네요! 결혼을 발표하실 당시에 세간의 관심을 참 많이 모았어요. 누군가는 돌을 던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축복을 드리기도 했지요. 동성결혼과 그 이후 국내 최초 동성혼 관련 재판을 진행하시겠다는 결단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혼은 저에게 또 다른 운동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결혼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가 중요한 바로미터라고 생각했어요. 동성애자들은 결혼이라는 것을 법적으로 할 수 없고, 이것이 바로 동성애 차별을 보여주는 선명한 사례라고 본 것이죠. 그래서 동성애에 대한 반차별 운동에 있어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미션이 곧 ‘동성결혼에 대한 합법화’라고 바라보았기 때문에 배우자와 같은 뜻으로 동성결혼을 발표하고 재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공할 수 있든 없든간에, 하나의 ‘운동(Movement)’이니까요.
사람들이 한계적으로 ‘성 소수자=동성애자’라고만 많이 알고있는데, 동성애와 이성애 말고도 다양한 성적 지향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어요.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성소수자 중에도 소수자가 있습니다. 인터섹스, 에이섹슈얼, 바이섹슈얼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바이섹슈얼에게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둘중에 하나 선택을 해라’라고 강요하기도 하구요. 이처럼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는 동성애자가 중심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을 예로 들면, ‘백인 게이’가 상대적으로 가장 커밍아웃하기가 쉬워요. 미국에서는 ‘성소수자 안의 불평등에 대한 싸움’이 시작된지 오래되었고, 한국도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가 발전된다면 이처럼 ‘필요한 싸움, 비적대적인 싸움’이 점차적으로 생겨나겠지요.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 일상적인 관계와 소통상황에서 해결되어야 할 가장 시급한 부분과, 법과 제도(시스템) 상으로 해결되어야 할 가장 시급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정성적인 태도의 변화와 함께 일어나야 할 제도적 변화 역시 중요하지요.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여러 부족으로 나눠져있는 국가이고, 그 중 한 부족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명예살인을 하기도 해요. 이 나라에서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뤄냈지만, 인식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죠.
예술가, 혹은 영화인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영화는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반의 대중 예술 중 가장 대중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요.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그를 통해서 영향을 받지요. 물론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는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내가 영화하길 잘했구나’ 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분명, 영화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통한 인식 개선 이후에는, 반드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이 next step으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봐요.
1% 살롱을 통해 감독님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편견을 한 꺼풀 벗겨낼 사람들을 위해 추천할만한 활동은 무엇이 있을지 이야기해주세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레인보우 퍼레이드’입니다. 이성애자와 성소수자가 모두 함께 어울려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대중적 행사들이 가장 좋겠어요. 실제 액티비티가 아니더라도, 많은 성소수자 단체들에 금액으로 후원해주는 일들도 있겠죠.
앞으로 10년, 20년 후 본인의 모습을 그려보신다면? 달라지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을 것은 무엇일까요?
저에게는 ‘운동’도 필요하고 ‘영화’도 포기하기 힘들어요.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할 성소수자 운동과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담기 위한 가장 소중한 대상인 ‘영화’ 모두 저에게는 놓치기 힘든 것들이죠. 아마 제가 앞으로 성소수자 운동에 더 집중하게 될 테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영화인이든 사회운동가이든 저는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해방을 위한 길을 10년, 20년 후에도 아직도 걷고 있을 것 같아요.
원문: 루트임팩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