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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전후로 ‘핀란드 교육’ 열풍이 불었다. 일종의 ‘교육 유람단’을 꾸려 핀란드 교육 현장을 탐사하러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함께 배우고 더불어 살아가는 협력과 공동체의 학교 문화에도 불구하고(!)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는 핀란드 교육이 경쟁 일변도의 시스템 아래서 신음하는 한국 공교육에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쉬운 점이 있다. 핀란드 교육 열풍 이후 핀란드 교육의 특장점이라 할 수 있는, 학생의 배움을 중심으로 하는 협력적인 교실 문화를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했으면서도 핀란드 교육 시스템의 기저를 탐색하려는 노력이 충분치 않아 보였다는 것. 하드웨어(교육정책‧제도)를 개변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소프트웨어의 변화만으로 교육 개혁이 힘들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핀란드 교육 열풍이 그야말로 한 철 유행으로 끝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핀란드 교육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작지 않다. 민주주의와 민주시민 교육이 구호와 교육과정 속 활자로만 존재하는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안승문은 <핀란드 교육혁명>과 <핀란드 교육개혁 보고서>에 실은 일련의 글들에서 핀란드 교육정책과 교육행정, 학교운영의 핵심 원리를 민주적인 소통과 신뢰와 자율과 자치에서 찾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핀란드 교육이 성공하게 된 숨은 비밀을 관료주의적인 교육행정의 혁파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기저에 깔린 핵심 가치가 신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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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핀란드에는 국가교육청과 지방정부 교육국이 주도하는 엄격한 장학과 감사가 존재했다고 한다. 장학과 감사 시스템은 교육부나 교육청이 단위 학교에 지침을 하달한 뒤 그 이행 실태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톱-다운 방식을 기본으로 한다. 중앙집권, 감독과 지시가 기조다.
핀란드는 일련의 준비‧적응 기간을 거친 뒤 1990년대 중반 이후 관료주의적인 장학과 감사 시스템을 없애는 대신 ‘학교 자율평가 제도’를 도입해 시행하기 시작했다. 안승문은 전 세계적으로 교육행정 파트에 장학과 감사가 없는 나라는 핀란드가 유일하다고 하면서, 이는 그만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학교와 교사들의 자율 역량을 신뢰하고 있다는 징표라고 보았다.
장학감사가 없어지고 교사들의 자율성이 크게 확대되면서, 교사들은 학생들의 효과적인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학업성취를 높이기 위한 대안적이고 창의적인 교수 전략과 교수법, 교육학적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파시 살베리의 표현대로 ‘강요된 책무성’이 아니라 ‘지적 책무성’이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 안승문, <핀란드 교육의 성공과 개혁정책의 특징>, 《핀란드 교육개혁 보고서》, 249쪽.
학교 자율평가 제도는 학교 교육 전반에 대한 학생‧학부모 설문조사 방식이 포함된 학교운영과 교육활동에 대한 평가, 교육과정 평가, 학교장 리더십 평가, 학생들의 건강상태와 교사들의 업무 부담 등 다양한 측면을 함께 평가하는 통합 시스템이라고 한다.
안승문에 따르면 학교 자율평가 결과 학교운영이나 교육활동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공감대가 있을 경우 시청(지방자치단체) 교육국이 학교장에게 구성원들과 함께 그 문제에 대한 발전계획을 세워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거기에 소요될 예산을 추가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간다고 한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학교 자율평가 제도는 대략 3년에 한 번씩 진행되는데, 그 전의 장학 제도를 훌륭하게 대체할 수 있었다. 학교와 교사의 자율과 창의가 살아있는 학교 문화가 형성되면서 학교와 교육 시스템 전반의 질을 높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것은 관료 시스템이 강제하는 책무성이 아니라 지적 책무성을 충분히 담보해 주었다.
핀란드에서도 2004년 개정 교육과정 이후 지역 및 학교의 자율성이 강화됨에 따라 평가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추세라고 한다. (이윤미, <핀란드 교육 성공의 역사>, 《핀란드 교육혁명》, 163~183쪽 참조) 하지만 이것이 단위학교나 개별 교사의 수업 내용 및 교수방 법의 자율권을 제한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핀란드 교육체제가 보여주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은 90년대 이후 대부분의 나라들이 취해온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모델과 유사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단위학교 자율성을 부여하는 대신 국가교육과정 목표를 상세화하고 교육 평가를 강화하지만, 전수조사식 표준화 시험, 평가 결과에 대한 정보 공시, 학교선택제 등을 연결하여 학교의 책무성을 강화하려는 ‘결과 통제 방식(output control)’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 이윤미, 위의 글,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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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시작된 핀란드 교육 개혁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은, 교사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윤미는 핀란드 교육 당국이 새로운 교육 내용을 구성하고 학교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여러 문제들을 교사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해소했다고 보았다.
정부 관료들과 교사들이 협력에 기초한 위원회 활동을 통해 개혁의 계획과 실행 단계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이윤미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진행된 종합학교교육과정위원회의 활동을 꼽았다. 이 위원회의 활동은 이후 국가교육과정의 기초로 채택되었다.
전직 교사 출신으로, 1972년부터 1991년까지 20년간 핀란드 국가교육청장을 역임하면서 핀란드의 교육개혁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에르끼 아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능하면 교육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개혁 과정에 초기 단계부터 교사들을 동참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교사들이 개혁 추진과정의 일부가 될 의지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부모들이 안심하고 교사들에게 자녀를 맡기고 교사들이 좋은 교육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 신뢰의 바탕이 됩니다. 또, 부모들도 시간 날 때마다 교사들에게 연락하여 자녀에 대해 의논합니다. 정치인들 역시 교사들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학교에 예산을 제공할 때 교사들이 최적의 방법으로 예산을 쓸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수많은 단계에서 교직 및 교사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게 할 수 있으며,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 에르끼 아호 외, <핀란드 교육개혁 보고서>, 269쪽.
교사를 교육개혁의 주체이자 동반자로 보는 관점은 핀란드 교육개혁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가령 에르끼 아호에 따르면 1960년대 교육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할 당시 정치인들이 교원단체와 긴밀하게 협의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교사들이 개혁과정에 동참할 의지를 갖게 되었고, 교육개혁을 자신들의 개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개혁을 계획하는 단계나 교육과정의 개정 또는 학습자료의 개발 등 모든 개혁 추진과정에 교사들의 지식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평가제도’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교육개혁에서 핵심 사항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는 점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그는 평가결과를 급여와 연계한다면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말로 강제적인 평가 기제의 폐해를 강력하게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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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30년 교육개혁이 시사하는 교훈의 핵심은 책임 있는 교육 주체들 간의 신뢰 관계다. 교육 당국과 정치권이 교사 집단과 수평적인 소통 관계를 맺으면서 협력하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근무성적평정(근평), 교원능력개발평가, 성과급제 등으로 복잡하게 나뉘어 있던 교사 평가 기제가 올해 크게 정비되었다. 근평과 성과급제를 통합하여 교원업적평가로 바꾸고, 기존의 교원평가를 개선해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이다. 교원업적평가와 교원능력개발평가는 각각 ‘성과평가’와 ‘전문성 평가’의 기조를 갖는다.
내년부터는 교원업적평가 결과가 승진과 급여(성과급)에 연동된다고 한다. 에르끼 아호식 관점에 따른다면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할 것임에 틀림없다.
정부는 불합리한 <교원노조법> 조항을 악용해 전체 48만 교원 중 12.5%를 차지하는 주요 교원단체인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전락시켰다. 출범 27주년, 합법화 17년의 역사를 가진 주요 교사 집단을 동반자가 아니라 ‘적’으로 보는 듯한 이런 태도 역시 신뢰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에게는 새로 끼워 맞춰야 할 단추가 너무 많다.
원문 : 정은균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