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스타트업?
「왜냐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입 기획자가 아니거든」이라는 글이 꽤 논란이 된 적 있다. 이 글을 읽고 나도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지만 나조차도 그냥 입을 닫아야 하나 싶어 넘어갈까 했다. 그런데 그것은 나 스스로도 함정에 빠지는 것 같아 글을 쓰기로 했다.
내 생각에, 표현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글과 입은 동일하다. 나는 이제 어떤 사람들은 ‘자기 PR’이라고 부를지 모르는,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행위를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보려 한다.
최근에 아웃스탠딩 말고도 이런 글들이 많이 등장했다. 본업에 충실하지 못한 스타트업에게 일침을 가하고, 그 원인으로 대표의 자기 PR이나 모임에 과도하게 나가는 등 대외적인 활동에 집착하는 것을 꼽으며 ‘그들의 진정성이 거짓된 것’이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 같다.
진정성의 영역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누가 ‘잘한다, 못한다’와 같은 영역에 대해서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거짓된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는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본다. 진정성의 영역은 평론의 영역도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나는 매우 외향적인 사람이다. 물론 외향적인 내 자아와 글을 쓰거나 혼자 명상을 할 때의 내 자아도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즐겁게 해주고 싶고 웃겨주고 싶은 이상한 자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 시절부터 군대 시절,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나는 수많은 호감과 미움을 동시에 받고 살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이를 호불호가 갈린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과도하게 나서서 질문하고 논쟁하는 것을 보며 ‘깝죽거린다’라고 평가했다. 지금 내가 페이스북 친구가 약 3,000명 정도가 있고 하루에 3개-4개 정도의 포스팅을 올린다. 브런치에는 글을 올리고 싶은 영감이 오면 올리니, 대략 한 달에 2개의 글 정도를 쓰는 것 같다. 이를 보고 내 주변 사람들은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자제하고 본업에 충실하라는 식으로 말한 적 있다.
‘본업’은 대체 무엇인가?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의아했다. 본업의 개념은 무엇인가? 자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을 쓰고 표현하고 영향을 미치고 싶은 신념이 있는데 왜 이것을 가로막아야 하나?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사업을 하고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본업은 세상을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소프트웨어나 서비스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강한 신념이 있다면 그것을 표현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일 수 있고, 자신이 조금 아는 지식을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지식이 얕더라도 과감하게 공유하여 그 얕은 지식이라도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 낫다고 본다.
사업을 시작할 때 늘 의아했던 점이 있었다. 일본의 3대 경영의 신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이나모리 가즈오, 혼다 소이치로의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데 왜 한국에는 유명한 경영자의 책이 많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책을 40권을 넘게 썼고, 이나모리 가즈오는 자체적으로 경영수업을 하는 모임까지 했다. 이나모리 가즈오의 제자 중 한 명이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이다. 왜 우리는 그런 게 없었을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우리는 무채색을 너무 좋아한다. 색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것을 의심하고 시기하며 질투한다. 만약 이건희 회장이 경영과 삶의 철학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했는데, 갑자기 삼성 실적이 나빠진다면 사람들은 이건희 회장이 너무 대외활동에 집착했기 때문에 삼성 실적이 떨어졌다고 분석했을 것이다. 결국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노하우는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에게만 밥상머리 교육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매우 슬픈 일이다.
‘본업’과 ‘실무’는 다르다. ‘업(業)’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업(業)이라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고 병들고 죽는 불변의 진리의 과정이 왜 반복되는지 등에 대한 이유를 찾는 매우 심오하고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강연을 다니고 책을 쓰는 사람들이 실무에는 그 표현 능력에 비해 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식의 표현과 공유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비롯된 평가일 뿐이다. 지식의 공유는 그 지식을 가장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약한 지식이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맞게 가공해서 그것을 가장 이해하기 적합한 형태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언제든 지식을 공유할 수 있고, 우리 모두 그들의 수혜를 받아왔다.
히딩크 감독이 젊은 시절 축구실력은 리오넬 메시처럼 잘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감독을 하며 세상에 많은 감동과 행복을 줬다. 이 세상에 실무에서 구루급 전문가들만이 입을 놀리고 글을 쓰고 감독 역할을 하며 살 수 있었다면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80%는 증발할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의 서점에는 ‘하버드대에서 난리 난 강의!’, ‘옥스포드대에서 극찬을 받은 마케팅 강의!’와 같은 카피 문구가 크게 쓰인 책들이 널려있다. 이렇게 되면, 큰 깨달음을 얻은 한 지방대 교수가 지식을 공유하는 책을 쓸지라도 그것이 크게 퍼지지 않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학벌주의나 껍데기에 집착하는 우리나라 문화에 크게 분노하게 되고, 그 분노의 화살은 갑자기 하버드나 옥스포드대 껍데기가 붙여진 책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이조차도 오류인 것이다. ‘하버드에서 난리 난 강의!’라고 쓰인 책이 정말 별로였을까? 그 책도 매우 뛰어난 신념을 담고 있을 수 있다. 그게 하버드 교수가 써서 잘 된 건지 아닌지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이분법적인 사고를 갖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무채색 권하는 사회
정답은 간단하다. 실무가 당신이 그렇게 뛰어나다면 당신이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며 지식을 공유하고 더 정당한 세상을 만들면 된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시간이 없어서? 본업에 충실하기도 바빠서? 아니다. 강연이나 책을 통해 표현하고 전달하는 능력은 해당 실무의 능력과 무관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기조 때문에 새롭게 등장하는 창업가들이 그 지식을 자신의 머릿속에 꽁꽁 숨겨두고, 대표들 모임에서나 술안주로 말할 것 같아 슬프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쿠팡’이 아니고 ‘배달의 민족’이 아니라면 우리 모두 입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을 여는 순간 우리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것이다. 나는 이런 엄격한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한국의 교육문제를 지적하고 YES맨이 되어가는 우리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우리 내부에서 이렇게 바뀌지 못하고 ‘조용히 동굴에서 할 일이나 열심히 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면 대체 우리는 지식의 공유와 확장의 과정을 언제 겪게 될 것인가?
내가 이 브런치 글을 쓰기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다. 나는 보통 글을 30분~1시간 정도 쓴다. 페이스북 포스팅은 글당 3분도 안 걸린다. 그러면 내가 매일매일 브런치와 페이스북을 한다고 해도 소비하는 시간이 최대 1시간 30분 정도다. 이 시간이 나에게 낭비일까?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것일까? 진정성이 없는 것일까?
내 1시간 30분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정말 영향을 받아서 세상에 더 많은 정보를 기여하고 그 신념을 표현해 나갈 수도 있다. 그게 내 업이다. 세상을 그런 곳으로 만들겠다는 나의 업보다. 나는 지식을 공유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욕을 먹고 진정성에 대해 의심받을 지라도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 증후군’에 빠져서 무채색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짙은 색깔과 신념을 갖자
우리 모두 PNG 의 Transparent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RGB 값을 분명하게 갖고 있는 삶을 살자. 입 기획자, 입 개발자들이 사실은 자기도 잘 모르면서 퍼뜨리는 지식을 누군가는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별 것도 아닌 한 문장이 누군가에게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법. 누군가 투자하는 시간 중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잘 못하면서 입만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라는 글을 몇 달 전에 썼는데 일독을 권한다. 신념이 있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외부 시선 때문에 입을 닫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이제까지의 세상은 무채색의 사람들이 아니라 색이 진한 사람들이 이끌어왔다. 우리는 짙은 색깔과 신념을 잃지 않아야 한다.
원문: 홍용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