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스트를 위한 특별한 학교
왜 안상수 님을 날개라고 부를까요? 그 이유는 안상수 님께서 갖고 계시는 교육에 대한 철학에서 비롯됩니다.
디자이너 안상수는 대학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퇴직 후 파주에서 타이포그라피학교(PaTI, 파티)를 세웠습니다. 안상수 날개 님을 모시고 PaTI의 설립 계기와 과정, 그리고 그의 삶과 교육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Q. 안상수 디자이너의 과거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오셨나요?
저는 충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처음 수학여행 서울 구경을 했고, 고등학교까지 지방에서 다녔습니다. 대학 입학 후 학교 신문사에서 학생 기자로 활동했었는데, 학생 편집장까지 하면서 자연스럽게 글자와 밀접한 관계가 되었어요.
어릴 때를 기억해보면 글자를 좋아했던 사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네 집이 이사를 했는데 제가 성냥 선물을 했어요. 기성 팔각성냥을 껍데기를 새로 만들어 목숨 수(壽) 자 글자를 손으로 그려서 드린 기억이 있어요. 의식적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을 하면서 타이포그라피를 계속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광고회사에 들어갔었는데, 사원 세미나 중 저에게 발표를 시켰어요. 그때가 제가 입사 3년 차였는데 영문 타이포그라피를 주제로 발표를 했었습니다. 그때 외국책을 번역하면서 힘껏 발표 준비를 했었어요.
그 후 동료들이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일이 생기거나 물음이 있으면 저에게 오곤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겹치다 보니 타이포그라피와 더 가까워졌나 봅니다.
Q. 파주 타이포그라피학교를 만드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타입’은 활자, ‘그라피’는 다루는 기술을 뜻하는 것입니다. 타이포그라피란 글자를 멋있게 다루고 디자인하는 일이지요. 사람들은 ‘디자인’이라고 하면 ‘그림’을 쉽게 생각하지만, 근본적인 시각 문화는 글자에서 시작됩니다. 시각디자인의 기초는 ‘글자’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학교일수록 타이포그라피를 단단히 가르칩니다.
파티 이름이 ‘타이포그라피 학교’인 이유는 디자인의 바탕을 중요하게 가르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타이포그라피만 가르치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Q. 안상수 교장님은 자신을 ‘날개’라고 부르길 원하시는데 이유가 있나요?
파티(PaTI)는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준말이고, 저는 교장입니다. 파티의 뜻에는 3무(無)가 있는데, 그것은 무재산, 무경쟁, 무권위입니다. 그 중 무권위라는 것은 저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파티를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 미국의 한 대학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그곳 선생님 한 분이 체재 기간 동안 저에게 자기 집에서 머물라고 제안하셨어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분 댁에서 머물면서 그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주로 교육과 파티 구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마지막 날 그분께 여쭤봤어요. 지금까지 나눴던 많은 얘기들 중 딱 한 가지만 기억해야 한다면 무엇이 중요할까를 여쭈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한국 디자인 교육에서는 ‘권위’를 없애야 합니다.
한국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느낀 것이라 했습니다. 권위를 깨어야 날개가 꿈꾸는 학교가 이뤄질 것이라고 힘주어 말해줬어요. 그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귀국하면서 그분의 충고를 되새겼습니다. 권위는 우선 호칭과 말의 위계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의 위계는 변화하기 힘들지만, 호칭은 제가 마음먹으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교장은 배우미와 스승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교장을 ‘날개’라고 이름짓고, 저를 날개라고 부르라 했지요.
처음에는 저는 물론이고 배우미, 스승들 모두 어색해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어요. 이제는 자연스럽게 저를 날개라고 부릅니다.
제가 날개로 불리면서 많은 장점들이 나타났어요. 배우미들이 저에게 서슴없이 인사하고, 사소한 이야기라도 저에게 편하게 얘기하더라구요. 우선 제가 즐거웠습니다. 그러니까 소통도 빨리 되고 문제가 생기면 그것들이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하니까요.
Q. 대학교 교수이셨다가 퇴임하시고 PaTI를 세우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대학교수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으로 혜택을 많이 누리는 직업이잖아요. 그러한 대학교수로 정년퇴임하는 것이 물론 정상적인 길이었겠지만, 차창 밖 다른 풍경으로 가고 싶은 욕구가 컸습니다.
비유하자면, 저는 KTX 우등칸을 타고 가는 사람이었죠. 기차를 타고 가다 답답하면 옆 칸으로는 오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궤도 위를 벗어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종착역까지 가지 않고 중간역에서 내려서 티코(작은 자동차)로 갈아탄 것입니다.
기차에서 내릴 때 겁이 나기도 했어요. ‘혹시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지?’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제가 결정 내린 계기는, 내가 죽을 때 이것을 안 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파티(PaTI)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진정 좋아하는 모교를 정년 전에 떠나서 아쉽지만 다른 방법으로 모교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PaTI의 수업방식은 어떻게 되나요?
PaTI에는 ‘한배곳’과 ‘더배곳’ 두 과정이 있습니다. 한배곳은 4년제 학부 과정이고, 2년제 더배곳은 심화 과정입니다. 파티는 삶의 밀착된 디자인을 업으로 삼길 바라며, 가르침이란 말보다 대화를 중시하는 배곳입니다. PaTI 수업은 워크샵 위주로 구성됩니다.
파티 모토 중에 ‘생각하는 손’이라는 것이 있어요. 창의는 머리에서보다 손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손과 몸을 많이 쓰게 하는 교육을 지향합니다. 일단 파티에 입학하면 자기가 4년 동안 쓸 책상-의자 만들기를 시작해요. 우리는 이것을 ‘내 공간 멋짓기’라고 불러요. 노네임노샵의 김건태 스승이 이 워크숍을 맡습니다.
서울의 재개발지역을 미리 파악해서 버리는 가구를 배우미들이 모으고 있습니다. 버려진 가구들은 대개 7-80년 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활의 손때가 느껴집니다. 재료도 합성목이 아닌 원목이 많아요. 손질을 잘하면 정말 좋은 재목이 됩니다. 트럭으로 그 가구들을 실어오고 자기만의 쓰임과 디자인으로 가구를 멋짓습니다. 각자 창의적으로 자신의 공간이 만들어지지요.
어떤 배우미는 책상에 낮잠 자는 공간도 만들고, 또 다른 배우미는 책상에 커튼을 달아서 자기만의 인형극장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결과물들은 원래부터 만들려고 계획했던 것과 버려진 가구 수집과 제작 과정에서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파티엔 숙제가 없습니다. 배곳에 자기 공간이 있고, 그곳이 자기 작업장이기 때문입니다. 공개된 장소, 공개된 작업 과정 속에서 자기 생각의 시각화 과정이 남에게 보이게 되고 또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작업들이 수정되고 커 나갑니다. 만약 집에 가서 숙제로 해오면 실제로 완성되기까지 과정을 전혀 모르잖아요. 그런데 실기 워크숍 과정을 배곳에서 해내면서 더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게 됩니다.
교육이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교육 기관은 10년, 20년 앞을 보고 하는 곳이기 때문에 배곳에서는 자유가 중요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창의적인 학문이 싹트고 꽃피고 아름다움이 태어납니다.
Q.PaTI 에서 일어난 일들이 궁금합니다.
PaTI에는 입시 미술학원에 다녀보지 않은 배우미들이 많습니다. 그중 한 배우미는 파티에 오기 전 오토바이 경기에 참여하면서 수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입학 후 학교를 한 학기 다니다가 적성을 못 찾고 휴학했었는데, 쉬다 보니 다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복학했지요.
이제 그가 자기만의 자유로운 그림으로 브로셔도 만들고, 또 파주 지역 신문에 고정적으로 ‘파주풍경’이라는 컬럼에 사진을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오토바이 타고 다니며 기동성 있게 사진 찍고 다니고 있어요. 그는 자신만의 삶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배우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스승들이 오히려 배우미들에 배우고 치유받고 감동받는다는 말을 많이 해요.
파티는 주 단위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장점으로 좋은 해외 외국인 스승이나 현장 전문가 스승들을 한 이레 단위로 초청해서 교육받을 수 있어요. 이 장점을 살려서, 우리나라가 취약한 컬러(color) 실기 교육에 스위스에서 컬러 분야 대가 즈빔퍼 스승을 모셨어요. 그분의 가르침과 인품이 감동적이어서 배우미들이 정말 좋아했어요.
나중에 즈빔퍼 스승 컬러 워크숍 마지막 날 저녁에 배우미들이 생각하는 스승 이미지를 컬러로 표현한 작품을 책으로 묶어서 선물로 드리고, 배우미들이 고마움의 마음을 합창으로 노래 선물했습니다. 즈빔퍼 스승도 감동을 받으셔서 ‘교육자로서 내 삶에서 이러한 감동은 처음이다’라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오셨고, 앞으로도 계속 파티에 오셔서 가르치겠다고 하셨어요.
Q. PaTI의 배우미 선발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PaTI는 2밤 3낮 워크샵으로 선발합니다. 이전에 1차 서류 심사를 하구요. 입시 감독은 매해 외부에서 모십니다. 그분께 입시 전체 지휘를 맡기지요.
3일 워크샵은 합격 여부를 떠나서 그 ‘경험’만으로도 만족감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같이 있는 옆 사람이 경쟁자라고 생각하면 분위기로 딱딱하고 하니까 무엇보다 첫날은 서로 간의 긴장을 풀어주는 시간을 갖습니다. 몸을 맞대어 원 그리기, 가장 멀리에서 온 사람 순으로 줄 서기, 머리 색깔대로 줄 서기 등의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요. 그럼 첫날 낮밥 때가 되면 이미 친해져 있어요.
이렇게 긴장이 풀어진 후 개인 발표와 프로그램 진행과 심층 인터뷰를 합니다. 저희가 배우미를 뽑는 기준은 두 가지인데요, 첫 번째는 길동무요, 두 번째는 얼마나 디자인을 좋아하는가를 보고 뽑습니다.
파티는 학위가 없는 독립학교이기 때문에 파티를 믿고 4년 동안 같이 여행을 할 수 있는가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가 얼마나 디자인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과 협업하며, 충분히 몰입해서 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Q.학교를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그냥 하라’는 것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교육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가르칠 때 가장 행복해하고 기쁨을 느껴요. 모두가 스승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은 다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일본에 시부야 대학이라는 학교가 있어요. 그 학교는 한 젊은이가 만든 학교로, 토쿄 시부야 구에 있는 꽃집, 스파게티집, 옷 가게 주인들이 스승이 되고 그 가게가 교실이 되어 각 학과를 만든 지역 학교입니다.
무슨 일에나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기 한 일에 대한 보상이란 돈이 아니라 경험을 얻는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육은 경험을 나누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통로입니다.
Q.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지금 생각나는 것은 ‘도리불언(桃李不言)’이라는 말입니다. 복숭아나무,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이 모여 길이 생긴다는 뜻이지요. 무슨 일이든 좋은 사람들 모여 함께 한다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세상은 자기 자랑 많이 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분위기입니다. 오히려 이럴 때 조용히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천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그럴 때 삶의 생기가 생겨날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지성껏 하면 생각지도 못한 길이 생긴다고 믿어요.
원문 : ROOTIMP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