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컨텐츠의 가치측정에 유독 야박하다. <뽀로로>가 크게 성공하면서 이제 좀 바뀌나 했더니 캐릭터 디자인이나 스토리 작가들에 대한 대우는 여전히 제자리거나 오히려 퇴보했다. “아동용 애니가 돈이 되는구나!” 이딴 식으로 결론이 나면서 아류작만 양산된 것이다.
<포켓몬고>가 뜨니 이제는 AR게임이 대세라며 또 지랄이다. 중요한 건 ‘포켓몬스터’라는 컨텐츠지 AR이 아니라니까? 포켓몬 정도의 컨텐츠라면 AR, VR이 문제가 아니라 단순 2D, 3D로 나왔어도 먹힐 수밖에 없다. 포켓몬이 어떤 스토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은 해 본 적이 있는가?
아무래도 우리나라 기업인들과 공무원들은 포켓몬이 간단한 아동용 캐릭터를 만들었다가 21세기에야 터져서 히트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반사적으로 <뽀로로 고>를 만들겠다고 선언할 수가 있겠는가.
이건 사실 내가 일하는 광고 업계도 똑같다. 블로그가 뜬다니까 우리도 블로그 하자, 페이스북 뜬다니까 우리도 페이스북 하자, 요즘은 죄다 인스타그램 계정 파고 있다. 성공한 브랜드들이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으며 거기서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냈는지, 채널별로 어떻게 다른 톤앤매너와 캐릭터로 커뮤니케이션했는지는 분석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블로그에 올릴 컨텐츠를 페이스북에 퍼가고 보도자료를 존댓말로만 바꿔 블로그에 올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기술과 플랫폼에만 올인할 뿐이지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값에는 언제나 투자와 보상이 최후의 순위로 밀려있다. 원인은 나 또한 대부분의 사람과 의견이 비슷하다. ‘최종 결재자가 컨텐츠를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문제는 컨텐츠인데
코카콜라, 나이키, 레드불, BMW 등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스토리를 가진 브랜드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컨텐츠 제공자들에게 가장 좋은 조건을 ‘꾸준히’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작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널리 퍼진 공감대다.
때문에 컨텐츠 제작자 입장에서는 위 브랜드들의 후원을 받는다는 건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진다. 예컨대, 핫식스의 후원을 받는 감독과 레드불의 후원을 받는 감독이 같은 현장에 있다면 누가 더 능력자로 보이겠는가?
나의 경우, 온라인 바이럴 회사를 창업했지만 사실 작가 쪽이 맞는 사람이지 경영자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돈 받고 직접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글 값이 너무 싸기 때문이다. 내가 몇 날을 고민하고 공부해서 컨텐츠를 만들어내도 이미 컨텐츠의 비용은 저렴하게 배정되어 있고, 그 값은 초급 작가 월급 맞추기에도 빠듯한 수준이다. 그 시간에 영업해야 살아남지 컨텐츠를 직접 제작하려 들면 망한다.
일례로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 사례를 들어보자. 우리 회사가 하필 난이도의 최고봉 아이템인 우주과학 분야의 페이스북 페이지 운영을 맡은 적이 있다. 전국을 뒤져도 마땅한 필자를 찾지 못해 대표인 내가 직접 운영을 땜빵하게 됐는데, 문과 출신인 내가 우주과학 마니아들에게 글을 쓰고 1따봉을 받으려면 얼마나 개고생을 해야겠는가? 오픈 전 약 2주간은 그야말로 고시생처럼 폐인 생활하며 우주 관련 서적과 커뮤니티를 파고들었다. 다행히 주어진 광고비 대비 광고주도 깜짝 놀랄만한 성과를 기록했지만, 배정된 예산은 쌍팔년대식 기준인 ‘200자 원고지 1매 기준 xxx원’이었다. 모든 문장을 광고카피 쓰듯 압축과 함축을 해내야 하는 페이스북 컨텐츠에 이런 산정방식이라니.
게다가 성과를 보고 선심 쓰듯 돌아온 답변은 “컨텐츠의 계약 물량을 늘려드리겠습니다.”였다. 컨텐츠 당 단가를 올려야지 물량을 늘려봐야 고생만 더 할 뿐, 내게 무슨 의미가 있냐.
그런데도 여전히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또는 직원들에게 시범삼아 직접 페북 운영을 하기도 하고 바이럴 컨텐츠도 만들고 익명으로 잡지 기고도 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은 늘 “투자시간과 에너지 대비 효율성은 노답이구나.” 로 귀결되고 만다.
광고뿐만이 아니라 IT 업계에서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능력 있는 개발자가 개발자로 살지 못하고 관리자로 승진하지 않으면 쫓겨나는 현실 말이다. 모두 제작자와 창작자에 대한 대우가 야박한 탓이다.
차라리 <헬조선 고>는 어떤가
조만간 ‘한국형 알파고’와 포켓몬이 나올 거다. 여기서 아무리 비난을 퍼부어도 쟤들은 한다면 해왔으니까. 근데 차라리 진정한 한국형 게임이라면 <헬조선고>를 추천한다. 발상의 전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는 게임인 거다. 내가 1레벨 오를 때 금수저 보스는 10레벨 올라가고, 한 달 내내 폐인질해서 캐릭터 키워놨더니 어느 뉴비가 현질해서 산 무기로 날 두들겨 패고 있고, 내가 괜찮은 사냥터를 발견해서 10분 정도 몹 잡고 있었더니 오토 캐릭이 수백 마리 달려와서 옆에서 같이 사냥하고 있는 뭐 그런 익숙한 광경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개성과 사회적 공감대만큼은 100점 먹고 들어갈 거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형이지 달리 뭐가 있겠나?
물론 컨텐츠에 투자하는 일은 당장 가시적인 성과도 보이기 어렵고 꾸준하고 집요한 투자가 지속되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싫으면 차라리 그냥 하지를 마라. 어설픈 한국형 컨버전은 폭망의 블루오션이다. 한국형 민주주의, 한국형 전투기와 잠수함, 한국형 블랙프라이데이 등등 ‘한국형’을 표방한 것들의 결말이 어찌 됐는지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나.
PS. 다 쓰고 보니 그런 게임이 실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니지다. 역시 헬조선에선 헬조선다운 컨텐츠가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