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의 ‘왕수석’.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참여정부의 핵심 인사, 노무현의 가장 친한 친구로 알려진 인물.
잘생긴 남자, 노무현을 만나다
1953년 경상 거제에서 잘생기게 태어났다.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해 잘생긴 법대생이 되지만, 75년 유신 반대 집회를 주도하다가 구속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제적당한다. 출소 후에는 일종의 강제 징집을 당해 특전여단에서 복무, 지금까지도 문재인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 중 하나인 잘생긴 특전사가 되었다.
특전사로 복무한 그의 이력은 그를 색깔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해 준 일등 공신 중 하나. 그의 복무 기간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응하는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문재인의 부대가 투입되었던 덕분에, 일부 언론에서는 이 작전에 문재인이 직접 투입되었다는 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해 문재인 본인은 부인하고 있으며, 유신 반대 집회를 주도한 그를 군이 이런 작전에 투입하기는 어려웠으리란 점에서 신빙성은 높지 않다.
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으로 인해 유치장에 수감, 그곳에서 합격 소식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는데 실패. 당시 인권 변호사로 방향을 선회했던 노무현이 문재인에게 함께 일할 것을 권유, 문재인은 그와 함께 잘생긴 인권변호사의 삶을 시작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노무현과의 인연의 시작. 당시 그가 변호를 맡았던 사건 중 하나인 페스카마호 사건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만화가 박인권이 ‘선상반란’이란 제목으로 그린 바 있으며, 이외에도 부산 지역의 굵직한 시국 사건의 변호인으로 나서며 이름을 알렸다.
노무현과 함께한 성공과 실패
87년에는 노무현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문재인이 상임집행위원을 맡으면서 87년의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 이외에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이사(1985), 부산/경남지역 민변 대표(1991~2003),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1995~2003),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이사장(2002) 등을 역임하며 인권변호사이며 시국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88년 노무현은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지만, 문재인은 계속해서 부산의 대표 인권변호사로 남았다. 그러나 노무현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갔는데, 89년 노무현이 5공 비리 청문회 이후 의원직에 회의를 느끼고 사퇴서를 낸 뒤 잠적했을 때, 문재인이 비행기로 상경해 사퇴를 번복시킨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노무현 등 여러 사람으로부터 정계 진출을 권유받지만 고사. 그가 정계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02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부산 선대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다. 여기에서 노무현은 “나는 대통령 감이 된다,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는데, 이후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란 말은 문재인을 상징하는 표현이 된다.
대선에서 노무현이 극적으로 당선되며, 2003년 문재인은 정부의 초대 민정수석으로 임명되었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1년만에 물러난다. 그러나 2004년 노무현 탄핵 사태가 벌어지며 여행 중 급히 한국으로 돌아와, 변호인단을 꾸리면서 다시 정계 전면에 복귀한다. 이후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러나 탄핵 당시의 엄청난 국민적 열기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는 결국 지속적으로 지지율이 떨어지며 실패한 정부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돌아온 문재인… 구태인가, 운명인가?
이렇게 낮은 지지율과 함께 물러난 참여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친노로서 퇴장할 것처럼 보였던 그는, 그러나 노무현의 갑작스런 자살로 인해 다시 한 번 정계로 호출된다. 공식 분향소 추모객만 98만 5331명, 민간 분향소 추모객은 500만에 달한 범국민적인 추모 열기 속에, 그는 국민장 장의위원회의 운영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역할한다. 이후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2010년 8월부터 2012년 5월까지 약 2년간 재임.
참여정부의 ‘왕수석’으로 불리며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다. 이 별명은 참여정부에 있어 그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어느 측면에서든 그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칭호라 할 수 있다. 친노의 핵심으로 분류되던 대부분의 인사가 그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심지어 민주당을 떠나 다른 정당의 대표가 되는 와중에도, 그는 스스로가 참여정부의 핵심 인사였으며 친노 정치인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대선 토론 등에서 보이는, 참여정부의 공과 과를 모두 인정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대권 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말. 그러나 당시까지는 정치 참여를 고사하고 있었고, 그의 이름 역시 그냥 거론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 2011년 4.27 재보궐선거에서 김해을 단일화를 밀어붙이다 김태호에게 일격을 당한 유시민이 유력 후보군에서 떨어지며 다시 부상, 6월에는 책 ‘운명’을 내며 보폭을 넓힌다. 이 당시부터 야권 대선주자 중 손학규 등과 함께 선두그룹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 같은 해 8월 17일에는 야권 통합을 위해 뭉친 모임 ‘혁신과 통합’을 발족. 문재인 외에도 이해찬, 김두관, 문성근, 조국 등이 여기에 이름을 올린다.
2011년 12월 16일 야권 통합의 결과 민주통합당이 창당되며 문재인도 정당 활동을 시작. 2012년 1월 SBS 힐링캠프에 출연하면서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안철수와 함께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치고나간다. 그리고 2012년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55%의 표를 득표하며 국회의원으로 당선. 같은 해 9월 4일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부산 및 수도권에서의 압승을 바탕으로 56.5%를 득표,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다.
이후 무소속 대통령 예비후보로 나선 안철수와의 단일화에서 여러 파열음에도 불구, 안철수의 양보와 지지 선언을 얻어내면서 박근혜와의 양자 대결 구도를 만들고 있다.
2. 문재인의 잘생긴 인생 설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