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대구에서 출생. 아버지는 박정희, 어머니는 육영수. 약력 끝.
부록)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 외의 행적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박정희의 집권이 사실상 시작되며, 청와대의 ‘영애’가 된다.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 훗날 공개되는 성적표에 따르면 4년간 들은 과목 중 단 8과목을 제외하고 전 과목 A 학점, 특히 3학년 2학기부터는 전과목 A를 기록하며 훗날 이산화가스를 만들어내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같은 해 프랑스 유학 중,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살당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실상의 영부인 역할을 시작한다. 1979년 박정희가 피살당하며 청와대를 떠나 사저로 돌아가기까지 이 역할은 계속되었으며, 최태민 등과 함께 새마을 운동, 새마음 운동 등을 주도하거나 참여하였다.
정수장학회와 박근혜의 관계, 그리고 잡음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있으며, 최태민의 부정과 이에 대한 박근혜의 비호가 10.26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 당시 보여준 박근혜의 용인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의혹은 이후 박근혜를 괴롭히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는데, 이에 대해 박근혜는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박정희의 피살 이후 박근혜는 사저로 돌아가 생활하였으며, 82년에는 육영재단을, 94년에는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직을 맡아 운영한다. 각각 어린이 복지사업과 장학 사업을 위해 설립된 재단이다.
이중 정수장학회는 이번 대선 정국에서 잠시 쟁점이 된 바 있는데, 이는 김지태가 재산을 출원하여 만든 부일장학회가 전신으로, 원래 5.16 장학회로 이름지어졌다가 82년 전두환이 박정희의 ‘정’과 육영수의 ‘수’를 따와 정수장학회로 개명되었다. 그 이름처럼 이사장을 역임한 인사는 모두 박정희, 박근혜의 측근 또는 친인척이었으며, 현재 이사장 최필립 역시 박정희의 공보비서관이었던 인물이다.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핵심 사안은 크게 두 가지로, 첫 번째는 이것이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를 강탈한 것이냐, 합법적으로 헌납받은 것이냐 하는 문제다. 현재 재판부는 이 과정에 강압이 있었음을 인정하였으며, 국정원 조사에서도 재산 포기를 종용하였다는 사실 등이 밝혀진 바 있다. 두 번째 사안은 정수장학회와 박근혜 사이의 연관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박근혜 본인은 이미 정수장학회는 공익재단으로 자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차례의 좌절에서 선거의 여왕이 되기까지
박근혜가 정치인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1998년. 이회창의 권유로 한나라당에 입당, 1998년 4.2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61%의 표를 득표한 압도적인 승리였으며, 이 글이 끝나는 시점까지 계속 대구 달성구 국회의원이었다. (여러 번 쓰기 귀찮아서 몰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여세를 몰아 2001년 대선 경선 참여를 선언하지만, 당시 경선 개혁안의 일환이었던 집단지도체제 도입이 대선 이후로 미뤄지면서 이에 반발하여 탈당,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대표가 된다. 그러나 한국미래연합은 같은 해 지방선거에서 광역자치의원 2명만을 당선시키는 초라한 성적을 냈고,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같은 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4년, 한나라당이 새천년민주당과 공동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며 ‘탄핵 역풍’을 맞으면서 박근혜는 당 전면으로 나선다.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 등으로 당시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며 대표직에 오른 박근혜는 ‘천막당사’ 등을 설치하면서 괴멸할 것으로 보였던 의석수를 121석까지 지켜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선거의 여왕’의 이미지를 굳건히 했으며 더불어 차기 대선 주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한다. 또 2005년 열린우리당의 사학법 직권상정에 맞서 장외투쟁을 선언, 3개월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커터칼 테러 사건으로 인해 얼굴에 약 11cm의 자상을 입었다. 이것이 이번 대선에서는 1차 TV 광고의 소재가 되기도. 당시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기초단체장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19명을 압도하는 155명의 당선자를 낸다.
두 번의 경선, 이명박을 넘어 대권주자로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2007년에는 대선에 도전. 지방선거에서의 압승에서 볼 수 있듯 한나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할 것이라 점쳐졌던 대선이었으나, 당내 경선에서 서울시장 출신의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하고 만다. 2007 대선은 이명박이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 이후 한나라당의 계파는 크게 ‘친 이명박(친이)’과 ‘친 박근혜(친박)’로 나뉘게 되고, 박근혜 본인이 정부가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 의사를 밝히는 등 계파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2008년 총선에선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 정치인들이 한나라당에서 대거 탈당. 친박연대라는 정당도 만들어졌는데, 14석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내는 등 선전했으며, 친박연대에 참여하지 않은 친박계 무소속 의원도 12명이 당선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장인 박근혜는 여전히 한나라당에 남아있었는데, 한나라당의 공천에 대해 비난하고 친박연대 정치인들에겐 살아 돌아올 것을 주문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친박연대는 세종시 문제를 위시한 계파 갈등이 어느 정도 불식되며 2010년 한나라당과 합당하였다.
친박연대는 당시 양정례, 김노식 의원의 공천헌금 사태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특히 당시 30세의 최연소 당선자였던 양정례의 공천헌금 사태는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는데, 이들은 15억원의 공천헌금을 당시 친박연대 서청원 후보에게 건넨 혐의를 받았으며 공천헌금을 주고받은 세 사람 모두 당선무효형이 확정되었다.
2012년 총선에서는 당시 이명박 정권의 실정과 디도스 파문 등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에 앉아 명칭을 새누리당으로 변경. 이 이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 정세가 여당에 불리하다는 분석에도 불구, 새누리당은 152석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하며 야권연대에 사실상 승리했고, 박근혜는 차기 대권 주자로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올라섰다. 그리고 같은 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에서 84%의 득표를 얻으며 대선 주자로 확정되었다.
1. 수첩공주 박근혜의 인생 매뉴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