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좌파’ ‘진보성향’ 이런 식으로 규정하는 데 부담을 느낀다. 나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해당 단어의 무게가 다를 수도 있고, 실제로 여러 상황에서 다면적이고 모순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 과연 내가 그러한 존재가 맞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또 내가 스스로를 어떻다고 규정하게 될 경우 원하든 원치 않든 해당 집단의 이미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 또한 부담스럽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많은 부족한 점이 있지만,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며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3. 대학교 커뮤니티 생활을 10년 정도 하며 커뮤니티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좋은 짤방과 드립력 말고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후로 종류 상관없이 커뮤니티 자체를 하질 않지만,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메갈리안은 아니겠지만, 현시점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이지만 메갈리안은 아닙니다.” 이 말을 하는 것조차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건 마치 “전 좌파이지만 빨갱이는 아니랍니다.” “전 진보를 지향하지만, 운동권은 아니에요.” 이런 느낌으로 어떻게든 메갈리아의 낙인을 벗어 던져버리고 싶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4. 엄밀히 말해서 현재 집중 공격을 받는 ‘메갈리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디시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출발했던 메갈리아 사이트는 ‘게이 남성도 똑같이 재수 없는 한국 남자니까 게이남성들을 아웃팅 시키자’는 미친 주장으로 인해 격렬한 토론을 거쳐 메갈리아/워마드로 쪼개진 후 그냥 아예 망해버렸다.
5. 그래서 ‘메갈리아4’라는 페이스북 내의 페미니즘 페이지 중의 하나가 메갈리아로 인식이 되고 있는데, 이 페이지는 기존 메갈리아와 운동성이나 경향이 좀 다르다. 기존 메갈리아가 굉장히 과격한 사이트였다고 하면 지금의 ‘메갈리아4’는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페이지도 아니고 과거의 메갈리아 사이트와 동일한 페이지도 아니며 그냥 수많은 페미니즘 소모임(?) 중의 하나일 뿐이다. 메갈리아라는 이름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공격을 더 많이 받는 느낌이지만 어쨌든 이건 그들의 선택이고 페이지의 운영자도 아닌 주제에 지나가는 눈팅러이자 페미니스트 1인인 내가 왈가왈부할 바는 아니다.
6. 메갈리아가 비판받고 있는 가장 중점적인 요소로 미러링(거울효과: 상대방이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불쾌감이나 공감능력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 과거에 메갈리아가 가장 극단적으로 여성 혐오적인 활동을 하는 일베를 미러링 했었는데 이를 통해 ‘일베를 미러링하는 메갈리아는 결국 일베와 똑같은 것들’이란 비판을 받았다. 덧붙이자면 현재의 ‘메갈리아4’ 페이지는 미러링을 하지도 않는다.
7. 물론 미러링이 성공하려면 굉장히 재치있고 적절하게 적용해야만 하지만 설령 미러링이 실패해서 단순한 불쾌감만 야기하는 결과로 끝났다고 해도 미러링 자체를 미러링의 대상이 된 행위와 똑같이 판단할 수는 없다. 이건 마치 스너프 필름 vs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일반인 몰카 야동 vs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AV만큼이나 다르다.
8. 결국 “미러링이 싫어, 일베랑 똑같은 메갈 싫어”라고 이야기하지만, ‘메갈리아4’에서 제작한 티셔츠를 인증한 성우가 하루 아침에 잘린 사태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현 상황은 단순히 과거의 메갈리아 페이지에 대한 반발보다는 그냥 점점 세력이 확산되는 페미니즘 운동 자체에 대한 불쾌감과 거부감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더 적절하다. 애초에 사람들이 싫다고 이야기하는 그 메갈리아 사이트는 망했다니까!
9. 과거의 메갈리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현재 ‘메갈리아4’를 굳이 예로 들자면 ‘클리앙’, ‘자게이’, ‘엠팍’, ‘오늘의 유머’에도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메갈리아4’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안에는 정말 온건한 사고방식을 가진 소위 말하는 입맛에 맞는 ‘개념 페미니스트’가 있을 수도 있고, 막가자는 과격파가 있을 수도 있고 미러링을 빙자해서 사적 복수심을 채우려고하는 또라이들도 있을 수 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여성혐오자로 낙찍고 공격하는 사람들 또한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건 어느 사이트나 집단이나 마찬가지이다.
10. 또라이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나도 그렇게 공격받는 남자 한 명 편들어줬다가 가계정 페이지에 사진도 올라가고 신상 털릴 뻔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또라이 한 명이 잘못하면 그걸로 끝날 일이지 그걸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 전체의 낙인으로 찍어서는 안 된다. 이건 마치 극렬 문재인빠에게 탈탈 털린 후 “문빠들 다 모두 이상하다. 민주당 이상하다. 미친놈들이다.”로 결론짓는 것과 같다.
11. 애초에 완벽한 운동은 없다.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이나 과거 메갈리아에서 진행했던 미러링 역시 결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12. 과거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정부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면 ‘너 노빠지?’란 말 한마디면 상황 종료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상대적으로 대중화 되기 이전에 성추행이나 성폭력적 상황에 불쾌함을 이야기하면 ‘페미니스트 뭐 그런거예요?’란 반문을 듣던 때가 있었다. 지금의 메갈리아4 발 티셔츠 사태에서도 비슷한 걸 느낀다.
“여성혐오 하지 마세요.”
“너 메갈이지?”
원문 : 한승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