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미러링이라고 하는 수법을 난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예전부터 SNS를 통해서, 그리고 지인들에게도 이야기했던 것이기도 하다.
1. 미러링은 간단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극약처방’이다. 암 환자에게 강력한 항암제를 투여하거나, 혹은 환부에 감마선을 조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부작용 또한 강하다.
2. 메갈·워마드 회원들이 넥슨 사옥 앞에서 시위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위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을 표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이고, 누구에게나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니까. 단 그 방법을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대해서는, 이번 메갈·워마드의 시위 방법은 잘못되었고, 지탄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메갈·워마드 회원들의 이번 시위는 ‘미러링’과 마찬가지로 극약처방이지만, 이번에는 약을 잘못 쓴 것 같다. 약을 투여하는 부위 또한 잘못 판단했다고 본다.
나는 넥슨·나딕게임즈가 김자연 성우와 계약을 파기한 처사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넥슨·나딕게임즈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 종사자들이 모두 여혐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이들은 차라리 광화문이나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한다.
4. 직원들이 아이들을 맡겨놓는 탁아시설 앞에서 “아빠 나도 13살 되면 벗길거야?”라고 쓰여진 문구를 두고 ‘패륜적인 발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엄밀하게 놓고 보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문구 자체만을 보자면, 지극히 패륜적이고 비도덕적인 문구임이 맞다. 탁아시설 앞에서 어린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이런 문구를 흔들어대면서 시위를 하는 마인드 또한 개인적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위를 계획하고 주관한 이들은 정신이 나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여기서 그들이 이런 문구를 들고나오게 된 배경 또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5. 메갈·워마드 회원들이 이 문구를 들고 시위에 나온 이유는 <클로저스>라는 게임에 13세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레비아라고 하는 이 캐릭터는 <클로저스>의 캐릭터 중에서도 유독 선정적인 디자인의 복장과 남성들이 주로 소비하는 성적 코드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디자인과 설정을 가진 캐릭터이다. 심지어 이 캐릭터는 게임 중 읊는 대사 중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가진 남성들의 섹스코드를 자극할 만한 대사가 유독 많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특히 남녀관계를 일종의 ‘주종관계’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좋아할 만한 대사가 많다.
6. 물론 개발자들은 이 ‘레비아’가 게임 내 세계관에 등장하는 차원종이라는 종족이며 인간이 아니고, 플러스 게임 내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기에 여성비하나 여성혐오의 범주에 들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개발자들의 의견 또한 나름 존중한다. 하지만 오해의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냈으며, 그것을 통한 남성 소비자들의 대리만족뿐만 아니라 게임 내에서 이런 재생산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행태에 대해 한 번쯤 고민을 해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7. 메갈·워마드에서 이 ‘레비아’를 레퍼런스로 삼은 것 자체는 나쁜 방향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법이 틀려먹었다. 어린이집 앞에서 “아빠 나도 13살 되면 벗길거야?”라는 문구를 흔들어대면, 상처받지 않을 아이들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댁들은 항의해야 할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그런 건 시위가 아니다. 당신들이 탁아소의 이름까지 인용하면서 이용한 저 아이들은 넥슨 직원도, 나딕 게임즈의 개발자도 아니다. 넥슨을 상대로 시위를 할 거면 넥슨을 상대로 시위를 해라.
8. 소위 남성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페미니즘’을 따르라는 게 아니다. 애초에 올바른 페미니즘이라고 딱히 정의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다.
9. 이 와중에 조선일보 페이스북에서는 넥슨에 자동차를 몰고 돌진한 한 중국 남성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시위하면서 햄버거를 먹은 메갈·워마드 회원들도 함께 깔아 뭉개지라는 표현을 당당하게 올렸다. 이것 또한 패륜일진대, 작금의 메갈·워마드 회원들의 패륜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비난 일색인 남자 중 몇몇은 언론의 이런 행태에 눈을 감아버린다. 아니, 오히려 잘했다고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다고, 혹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같은 수준의 패악질을 어떤 것은 옹호하고 어떤 것은 부정하는 세상. 난 참 싫은데 말이지.
하긴 메갈·워마드를 잡겠다고 창작하는 모든 이들의 목을 죄는 법안을 찬성하는 걸 보면 스타트라인 운운하고 있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다만.
원문 : 성년월드 흑과장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