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성별 및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 유무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디자인을 의미합니다.
지난 달, 저는 곧 다가올 여름을 준비하며 시원함이 느껴지는 메탈 소재의 손목시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루트임팩트의 매니저님이 크기도 디자인도 시원시원한 손목시계를 소개해 주셨어요. 그것이 바로 디자인과 사회적 가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브래들리 타임피스’였습니다.
그리고 약 3주 전, 우연한 기회에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제작하는 ‘이원 타임(EONE Time)’ 김형수 대표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깊은 감명을 받아, 꼭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디자인에, 그 안에 담고 있는 스토리도 아름다운 제품이었습니다.
부디 제가 그 때 느꼈던 감동을 여러분께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스럽네요.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모두(EveryONE)를 위한 디자인. 이원 타임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손목 시계를 착용하고 있지만 타인에게 시간을 묻는 이유
김형수 대표가 대학원생일 당시였습니다. 어느 수업에서 그의 옆 자리에 앉은 학우가 시간을 묻길래 흔쾌히 알려 주었죠. 으레 그렇듯, 다른 학우들도 김형수 대표도 처음 앉았던 자리에 계속 앉게 되었고, 첫 날 그에게 시간을 물었던 학우는 이후에도 수업 중에 종종 시간을 묻곤 했습니다.
김형수 대표는 그에 항상 대답을 해 주긴 했었으나, 이윽고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 학우는 손목에 시계를 착용하고 있었거든요. 또한 우리 주변의 모든 곳에 시계가 있다는 것 역시도 깨달았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는’ 시계들이요.
아하, 그는 곧 그 학우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우가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시계를 착용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시계는 크게 두 종류입니다. 먼저 토킹 와치(Talking watch)라고 불리는, 버튼을 누르면 시간을 소리내어 알려주는 전자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 뚜껑을 열어 베젤의 시침, 분침을 만질 수 있는 시계가 있죠.
그런데 토킹 와치는 보통 시각 장애인들이 꺼려한다고 합니다. 버튼을 누르고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는 순간,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셈이니까요. 더군다나 조용한 공간(강의실이나 도서관, 혹은 음악회 등)에서는 특히 이 시계를 이용하기 쉽지 않겠죠. 반면 시분침을 만질 수 있는 시계는 이 침이 아주 약하게 고정되어 있어, 시간을 알기 위해 만지다 보면 침이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시각장애인이 이용하기에는 두 시계 모두 조금씩 불편함이 있는 것입니다.
김형수 대표는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알게 되는 이 시계들의 불편함은 왜 개선되고 있지 않고 있던 것일까? 시각장애인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저 형식적인 겉치레에 그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이 불편하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시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는 시각장애인이 편하고 유용하게 사용 가능한 시계를 직접 제작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릅니다.
“왜 우리는 다른 물건을 사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을 위한 손목 시계를 디자인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점자시계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후, 김형수 대표는 약 1개월 동안 컨셉팅을 하고 3개월 동안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여 시각장애인 단체에 찾아 이 제품을 소개했습니다. 손으로 만져 시간을 알 수 있되, 침이 쉽게 움직이는 단점을 보완한 기능적으로 훌륭한 모습이었죠.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시각장애인들로부터의 가장 많은 피드백은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기능에 대해서는 디자인보다 적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의 제품을 살펴보고 김형수 대표와 의견을 나누던 시각장애인 한 분이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제품을 사야 합니까?”
김형수 대표는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자신도 시각장애인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토킹 와치와 시분침 시계와 마찬가지로 ‘시각장애인의 입장이 아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그들에 대해 짐작하고 제품을 설계했던 것은 아닐까?’라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김형수 대표는 다시 제품을 설계하기 전 백여 명의 시각장애인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피드백은 역시 ‘디자인’이었습니다. 김형수 대표는 팀원을 재구성하기로 결심하고 산업디자인/그래픽디자인/건축을 전공한 팀원을 섭외했습니다. 이 때부터 더 이상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시계가 아닌, ‘모두가 좋아하고 쓸 수 있는 디자인의 시계를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디자인에 만전을 기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6-7개월 정도 다시 종이로, 레고로, 3D 프린터로 수 많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고 수정하고 다시 제작하는 기간을 거쳤습니다. 디자인도 아름답고 기능적으로도 불편함이 없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시간이었죠. 마침내 완성된 2차 프로토타입을 시각장애인 단체에 소개했을 때에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손목시계에 생명을 불어 넣다
이제 김형수 대표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가 만든 제품이 단순히 시각장애인이 이용하기에 편할 뿐 아니라,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사용하면서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스토리가 필요했는데, 시계에 담을 스토리를 고민하던 중 우연히 브래들리 스나이더(Bradley Snyder)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브래들리 스나이더는 군 복무 중 2011년 경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에 좌절하거나 슬픔에만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미국의 영부인 미셸 오바마를 만나 한 얘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눈이 안 보이게 되었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두려움에 갇혀 있지 않겠습니다. 비록 두 눈을 잃었지만 제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몇 번이라도 다시 저의 두 눈을 포기할 각오가 돼있습니다.”
그가 시력을 되찾기 위한 수 번의 수술을 거쳐 결국 시력을 잃게 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을 때, 침통한 한숨을 쉰 뒤 그의 가족을 향해 돌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할까?”
그리고 1년 후, 런던 패럴림픽에 수영 선수로 출전하여 1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을 목에 걸었죠.
브래들리의 이야기는 시각장애인뿐 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깊은 감명을 줍니다. 김형수 대표는 그의 스토리를 꼭 시계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무작정 브래들리에게 연락하여 만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팀이 만든 제품을 소개하고 브래들리의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브래들리는 매우 기쁘게 허락했습니다. 이원 타임피스가 제작한 점자시계의 이름이 비로소 ‘브래들리 타임피스’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단순한 시계 이상의 가치를 위하여
처음 제가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접했을 때 제일 먼저 했던 생각은, ‘디자인이 특이한데?’와 ‘깔끔해서 예쁘다.’였습니다. 디자인만으로도 혹 할 만큼 매우 팬시한 제품이었죠. 그리고 시계의 이름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는 꼭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종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자, 알음알음 브래들리 타임피스에 대해 알게 된 다양한 시각장애인 제품샵에서 입점을 제안해 왔습니다. 자, 김형수 대표는 기쁘게 그 제안을 수락했을까요?
그는 깊이 고민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시계’로서 브래들리 타임피스가 인식되기 위해서는 먼저 시각장애인용으로 판매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를 만드는 것만이 그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모두가 그 시계를 사용하면서 시각장애인은 좀 더 편하게 시간을 알게 되고, 비장애인은 시각장애인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간 인식 사이의 갭을 줄여나가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각장애인 제품샵의 입점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작년 7월 미국의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킥-스타터Kick-Starter’에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런칭해 제품 제작을 위한 비용을 펀딩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김형수 대표가 목표했던 금액은 4만 달러, 약 4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죠. 이 금액은 런칭 후 고작 6시간 만에 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펀딩 기간인 한 달이 지났을 때, 최종 투자 금액은 무려 59만 4천 6백 달러! 우리 돈으로 약 6억 원이었습니다.그리고 65개 나라에서 4,400건의 선주문을 접수하게 되었죠. ‘브래들리 타임피스’가 디자인, 사회적 가치 모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해외에서 먼저 시작된 브래들리 타임피스의 인기에 힘입어 국내에도 입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이 제품은 국내에 런칭을 하자마자 빛의 속도로 품절되었답니다. 현재도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국내 판매량이 모두 소진되어 구매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곧 판매가 재개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다려 집니다. 🙂
디자인으로 인정 받은 브래들리 타임피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소식! 영국 런던에 소재한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에서는 세계의 시계 변천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런던 여행자의 필수 코스인 만큼 많은 분들이 방문한 경험이 있으실텐데요. 대영박물관 측으로부터 바로 이 전시관에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전시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혀 왔다고 합니다! (2016년 현재, 대영박물관 영구 켤렉션으로 소장되어 있다.)
또한 현존하는 수 많은 시계들의 대표로 대영박물관에 전시된다는 것은 브래들리 타임피스에 내포된 가치, 즉 앞으로 우리가사용할 제품에 장애인/비장애인의 차별적 구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원 타임피스의 강한 신념이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에 의미가 있어요. 앞으로 우리가 사용하게 될 제품의 모습을 그리는데 강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보지 않고(Watch) 시간을 만질 수 있는 시계(Timepiece), 그리고 그 제품들을 통해 이원 타임이 만들어 나갈 작지만 아름다운 변화도 함께 응원해 보아요.
원문: ROOT IMPACT / 글: 박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