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책 <이제는 이기는 인생을 살고 싶다>의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갑은 관계를 끊을 때 을보다 훨씬 쉽게 판단하고 쉽게 결정한다. 별로 아쉬울 게 없기 때문이다. 그 관계에 많은 것을 걸고 있던 을로서는 황당하고 억울하다. 자존심을 굽히고 매달려보지만 냉담한 갑. ‘갑질’, ‘억울하면 출세하세요’ 등의 말이 유행어가 된 지도 오래다.
이 상황에서 을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매달리고 읍소하는 것밖에 없을까?
‘송 과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경 쓴 경비원 그 양반, 전직이 선생님이었다네? 어쩐지 사람이 교양있어 보이더라고.”
어머니를 통해 우리 아파트 경비원 중 한 명이 송 씨 성을 가진 분이고 전직이 고등학교 국어교사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 밤늦게 들어오는 나로서는 경비원과 잠깐 눈인사를 하는 정도.
어느 날 어머니가 퇴근한 나를 붙잡아 앉혔다. 송 씨는 부인과 일찍 사별하고 혼자 키운 아들이 있는데, 괜찮은 회사에 취직하고 최근 결혼도 했단다.
“그 아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네. 송씨가 자랑으로 생각하는 아들인데 말이야. 송씨가 나나 네 아버지에게 참 잘한다. 요즘 그런 사람 없다. 네가 시간 내서 무슨 얘긴지 한번 들어봐 줄래?“
이렇게 해서 만난 송영락 씨(32세).
“아버님이 말씀 주셔서 이렇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기 전 몇 군데 알아보긴 했는데 별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답답한 상황입니다.”
그는 알루미늄 프로파일 및 판재를 제조하는 중소기업 H사의 과장. 주 업무는 영업. 건설 경기가 어려워져 작년에 이어 올해도 송 과장의 영업실적은 좋지 않다. 회사 내에서는 구조조정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송 과장으로서는 큰 거래 하나를 성사시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송 과장 대학 선배가 중견 기업 I사를 송 과장에게 소개해 준 것도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송 과장은 I사 구매 담당인 한 모 부장을 만났다.
I사는 업계 2위 회사. 송 과장이 만약 I사와 거래를 틀 수만 있다면 작년과 올해 실적 부진을 한 방에 만회할 수 있다.
“잘됐네요. 우리 회사는 내년에 서산 쪽에 공장을 지으려는데, 스펙이나 조건이 맞으면 거래 못 할 것도 없죠, 한번 맞춰 봅시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 부장은 송 과장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고 앞으로 꽤 큰 거래가 있을 수 있다는 정보도 주었다. I사 공장 신축에 H사가 자재를 납품할 수 있다면 H사 예상 매출 규모는 약 10억 원 정도. 절벽에 매달려 있는데 구원의 밧줄이 내려온 것이다.
이후 송 과장은 다른 거래처 발굴은 접어두고 오로지 I사 거래 성사에만 집중했다. 한 부장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송 과장을 불러댔다. 송 과장은 한 부장 요청에 따라 제품사양을 제출하고 여러 차례 설명도 했다. 한 부장은 자기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는 시제품을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송 과장은 곧 큰 거래를 따올 것이라고 개발팀에 설득해서 별도의 비용을 들여서까지 시제품을 만들어 한 부장에게 보내주었다. 또 한 부장은 술을 좋아했다. 저녁에 송 과장을 불러내 같이 술을 먹자고도 했다. 물론 술값은 전부 송 과장이 냈다.
어느 날 한 부장의 호출을 받은 송 과장. 한 부장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송 과장. 이거 어쩐다. 내가 작업을 거의 다 해놓았는데 갑자기 위에서 틀어버리는 바람에 이번 공사 건은 우리가 송 과장 회사 제품 쓰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아.”
송 과장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이게 무슨 소리?’ 송 과장은 이미 회사에 I사 프로젝트 진행사항을 계속 알렸고, 조만간 좋은 소식을 전해 줄 것이라는 희망 섞인 보고를 해 놓은 상태다.
“아, 한 부장님. 저 큰일 납니다. 그동안 별문제 없었잖습니까?”
송 과장은 절박한 마음으로 한 부장에게 매달렸다. 한 부장은 대단치 않은 일이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뭐 우리가 정식으로 계약한 것도 아니잖아. 나도 잘해 보려고 그랬어. 그런데 회사 일이란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 좀 꼬였어. 다음 기회에는 우선적으로 송 과장을 찾을게.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구먼. 이해해 줘.”
석 달간 작업한 거래가 엎어진 것이다. 송 과장의 처지가 참 딱하긴 했지만,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 부장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거랍니까?”
“제가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봤는데, 한 부장이 양다리를 타고 있었더군요. 다른 업체가 좀 더 센 베팅을 한 것 같습니다. 제게도 평소 뭔가를 바라는 눈치였는데. 제가 그걸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먼저 상담해 본 분들은 뭐라 그러시던가요?”
“두 분을 만났는데 다 비슷한 말씀을 하시던데요. 아직 저희 회사가 I사와 계약을 한 것은 아니니까 I사가 계약을 위반했다고 할 수는 없고요. 그렇다고 한 부장이 저희 회사나 제게 사기를 치거나 협박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손해배상책임을 묻기도 어렵고. 쉽게 말해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운 ‘절묘한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있는 사건이라고 표현하시더군요.”
송 과장은 한숨을 쉬었다.
“저로서는 I사 영업 건이 잘 될 것처럼 회사에 계속 보고했는데 일이 틀어져서 정말 난감합니다. 가장 두려운 건 이번 일로 인해 회사에서 문책을 당하는 겁니다. 아예 권고사직 처리될 수도 있고. 요즘 회사 분위기가 정말 안 좋거든요. I사를 설득해서 어느 정도만이라도 납품을 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요.”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한 부장은 이미 마음이 뜬 상황. 다른 변호사들이 이미 말한 것처럼 송 과장이 I사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도 어려워 보였다. ‘갑질’의 한 종류인가 싶었다. 나는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하고 송 과장을 보냈다.
‘틈새’를 발견하다
송 과장이 원하는 것은 I사와의 거래다. 따라서 I사와 완전히 척을 져서는 안 된다. 특히 구매에 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한 부장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 부장은 이미 다른 회사에 발주할 마음을 먹고 있으므로 어설프게 공격해서는 송 과장의 말에 콧방귀도 끼지 않을 것이다. 압박을 주되 완전히 척을 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하니 난감할 노릇.
나는 판례집과 협상책을 뒤적여보며 이 케이스에 적용할 만한 것이 있을지 찾아보았다. 그러다 ‘틈새’ 하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하면 될까? 자신이 서지 않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내용증명 한 통을 작성한 다음 송 과장을 불렀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작전을 알려주고 내용증명을 송 과장 손에 쥐어주었다.
“송 과장님, 일단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한번 부딪혀 봅시다.”
“과연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송 과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을 내라고 했다. 마치 경기장에 선수를 들여보내는 코치처럼.
송 과장은 사전 연락 없이 한 부장을 불쑥 찾아갔다.
“한 부장님, 갑자기 찾아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여태껏 반갑게 맞아주던 한 부장. 오늘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다.
“송 과장. 말귀를 알아먹을 만한 사람이…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는 좀 곤란하니 다음에 같이 하자고 그랬잖아요?”
“네, 부장님. 전 부장님 입장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게 좀 애매하게 된 것이… 제가 사실 저희 회사 윗분들에게 I사로부터 수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거든요. 제 ‘입방정’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부장님이 이번 거래는 힘들다고 말씀하셔서 제가 그대로 보고했더니 저희 회사 감사님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엎어버리는 건 문제가 있다면서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하세요.”
“뭐요? 법적 조치를 한다고? 계약도 안 했는데 무슨 법적 조치를 해요?”
“그러니까요. 전 사실 법을 잘 모르지만 대법원 판례에 보면 계약을 안 해도 계약협상 중간에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면 손해배상책임을 진다네요? 감사님이 그러셨어요.”
한 부장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서 제가 ‘한 부장님은 그래도 우리를 위해 애를 많이 써 준 분인데 법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거래를 계속해야 하는데요’라고 감사님께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감사님은 회사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다면서 모레쯤 I사 대표이사님 앞으로 내용증명을 보낸다고 하십니다. 일이 너무 커졌습니다.”
“뭐요? 내용증명?”
한 부장은 눈을 치켜떴다.
“감사님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제가 아까 감사님이 작성 중인 내용증명 초안을 입수했는데 한번 보여드릴까요?”
송 과장은 내가 작성해 준 내용증명 초안을 한 부장에게 건넸다.
수신 : I사 대표이사 000
발신 : H사 대표이사 000
제목 : 계약협상의 일방적인 파기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의 건
1. 귀사의 일익건승을 기원합니다.
2. 당사 영업담당은 귀사 구매담당과 사이에 지난 3개월간 당사 알루미늄 프로파일 /판재 공급 및 설치공사 계약체결과 관련하여 진지한 협상을 진행해왔습니다. 당사 영업담당은 귀사 구매담당의 요청에 따라 여러 차례 제품 사양에 대한 프리젠테이션과 시제품 제작까지 진행한 바 있습니다.
3. 그런데 귀사 구매담당은 지난달 10일경 정당한 사유 없이 계약협상을 일방적으로 중단시켰습니다.
4. 귀사와 당사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약을 체결한 바 없으나, 우리 대법원 판례(99다40418 판결)에 따르면, 계약협상 교섭단계에서 상대방에게 계약이 정상적으로 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주고서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체결을 거부한 것은 계약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당사로서는 귀사 구매담당의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준비 중에 있으며 이를 피보전권리로 하여 귀사의 부동산이나 매출채권에 대한 가압류 조치도 예정하고 있습니다.
5. 법조치를 진행하기 전에 귀사에 이러한 사항을 미리 알려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이와 같은 통보서를 보내게 됨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2015. 6. __.
H사 대표이사 ____________
한 부장은 그 내용증명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한 부장은 연말에 임원 승진 대상이었다. 예전에 송 과장에게 이를 자랑한 적 있었다. 이 내용증명은 한 부장 임원 승진 시나리오에 재를 뿌릴 수도 있다.
“아… 송 과장. 도대체 어떻게…”
“부장님.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는데 저희 감사님이…”
한 부장은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음…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이미 다른 업체에 말을 해 둔 것이 있으니 일부 물량만 H사에게 배정해 보는 걸로 조정해 볼게요. 4억 정도면 어떨지?”
“저야 그러면 감사하지만 부장님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이런 내용증명이 우리 회사로 날아오면 안 된단 말이오. 이 정도 선이면 회사 내에서 내용증명 발송 막을 수 있겠소?”
“네, 부장님이 이렇게 애를 써주시는데… 제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감사님 내용증명 발송을 막겠습니다.”
결과적으로 H사는 I사와 4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당초 기대했던 10억 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새로운 거래선을 뚫었다는 이유로 송 과장은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단다.
또 하나. 이 일로 나는 어머님과 송 씨 두 분께 엄청난 점수를 땄다.
‘을’일수록 법률지식이 필요하다
계약 협상을 진행하다가 부당하게 협상을 파기해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99다40418 판결)를 찾은 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또 협상론의 ‘굿가이 뱃가이 전술’, 즉 송 과장은 굿가이 회사 내 감사는 뱃가이를 맡는 역할분담을 통해 상대방을 적절히 압박한 것이 결합하여 송 과장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사실 법과 협상 지식은 갑보다는 을에게 더 절실히 필요하다. 위 사례에서 대법원 판례를 몰랐거나 ‘굿가이 뱃가이 전술’을 통한 내용증명 압박방법을 쓰지 못했다면 송 과장은 한 부장의 변덕 때문에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불상사를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법은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약자들은 법을 너무 멀리 있는 것으로 느낀다. 법을 너무 남용해도 문제겠지만,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인 논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아는 乙이 甲이다!’
원문: 조우성의 브런치
※ 글쓴이 조우성 변호사에게 배우는 계약 관련 필수상식!
나에게 유리한 계약서 만들기: 계약에 임하는 실전기술의 모든 것
강연내용_세줄요약.txt
- 계약 분쟁시 활용할 수 있는 공격, 방어 방법
- 대표적인 독소조항 감별법
- 나에게 유리한 계약서 조항 확보법
왜 이 강연을 만들었지요?
대부분 법률분쟁은 계약서 때문에 발생하고, 그 분쟁의 해결 기준 역시 계약서입니다. 을의 입장에서는 갑이 제기하는 독소조항을 잘 감별한 다음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게 협상력을 발휘해서 그 내용을 변경시킬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 강연을 들으면 뭘 알 수 있지요?
상대방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면서 내가 원하는 계약조항으로 변경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아울러 계약분쟁에 대비해서 분쟁 초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계약관련 법적 기술 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강연을 들어야 할까요?
자영업자, 스타트업 대표.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의 총무 담당자. 벤처캐피털, 투자업계 종사자. 비즈니스 법률을 알고 싶어하는 변호사, 로스쿨생.
왜 조우성 선생님인가요?
조우성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법무법인 태평양과 법무법인 한중에서 변호사로 경력을 쌓았습니다. 현재 기업분쟁연구소의 소장으로, 변호사 업무 이외에도 협상, 인문학, 업무력 관련 칼럼과 강의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포스코, 금호아시아나, 롯데, 주택공사, 대림산업, 토지공사 등 5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계약서 작성실무, 기업소송, 지적재산권 소송 전략 등 다양한 법률강의를 해오셨습니다. 저서로는 ‘내 얘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면’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