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7개월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퇴사가 정해진 시점에서 왜 퇴사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정리해 둘 필요성을 느낀다.
1. ‘보여주기’가 일상화된 회사 문화
- Headless Chickens, Running Around
너무나도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가진 회사라 연봉과 복지, 안정성 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안정성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변화를 가로막는 벽이었다. 비즈니스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수익이 안정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회사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구성원은 점차 보수화되어 가고 비즈니스 성공을 고민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정치꾼이 늘어난다. ‘효율성’에 관한 고민은 온데간데없고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성과를 ‘누가 더 잘 포장해내느냐’가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다. 주간보고와 월간보고에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숫자를 진척률이라 표시했다. 파워포인트 파일에는 글자만 빽빽했다.
보고가 있는 날이면 팀장은 그 숫자가 제대로 채워졌는지 보기 위해 전날 밤 11시에 퇴근하고 당일은 7시에 나오기 일쑤였다. 새벽에 시스템 릴리즈가 있는 날이면 부서장은 실시간으로 상황을 리포팅하기를 원했다. 시간대별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열심히 밤을 새우고 있는지 임원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새벽 작업 중 예쁜 템플릿으로 실시간 리포팅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다. 한시바삐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도 모자랄 시간에 청와대에 보낼 자료를 작성하는 데 시간을 썼던 멍청이들. 효율성과 실제 성과를 중시하는 현대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조직은 정반대로 가고 있는 조직이었다.
이런 비효율적 행태가 내 습관으로 굳을까 봐 너무나 두려웠다. 조직 문화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내가 생각하는 효율적 업무 방법 중 10%라도 양보했다가 습관으로 굳는다면 나중에 다른 조직에 갔을 때 바보 취급당할 정도로 치명적인 비효율성과 멍청함이었다.
2. 실무를 모르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 Blind Leading the Blind
배고픈 사람을 위해 라면을 끓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옆에서 이런 지시를 끊임없이 내리는 부서장이 있다면 라면을 끓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 라면을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정리하라
- 짬뽕과 짜장면, 비빔면, 칼국수와 라면의 특성과 장단점을 정리하라
- 라면을 3분 끓인 경우와 4분을 끓였을 때의 장단점을 정리하라
- 혹시 라면을 끓이다가 물이 끓어 넘칠 때를 대비해 대처 방안을 정리하라
- 냄비 밖으로 라면 수프가 조금 떨어진 이유에 대해 정리하라
아, 그냥 라면 좀 끓이자고! 나는 이런 지시를 듣는 대신 그냥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것을 택했다. 지시를 모두 지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 사이 물이 넘치든 면이 불어 터지든 해서 맛있는 라면을 끓이겠다는 본질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 ‘그걸 왜 그것밖에 못 했냐’고 하고,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알아서 그것도 못하냐’고 하고, 흡사 사도 세자가 된 기분이 드는 하루하루가 지속되었다(그나마 영조는 똑똑하기나 하지). 말로 먹고사는 컨설턴트 출신으로 IT 프로젝트 관리 경험이 전혀 없는 부서장의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최악이었다.
본질을 해치는 지나친 간섭으로 인한 스트레스보다 더 해가 되는 것은 이런 상황이 나를 수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능동적이고 의욕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던 나였으나 사도 세자 취급당하던 몇 달은 정신이 피폐해졌다.
위대한 프로젝트 결과물을 만드는 데 집중했으나 그와 더불어 부서장의 사소한 공격을 막아내는 데 에너지를 낭비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부서장의 공격만을 막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3. 사기 결혼
- Marriage Fraud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가 연애라면 실제 회사 업무는 결혼 생활이라고 한다. 그만큼 생각했던 업무와 실제 업무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IT 전문성을 뼈대로 삼고 프로젝트 관리 역량과 영어 능력을 더해 내 커리어를 만들어 갈 생각이었다. 애초에 IT 프로젝트 매니저의 포지션으로 입사했음에도 회사는 IT 전문성을 갈수록 빼앗아갔다.
나의 IT 전문성을 살리는 방향과는 다른, 비용 승인이나 계약처리 등 관리(admin)성 업무가 주어졌다. 프로젝트 수행보다 관리 업무 처리에 시간과 노력을 훨씬 많이 빼앗겼다. 특히 매니지먼트의 오판으로 10억 이상의 금액이 모자라는 계약을 성사시키라는 업무를 줬을 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런 환경에 오래 있을수록 커리어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을 했다.
4. 얻은 것들
6개월 이상 노력한 끝에 이직에 성공해 이 회사를 떠난다. 외국계라 하기도 뭐한, 1980년대 한국회사적인, 컬트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는 문화에서 빠져나오게 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이 회사에서의 생활은 몇 가지 교훈을 주었다.
- SK에서 인정받고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회사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해 바닥에서부터 평판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력으로 회사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사람 간의 관계에 노력해야 한다. 신입 사원으로 자연스럽게 회사 문화에 적응하는 것보다 노력이 훨씬 들어가는 일이다.
- 원치 않은 업무였지만 50억가량의 계약을 처리하며 큰돈을 관리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맡았던 30억가량의 프로젝트 역시 규모가 큰 프로젝트로 내 전체 커리어에 도움 될 것이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맡았던 6개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 마지막으로 1년 반 이 회사를 거쳐 이직한 덕분에 SK에서 바로 이직했다면 기대할 수 없었을 연봉을 받게 된 것도 좋은 점이다.
원문: MoreThan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