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과 ‘악의 평범성’
1960년 5월, 이스라엘 정보부에 의해 검거되어 1962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함께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핵심 실무 책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모사드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이스라엘로 호송되어 공개 재판에 부쳐졌는데, 1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사형되었다.
SS에서 중령 계급이었던 오토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단지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뿐 살인이나 학살의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자신은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다. 합리적으로 총통의 최종수단을 운영하였으며, 부여받은 목적에 충실하였을 뿐이기 때문에 무죄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충격을 받은 것은,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이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신앙심이 깊고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다는 거다. 수백만 명을 학살한 장본인 중 하나인 그가 그냥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런데 아이히만 같은 사례는 사실 21세기의 독일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출장 차 독일을 상당히 많이 가는 편이고 개인적인 여행으로도 독일은 자주 가보았던 나라인데, 독일 사람들과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특히 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간혹 놀라는 것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인류 역사 속의 악행’이 아니라 ‘우린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모든 것은 히틀러와 그의 부하들의 책임이지 난 관계없어’ 정도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당시의 기록이나 재판 영상을 보아도 그렇다.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 당사자들은 물론, 증인으로 나온 부역자들이나 나치 협력자들의 반응이 대부분 ‘그저 위에서 시켰으니까’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알프레드 로젠베르그, 한스 프랑크, 빌헬름 프리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발터 풍크, 할마르 샤흐트, 칼 되니츠, 에리히 뢰더, 발더 폰 쉬라크, 프리츠 사우켈, 알프레드 요들, 프란프 폰 파펜, 아터 자이츠 인콰드, 알베르트 슈페어, 콘스탄틴 반 누이라스, 그리고 한스 프리처까지 이들은 모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첫날부터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했고, 사실상 대부분 끝까지 무죄를 항변했다. 잘못은 명령한 히틀러에게 있지 자신들은 그저 집행했을 뿐이라고.
또한 독일이 전후에 행한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피해보상처리를 보면 사실, 이들은 정말 이 뼈아픈 역사를 진심으로 뉘우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경우가 사실 꽤 많은 편이다. 전범재판 및 징역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회고록이나 자서전, 혹은 자유의 몸이 된 이후의 그들의 삶을 한번 들여다보면 다들 꽤 잘 살았다. 나름 요직에 오랫동안 머문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같이 자기변호에 급급하고 체면을 살리는 내용의 회고록을 남겼다.
홀로코스트에 의해 말살된 유태인들의 수는 대략 593만 명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가 진행된 지역의 총 유태인 인구는 대략 88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피해를 본 건 유태인 뿐이 아니다. 전 유럽이 고통을 받았다. 특히나 독일에 대한 저항이 심했던 폴란드인들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일원들, 독일 내부에서 나치즘에 저항하던 학생들, 지식인들, 예술가들, 슬라브인, 유색인종, 유고슬라비아인들, 좌익 운동가들, 장애인들, 그리고 집시들. 이 모두가 피해자들이다. 이들 희생자의 수까지 합하면 대략 1천만 명 이상이 홀로코스트에 의해 학살당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롬족, 즉 집시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최소 22만 명 이상의 집시들이 홀로코스트 당시 학살을 당했는데, 전후 집시들에 대해서는 사실상 그 어떤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탄압받고 멸시받고 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집시 차별
롬족에 대한 인종차별을 Antiziganism이라고 하는데, 전후 독일은 Antiziganism의 선두를 달리는 나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오늘날 독일 정부가 시리아 난민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집시는 여전히 독일에서 자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인종차별의 대상이기도 하다.
독일은 코소보 사태 때 대량으로 유입되었던 롬족들을 2005년 이후 강제 추방해버리고 있다. 그 수는 자그마치 50만 명이 넘는다. 게다가 그들은 단순히 불법행위를 일삼는 불법 이민자나 입국자가 아니라, 독일에서 최소 10년 이상 거주를 했으며 독일어를 쓰고 심지어는 독일에서 태어난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
루마니아나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으로 강제추방 당한 이들의 상당수는 10대의 학생들이나 20대의 젊은이들이 많았고, 자신을 ‘독일인’이라 여겼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추방당한 독일에서도,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난민 캠프에서도 여전히 ‘집시’라는 이름으로 차별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독일에서 추방당한 이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차별을 받아 다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프랑스도, 니콜라 사르코지가 집시들에 대한 공공연한 추방정책을 실시했고, 올랑드르 정권 또한 마찬가지다.
게다가 집시들과 롬족은 유럽 어디에 가도 차별받는 존재들이니 이런 사례들이 크게 보도된 적은 사실상 거의 없다.
거의 동시기에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두 명의 집시 소녀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죽은 사고가 발생했는데 아무도 구하러 들어가지 않아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해안가의 구조대원들조차 그녀들이 익사하는 모습을 보고 시시덕거리다가 매스미디어에 보도되면서 전 세계의 질타를 받은 적이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린 건 로컬 뉴스도, 신문도 아닌, 관광객들이 촬영하여 SNS에 올린 사진이었다.
경찰 당국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무려 한 시간이나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저 소녀들의 유해를 관에 넣어 이송한 것이 전부였다. 관광객들의 대부분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극적인 사진을 찍어 트위터와 페이스북,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 바빴을 뿐. 로컬 뉴스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었을 때도 그저 ‘시신을 수습했다’ 정도의 경찰 발표가 있었을 뿐이고 그 후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집시 차별에 대해서 유럽 내부의 자성의 소리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집시 차별에 대해 쓴소리를 내는 유럽, 그리고 독일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분노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중동 출신의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정책에 분노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 정책에 분노하고, 샤를리 앱도 사태와 파리 테러 사태에 분노하고, 니스 테러에 분노하고, 시리아 난민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이들이 집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대부분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혹자는 “집시는 케이스가 틀리니 언급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이야기를 한다.
아니 독일의 경우,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1970년대에 서방국가들의 중동지역에 대한 전략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전까지, 유럽에선 홀로코스트에 대한 교육이나 역사적인 재조명 혹은 연구가 거의 끊기다시피 했을 정도다. 유럽 전역 또한 그러했다.
네오나치가 아닌 구 나치 세력들의 공공연한 거리행진이나 군중집회도 사실 5~60년대의 유럽에선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 중 하나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진심으로 과오를 뉘우치는 독일인’이라는 것은 사실 어느 정도 입맛에 맞게 편집되고 왜곡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독일인들의 성향은 빌리 브란트의 사죄 이후 자연스럽게 묻히기 시작했다.
물론 빌리 브란트의 뉘우침은 진정어린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가 폴란드에서 보여준 그 모습이 한없이 슬프기만 하고 공허하다.
뉘른베르크나 뮌헨, 아헨 등의 골수 친 나치 성향 동네에서는 무려 80년대 초반까지도 군기와 하켄크로이츠를 흔들어대며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집회가 자주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물론 요즘은 그런 광경을 보기 힘들지만, 그 정서가 작게나마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태인에 대한 학살문제가 재조명되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비판이 상식의 범주에 머무르게 된 이후에도, 유태인이 아닌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이나 죄의식은 그리 많이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집시(롬족)에 대해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008년에 UN 인권위원회에서 독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집시 탄압 문제에 대해 “인종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메르켈 정권 및 독일 정부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의 결의안을 발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솜방망이 처벌을 했고, 여전히 그러하다. 가장 말단의 가해자들만 살짝 처벌하는 정도로 끝났으니까.
씁쓸하지만 이들 가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 또한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의 전범들의 그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처벌받은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 책임이 아니다, 위에서 시켰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으니.
모든 이야기에는 양면이 있다
뭔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버렸는데, 사실은 독일의 이중성을 이야기하려고 한 게 아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을 하려는 게 내 취지이다. 작금의 메갈리아 티셔츠 & 성우 사건을 보면서 느낀 게 있어서 그렇다.
나치가 자행한 천인공노할 홀로코스트를 경멸하고 다시는 이 아픈 역사를 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집시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독일인들. 이들이 악인이었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슬픔이 여기서 시작된다.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누군가에겐 철천지원수였지만 남편과 아내와 연인을 사랑하고, 자식들에게 존경을 받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이며,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친절한 선량한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한다.
집시들에게 있어, 혹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앙겔라 메르켈은 악인이겠지만 대다수의 독일인에게는 올바른 일을 행하는 총리이다. 아베 신죠는 우리에게 있어 죽일 놈이지만 대다수의 일본인에게 있어 일 잘하는 총리일 것이다. 시진핑은 한족들에게는 영웅이고 티베트인들이나 위구르 인들에게는 악마이다. ‘일간베스트’나 ‘오늘의 유머’나 ‘루리웹’이나 ‘메갈리아’나 ‘워마드’의 회원들도 그렇다.
세상의 모든 악인이 뼛속까지 다 악으로 물들어 있다면 판별하거나 제거하기도 쉽겠지만 사실 인간 세상이란 게 그렇지 않다. 그래서 슬프다. 슬프지만 그렇기에 양면을 모두 들여다봐야 한다.
어느 한쪽의 의견만이 자신의 입맛에 맞기 때문에 그것만을 파선 안 된다. 그러다 보면 문제가 어디서 시작이 되었는지, 어떠한 문제들이 쌓여 있는지,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지가 보이지 않게 된다. 아, 싸그리 뒤집어엎어 버리면 쉽지. 그런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건데?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려 하기 때문에 더더욱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고 싶지 않은 것부터 먼저 보는 공부를 해야 한다. 당장 나 자신부터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나도 최근에는 너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했기 때문.
물론 배경도 함께 생각을 해봐야 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도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는 내 작은 외침에 동조하는 이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난 보고 싶지 않은 것들도 함께 보며 문제의 해결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네루의 이 한마디로 오늘의 노트를 끝낼까 한다. Ignorance is always afraid of change. 뭐, 그렇다고.
원문 : 성년월드 흑과장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