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책 <이제는 이기는 인생을 살고 싶다>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이 있으니 상대방으로서도 소송 수행하기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상대방이 주장하는 것처럼 잘못을 했나요?”
“아닙니다. 완전 억지입니다. 우리에게 완전히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도 잘못이 큽니다.”
“아.. 사정이 그렇다면 이 소송에서 우리가 승소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의뢰인은 ㈜W테크. 프로그램, 사이트 구축, 개발회사이다. W테크는 발주처인 D실업으로부터 7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D실업 내부에 물류관리 및 업무 효율화 관리 프로그램을 구축해 주기로 했다.
W테크 규모로 봐서는 상당히 큰 액수의 프로젝트였기에 프로젝트 초기부터 많은 신경을 썼다. W테크는 D실업으로부터 착수금으로 7,000만 원, 1차 중도금으로 1.5억 원, 2차 중도금으로 2.5억 원을 받았는데, W테크가 당초 계약 내용과는 달리 납기를 맞추지 못했고, 세부적인 약속도 계속 위반해서 결국 D실업은 몇 차례의 내용증명 통보 이후에 계약을 해제하면서 이미 지급한 돈 4.7억 원 및 이에 대한 이자와 추가적인 손해배상 1억 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대한 W테크의 입장은, ‘우리는 할 만큼 열심히 했다. 하지만 D실업에서 우리의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여건을 만들어줘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D실업의 해제주장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나머지 잔금 2.3억 원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일을 수주하고 진행했는데 그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음을 이유로 계약을 해제하는 경우 해제를 하는 당사자(이 사건의 경우는 발주자인 D실업)가 상대방(W테크)의 귀책사유(잘못한 점)를 주장, 입증해야 한다. 즉 입증책임이 원고인 D실업에 있는 것이다.
소송에서 ‘입증책임’은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입증책임이 있는 쪽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모두 주장, 입증해야 하며, 상대방은 이에 대한 소극적인 방어를 하면 된다. 입증책임이 있는 쪽에서 판사를 설득시킬 정도로 충분히 주장, 입증하지 못한다면 소송에서 패소할 수밖에 없다.
이 사건에서는 일단 W테크가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D실업이 먼저 소송을 제기했고(원고) W테크의 업무수행에 문제가 있었으며, 그 문제점은 계약을 존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 모든 부분에 대한 입증책임은 D실업에 있는 것이다.
“솔직히 진짜 억울합니다. 우리는 그네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니까요. 정말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이라는 것이 우리 쪽의 일방적인 제공만으로는 마무리가 안 되거든요. D실업 측에서 작업지시도 제대로 내려줘야 하고 그쪽에서 처리해 줘야 할 부분이 많은데 그런 일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W테크 측의 프로젝트 매니저인 김강수(가명) 이사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솔직히 이 프로젝트는 저희 회사에 크게 이윤이 남지도 않는답니다. 하지만 좋은 레퍼런스가 된다는 차원에서 진행했는데, 이렇게 소송까지 제기되니 제 입장에서도 참 난감합니다. 프로젝트를 총괄 진행했던 저로서는 대표님께도 면목이 없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단 상대방이 제출한 소장(訴狀)만을 놓고 보면 W테크에게 잘못이 있음에 대한 입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입증책임은 D실업 쪽에 있으니 재판 진행 과정을 지켜보며 적절히 대응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 저희는 정말 억울합니다. 꼭 승소하게 해 주십시오.”
민사재판은 결코 ‘주장’만으로는 승소할 수 없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입증자료’, 즉 ‘증거’가 있어야 한다. D실업이 아무리 ‘W테크가 일을 잘못 했어요!’라고 주장해도 이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면 D실업이 결코 유리할 수 없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나는 W테크 관련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D실업의 소장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했다.
이 사건의 1차 변론기일.
“흠, 결국 이 사건은 원고 측이 피고의 귀책사유에 대해 입증을 하셔야겠군요. 소장에는 주장뿐이던데, 피고의 귀책사유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요?”
그러자 원고 측 변호사가 답했다.
“네, 갑 제4호증으로 녹취록을 제시합니다.”
“녹취록이라… 누구와 누구의 대화인가요?”
“원고 측 프로젝트 매니저인 박용하 부장과 피고 측 프로젝트 매니저인 김강수 이사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 내용을 보시면 피고 측의 과실로 프로젝트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흠… 그럼 녹취록 말고 다른 증거는 없나요?”
재판장이 계속 질문했다.
“녹취록에 나오는 피고 회사 김강수 이사를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저희 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상대방 회사 직원을 증인으로 불러서 물어보는 것이 더 객관적이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겠지요. 그럼 피고 측 변호사님? 어차피 증인이 피고 회사 직원이니까 출석하는 데는 별문제 없겠지요? 한 번 불러서 물어봅시다. 그럼 다음 기일은 11월 12일 오후 4시, 이 법정에서 그대로 속행합니다.”
나는 머리가 띵했다. 의뢰인 회사 프로젝트 매니저의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증거로 나오다니. 분명 김강수 이사는 자신의 대화 내용이 녹음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을 텐데. 나는 녹취록을 들춰보기가 겁났다.
사무실에 돌아온 뒤 김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방 출장 때문에 오늘 재판에 참석하지 못한 김 이사. 재판 과정을 설명해 주고 녹취록의 내용을 대강 설명해 주었다. 김 이사는 분을 참지 못했다.
“박 부장 그 자식이…”
어떤 경로를 통해 녹음되었을 지를 물어보았다.
“그게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몇 달 전 김 이사는 박 부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김 이사님. 제가 어려운 일만 맡겨드리고 연락도 제대로 못 드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 부장님이시군요. 저희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요 뭘. 오히려 제가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려 죄송합니다.”
“김 이사님. 제가 이번 주에 W테크 근처에 갈 일이 있는데 시간 되시면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네요. 어디 조용한 일식집 방으로 예약 좀 해 주시겠습니까?”
발주처 프로젝트 매니저의 식사 요청이라 김 이사는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식사 자리로 나갔다. 식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박 부장은 김 이사에게 고향, 나이, 가족관계 등을 물어보았다. 알고 봤더니 두 사람은 나이가 같았고, 큰아들도 서로 동갑이었다.
“오늘은 골치 아픈 일 이야기는 뒤로하고 서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나 나눠 보시자구요. 그리고 회사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너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 같아서. 이사님으로부터 넓은 세상 이야기도 좀 듣고 싶어서요.”
김 이사는 박 부장의 넉넉한 인품에 끌렸다. 50 고개를 앞둔 두 사람은 그동안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격의 없이 나누었다. 그 날따라 술도 술술 넘어갔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다. 그때 박 부장이 슬쩍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박 : “그런데 김 이사님. 요즘 우리 애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김 이사님, 아주 골치 아프시겠더군요.”
김 : “네, 무슨 말씀?”
박 : “기술자들이 자꾸 교체된다고 그러더군요. 요즘 애들 말도 잘 안 듣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도 없죠? 저희 회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일할 때랑은 정말 다르죠?”
김 : “아, 참.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요즘 개발자들 구하기가 예상보다 어려워요. 그런데 실력 있는 개발자들은 자꾸 프리랜서 스타일로 일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쓸만한 애들은 자꾸 사표를 내고 나가서…”
박 : “제가 100% 이해합니다. 도대체 누가 상사인지 누가 부하인지 모를 일이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후속 개발자를 채용하십니까?”
김 : “잡코리아에 채용공고도 내고 여기저기 알아보곤 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프로젝트도 자꾸 미뤄지는 것 같아 솔직히 미안하고요.”
박 : “어이쿠, 무슨 말씀을… 그런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이 그런 걸 서로 이해해야지요.”
그런 대화 내용이 녹취록에 고스란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이랬다.
- W테크에서 개발인력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당초 약속했던 급(level)의 개발자가 일관되게 일을 하지 못했다는 점
- 인력이 자꾸 교체되다 보니 지속적인 업무감독이 되지 않아 납기가 지연되었던 점
- D실업 실무자들이 여러 차례 지적을 했지만 W테크에서 성실히 응하지 못했던 점 등이었다.
“변호사님! 이런 식으로 도청하는 것은 불법이지 않습니까? 이런 걸 마구 증거로 제출해도 됩니까?”
김 이사는 흥분해서 내게 물었다.
“그게… 우리 법이 좀 애매하게 되어 있습니다. 갑과 을이 대화하는 것을 제3자인 병이 몰래 녹음하면 통신비밀보호법상 위법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대화자인 갑이나 을이 상대방 몰래 녹음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처벌하는 법규가 없습니다. 적법한 행위로 장려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법한 행위는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사실 재판을 할 때 상대방과의 대화를 몰래 녹음한 다음 녹취록 형태로 제출하는 경우가 많답니다.”
“아… 이 자식이. 그걸 악용한 거군요. 그럼 어떻게 하죠?”
“다음 기일에 이사님을 증인으로 신청했는데…”
“좋아요. 제가 증인으로 나가서 아니라고 말하죠! 제가 나가서 말하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그것도 잘 생각해 보셔야 할 일입니다만..”
일단 김 이사가 너무 흥분하고 있기에 길게 통화를 못 했다. W테크의 다른 직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녹취록의 내용을 보고 W테크의 대표이사가 노발대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김 이사에게 다음 재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반드시 녹취록의 내용을 뒤집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뒤 김 이사가 나를 찾아왔다.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어제 D실업 박 부장이 전화를 걸어 왔다는 것이다.
박 : 아이구, 안녕하세요, 김 이사님. 접니다.
김 : 어…? 당신! 당신 또 지금 녹음하고 있지? 그래 안 그래?
박 : 아닙니다. 녹음이라뇨. 그런 거 안 합니다.
김 : 당신이 도청한 거 다 알고 있어. 그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치나? 두고 보라구. 내가 재판에 증인으로 가서 말이야, 모든 걸 사실대로 다 밝힐 거야.
박 : 아, 그래서 제가 전화 드렸습니다. 김 이사님 그 날 증인으로 나오시면 ‘선서’를 하게 되는데요, 선서하고 거짓말하시면 위증죄가 되고 징역 5년 형을 받을 수도 있다고 우리 변호사가 그러던데요?
김 : 뭐요? 징역 5… 5년?
박 : 회사가 평생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너무 위험한 일을 벌이시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더구나 그 날 저랑 편안한 상태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녹취록으로 나와 있는데, 그것과 배치되는 말을 하시면 누가 보더라도 위증으로 볼 텐데…
김 : 당신! 당신 지금 나한테 병 주고 약 주는 거요?
박 : 아니, 그게 아니라… 아실 건 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변호사님, 박 부장 말이 맞나요? 위증죄로 걸릴 위험이 큰가요?”
내가 우려하는 바였다.
형법 제152조(위증, 모해위증)
① 법률에 의하여 선서한 증인이 허위의 진술을 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녹취록이 이미 나와 있는 상황에서 이를 뒤집는 증언을 법정에서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상대방 변호사가 녹취록 내용을 들이밀면서 “당신 이러면 위증죄로 처벌될 수 있어요!”라고 강하게 몰아붙인다면…
김 이사는 그 후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연히 W테크 대표이사는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김 이사 개인의 신상에 관련된 문제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김 이사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것은 W테크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녹취록의 내용이 진실한 것으로 법원이 판단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마련된 것이다.
그 사건은 나도 치열하게 다투었지만 결국 1, 2심에서 패소하고 말았다. 녹취록이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W테크는 이미 돌려받은 착수금과 중도금 전액 및 이에 대한 지연이자, 그리고 손해배상까지 배상할 수밖에 없었다. 김 이사는 재판 도중에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녹취 관련된 내용이다. 내 대화 내용을 상대방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몰래 녹음한 다음 이를 증거로 쓰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행위를 처벌하는 법규가 없으니 일종의 법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도 여기저기에서는 앞으로의 소송을 대비한 다양한 녹음이 행해지고 있다.
원문 : 조우성의 브런치
※ 글쓴이 조우성 변호사에게 배우는 계약 관련 필수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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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내용_세줄요약.txt
- 계약 분쟁시 활용할 수 있는 공격, 방어 방법
- 대표적인 독소조항 감별법
- 나에게 유리한 계약서 조항 확보법
왜 이 강연을 만들었지요?
대부분 법률분쟁은 계약서 때문에 발생하고, 그 분쟁의 해결 기준 역시 계약서입니다. 을의 입장에서는 갑이 제기하는 독소조항을 잘 감별한 다음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게 협상력을 발휘해서 그 내용을 변경시킬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 강연을 들으면 뭘 알 수 있지요?
상대방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서 내가 원하는 계약조항으로 변경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아울러 계약분쟁에 대비해서 분쟁 초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계약관련 법적 기술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강연을 들어야 할까요?
자영업자, 스타트업 대표.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의 총무 담당자. 벤처캐피털, 투자업계 종사자. 비즈니스 법률을 알고 싶어하는 변호사, 로스쿨생.
왜 조우성 선생님인가요?
조우성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법무법인 태평양과 법무법인 한중에서 변호사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현재 기업분쟁연구소의 소장으로, 변호사 업무 이외에도 협상, 인문학, 업무력 관련 칼럼과 강의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포스코, 금호아시아나, 롯데, 주택공사, 대림산업, 토지공사 등 5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계약서 작성실무, 기업소송, 지적재산권 소송 전략 등 다양한 법률강의를 해오셨습니다. 저서로는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