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적 헌신을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 독실한 신앙인들은 자기 삶의 상당 부분을 교회 활동에 바친다. 나도 한때는 뜨겁게, 전폭적으로 선교단체와 교회에서 헌신하며 내 삶의 대부분을 종교적 활동에 바쳤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십여 년 이상 공동체 생활도 하며 리더로 헌신하고 전 시간 간사까지 2년간 했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대학청년부에서 간사로만 10년을 넘게 보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꽃다운 시절을 온전히 종교적 열심으로 무장한 채 힘에 지나도록 살아봤던 경험이 있다.
그런 지나간 시간이 후회되냐고? 글쎄,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난 종교활동이든 비즈니스든 NGO 활동이든 뜨겁게 열정을 바쳐 헌신해보는 경험이 절대 헛되지 않은 인생의 자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열심’으로 무장한 채 단 한 번의 회의나 의문, 질문도 없이 ‘꿋꿋하게 전진만’ 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더이상 좋아 보이지 않는다. 좋아 보이기는커녕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적 열심으로 무장하고 내달리며 헌신할수록 그의 신앙은 신의 성품을 닮아가기보다 폭력적이 되고 독선적이 되며, 신의 성품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열심에 극성인 사람일수록 왜 신의 성품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변해가게 되는 걸까? 소위 교회 활동에 열심인 기독교도일수록 사랑과 자비, 너그러움과 겸손, 공평하고 정의로운 신의 성품을 닮아가기보다 미움과 혐오, 옹졸함과 오만함, 차별과 불의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 경험과 관찰, 고민에 의지하여 추론해본다면 ‘종교적 열심’이 많을수록 자신의 은밀하고 타락한 욕망을 은폐하고, 포장하는 것으로 변질되기도 쉽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라는 표현이 있다. 난 이 표현부터가 왜곡된 신앙의 가치가 기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쓰기 위해’ 사랑하는 분이 아니다. 누군가 연인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그녀)를 영광스럽게 사용하기 위해서일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그들이 자랑스럽게 쓰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일까?
한국의 개신교는 자신이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벌고, 권력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교회가 커지는 것들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위대하게 쓰임 받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런 신앙인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뭔가 열심히 헌신하고 열심을 부려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자기 신앙의 내공, 또는 자기 신앙 수준에 걸맞는 업적이나 열매라고 여긴다.
자신의 추악한 범죄를 덮기 위해 사역을 핑계 대는 목사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역사’에 위대하게 쓰임 받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에 빠져,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과 성(性), 권력의 욕망을 마음껏 채우며, 자신의 추악한 욕망과 범죄를 위해 사역을 핑계 대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미성년자를 모텔로 끌고 다니며 추악한 성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사역’을 핑계 대며 “네가 입을 뻥긋하면 사탄이 그 말을 이용해서 우리 사역을 망친다. 그러니 고통스러운 걸 참아라. 너 한 명만 참고 견디면 성령을 훼방하지 않게 된다”는 망언을 쏟아낸다. 성령을 훼방하고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당사자가 말이다.
사역을 핑계 대며 피해자를 협박하는 이동현 목사의 성범죄 기사를 보며 비슷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몇 년 전 전병욱 목사 사건을 다룬 ‘뉴스타파’에서 나온 전 목사와 피해자와의 통화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만 신앙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한국의 개신교에 널리 뿌리 깊이 박혀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다스리심을 초라하게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면, 당신 한 사람, 나 한사람 넘어지고 무너지고 없어진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의 일이 무너질까?
도리어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를 보면 그렇게 위대하게 쓰임 받는다고 칭송받았던 이들의 온갖 추태와 범죄가 결국 지금의 ‘개독교’를 만든 주요 원인이 아니었나?
진짜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신앙은 무엇일까?
착각하지 말자. 하나님은 나 한 사람 헌신하지 않고, 위대해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분의 일을 이루는 분이다. 제도교회와 기존의 목사들, 교인들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크지만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종교적 열심과 헌신이 없다고 해서 무력해지는 신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도리어 지금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섣불리 ‘위대해지려’ 하지 말고 겸손히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려 노력하며 묵묵히 ‘신앙’을 ‘내 삶의 전체 영역’에 적용하는 묵언 수행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참된 신앙은 내가 쓰임 받는다는 걸 핑계로 ‘내 죄를 폭로하면 당신이 다칩니다. 하나님!’ 이렇게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고난받고 슬퍼하는 지극히 작은 이들을 내 몸같이 돌보고 사랑하며 작고 소박한 내 삶을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가는 삶일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 마태복음 25:37~40-(새번역)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가장 작고 약하고 낮은 이들에게 다가온 신앙의 원리를 인간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 도리어 그 예수를 팔아 커지고 강해지고 높아지려고만 한다.
‘종교적 열심’에 목숨을 거는 인간들을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영웅이 되고 인정받는 것은 신앙을 ’삶 전체로 살아내는 것’보다 훨씬 쉬울뿐더러 사기 치기도 쉽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신앙으로 살아내려는 이들에겐 칭찬보다 비난이, 영광보다 수모가, 편안함보다 고난이 훨씬 더 많다. 게다가 훨씬 시간도 오래 걸리고, 눈에 보이는 성과도 미미하며, 박수쳐주고 칭찬해줄 사람도 별로 없다. 그리고 헌신의 결과로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아니며, 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이 사회의 누군가가 그 열매를 먹을 텐데, 그는 누가 그 씨앗을 뿌렸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늘의 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박수받고 존경받고 칭찬받으며 열심히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기 바빴던 이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셨듯 ‘이미 그들의 상을 다 받았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그렇게 하듯이, 네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마태복음 6:2-(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