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을 보다 보면, 좀비 멘토나 창업 놀음에 관련된 글만 나오면 제목만 보고 단숨에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글을 통해 그것이 왜 문제이며, 인류의 발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할 계획이다.
물론 이 글은 인기가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SNS가 갖고 있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내용인데, 내 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 글에 동의합니다’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공유한다. 그러나 좀비 멘토, 창업 놀음에 관련된 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로 글을 공유한다.
- “이 글에 동의합니다.” 사실 이런 경우의 경우 공유 수 100을 넘기도 힘들다.
- “이런 사람들이 정말 많으니 조심하세요. 하지만 나는 아닙니다. 공유함으로써 내 진정성을 검증합니다.”
둘째와 같은 이유가 소셜 네트워크에서 아주 강한 파급효과를 갖게 되고, 페이스북에는 이와 관련된 글들이 범람해 보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느끼게 된다. 공유하는 사람들의 패턴도 매우 정형화되어있다. 물론 댓글 또한 정형화되어있다.
[공유] 스타트업도 결국 이런 사람들이.. 조심해요!
댓글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정말 사짜들이 넘치는 세상이에요. 본질에만 충실합시다.
[공유] 아니! 이런 게 있었나? 동굴 속에서 밤새 개발만 하느라 몰랐는데 ㅎㅎ
댓글 : ㅇ 대표 몸 좀 살피면서 하라구!
[공유] 정말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혹시 나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댓글 : 아닙니다! 당신은 진짜예요! 본질에 아주 가까운 사람이랍니다!
특히 스타트업에서 본질이라는 말을 매우 남발하는데,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은 본질이라 불리는 진리에 근접한 개념들이 해체되고 있는 세상이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양자역학을 만났다. 사물이 부딪치면 충돌한다는 개념은 양자물리학으로 보면 어떤 사물도 실제로 만나지 않는다.
세상의 진리는 해체되고, 우리가 진리 또는 본질이라 여겼던 것이 무너지면서 인생과 아집의 덧없음이 느껴지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아직도 우리는 고전적인 선악구도,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틀린 것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듯하다.
진리의 해체 : 정답이 없는 데 정답을 가르치고, 정답과 어긋나면 회초리를 맞는 세상
우리나라는 특히 공식과 절대적인 진리를 좋아한다. 누군가 강의를 한다고 하면 지식과 정보를 받아 적는 데 집중한다. ‘스타트업 실패 공식 100!’ 이런 것들이 아주 큰 인기를 끈다.
성공한 스타트업은 이유가 다양하지만, 실패한 스타트업은 이유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 스타트업 대표는 대외적으로 나대면 안 되고 본질에만 집중해야 되고, 고객을 만나면 고객은 정답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꼼꼼히 받아 적고 그대로 만들어줘서 돈을 받아내야만 한다. 그 돈을 받으면 ARPU를 측정해서 CLV를 어쩌고 저쩌고…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명제적인 오류가 있다. 성공한 스타트업이 이유가 없다고 정의한 순간, 성공한 스타트업이 실패하는 스타트업의 99%의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게 된다. 성공한 스타트업의 패턴이 있고, 실패한 스타트업의 패턴이 있어야만 그것을 진리로 가공해서 절대적인 교육요소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실패한 스타트업의 요소는 단순히 레퍼런스로서 학습할 필요는 있지만, 성공한 스타트업의 요소들과 100% 충돌하지 않는 이상 그것 또한 진리가 아니다. 결국 정답이라는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보면 자신이 세워놓은 이 진리에 어긋나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하대하고 회초리를 때리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글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내가 가짜가 아님을 계속해서 증명해야 한다.’
이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누구에게, 어디에 증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의 진정성과 나의 부족함은 온전히 내 안의 피상적인 경험 속에서 피어나고 발전하는 일련의 과정인데, 대체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그 삶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부모님이 퇴근하면 내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유아기적인 욕구가 살아나는 건가?
사람들이 말하는 ‘본질’은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동굴 속에서 고객과 서비스 개발하는 것이라고 정의되는 것 같다. 넥슨의 김정주와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창업주 등이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기업가라 볼 수 있겠다. 나는 창업 3년을 하면서 그들로부터 뭔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책도 안 쓰고 강연도 안 나온다. 이 얼마나 본질에만 충실한 기업가들인가?
‘좀비 멘토’라는 허상
좀비 멘토도 이와 비슷하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에 활동한 기업가들 사이에 무언가 파벌과 자격지심이 존재하는 듯했다. 좀비 멘토는 창업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라기보다는 멘토들끼리 만들어놓은 개념 같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 평소 왕래하던 분인데, 사람들이 그분을 두고 좀비 멘토라고 부르는 경우도 들어봤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멘토라는 것은 어차피 자신만의 경험을 잣대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존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차이는 찾아간 사람의 책임이다. 그 가르침이 옳지 않다고 해서 ‘좀비’라고 부르면, 진리에 근접한 성인군자만이 멘토를 할 수 있나?
가끔 경험 있으신 분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분들이 자꾸 ‘나는 좀비 멘토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것도 피로가 쌓인다. 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검증받아야 하는 존재인가? 경험의 다양성, 성격의 다양성을 우리가 강제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어 선택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데 왜 내 눈에 아니꼬우면 미워하고 시기하고 비판하는 걸까?
물론, 내가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믿고 따르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말 정말 안 듣는 성격’이라고 한다. 인정한다. 실제로 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않고 흥미가 없으면 표정관리도 안 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내 머릿속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매우 강한 영향을 미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모든 선택의 주체에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든 아무 상관 없다. 지금의 잣대가 1년 뒤의 잣대와 동일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작년에 사람들이 내게 해줬던 많은 조언이 올해의 사업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같은 성격의 조언들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말들을 했다.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잘 들어뒀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생각도 없고 듣기 싫은 말은 안들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 기본선택은 ‘안 듣는다’ 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익을 지금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때 도와줬던 분들께는 지금 와서야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있다.
짧은 인생 살면서도 이렇게 삶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데, 좀비 멘토 욕하는 분들은 얼마나 진리와 정답에 근접한가? 그들의 진정성이 그저 ‘돈’과 ‘탐욕’에만 있다고 장담할 수 있나?
인류가 전쟁을 멈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핵이나 전쟁에 대한 공포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류가 전쟁을 멈춘 이유는 절대적인 진리의 해체 과정을 겪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선악구도 명제를 통한 폭력성의 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공산당은 빨갱이고 제거해야 한다’라는 단순한 명제에 도달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데올로기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중학생들도 안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경계, 인종의 경계, 언어의 경계 모든 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와 다른 남을 배척하는 세상이 종말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심리적 근간에는 이런 선악구도를 만들고 끊임없이 투쟁하고자 하는 공격성이 담겨있다. 이 공격성은 SNS를 통해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다. 남을 까내리며 자신을 검증하고자 한다.
좀비 멘토에 대한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이 좀비 멘토가 아니라는 것’, ‘자신은 뛰어난 멘토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진리에 통달한 성인군자임을 계속해서 검증받는 것.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본질’에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좀비 멘토’, ‘창업 놀이’, ‘사업 놀이’ 모두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을 검증하고 올라서고 싶은 욕구 또는 남을 깎아내리고 가르침을 통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시대를 끌어가고 싶어 하는 본능이 담겨있는 프로파간다라고 보인다. 단어 자체가 그러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 이런 나쁜 말은 쓰지 말아야겠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이런 말들을 쓰는 것이 시대정신이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부정적이고 선악구도의 자극적인 이야기를 쓰고 공유하는 것은 결코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다. SNS에서 그러한 콘텐츠는 충분한 인기를 얻고 강하게 소비된다. 부정적인 이야기가 잘 먹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미 이런 것을 필터링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왔다. 이렇게 우리가 배양해온 지성의 힘을 본능보다 우위에 두고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다.
인류는 이미 단순한 선악구도를 만들어 자신이 선임을 끝없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원시적 욕구를 넘어설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있다. 인간사회에 정답이 없듯, 사업에도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정답과 진리를 100%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본인이 창업을 해서 큰돈을 벌어서 우리나라나 부자로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너 스스로를 인디언, 무슬림, 기독교인, 유럽인 등이라 무르는 순간 너는 폭력성을 갖게 된다. 이미, 너 스스로를 인류 그 자체와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너 스스로를 믿음 또는 국가, 전통에 의해 인류와 분리하기 시작할 때 폭력성은 고개를 든다. 폭력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 너는 어떤 국가에도, 종교에도,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도 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직 인류 그 자체만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할 때, 폭력은 완전히 이해되고 사라질 수 있다.
ㅡ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원문 : 홍용남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