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발생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능적 반응과 사회적, 구조적, 문화적 원인 등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제대로 된 사회 교육과 문화 운동, 분쟁의 해결 등을 통해 부당한 혐오와 그 원인을 꾸준히 해체해 가야 합니다. 그게 인류의 성숙화입니다.
또한 침략과 침해, 분쟁과 다툼 때문에 생긴 개인과 집단의 갈등과 분노는 일반적인 혐오 문제와는 또 다르게 접근하고 해결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별도로, 많은 경우의 부당한 타인 혐오는 ‘자기 미움’, ‘자기혐오’의 심리가 억압, 왜곡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외부의 대상들을 향하는 투사이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해 건강한 의식을 가진 이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타인 혐오를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자기 미움에 대한 통찰은 타인 혐오에 대한 필요 해결책 중 하나입니다.
‘혐오’가 시대의 화두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 혐오 기제와 혐오 현상이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과거, 현재, 미래에 그 양태와 정도가 달라질 뿐이지 계속 이어지는 현상이다. 다행한 것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개인과 집단의 노력에 의해 부당한 혐오 기제가 점점 해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속도는 느리며 때론 퇴행도 한다. 또한 동시대에 있을지라도 지역과 사회에 따라 여전히 심각한 혐오와 차별이 존재하는 곳이 많이 있다. 한국 사회도 그중 하나이다.
‘혐오’와 ‘차별’은 엄밀히 말하면 다른 현상이지만 거의 같이 움직이게 된다. 즉 혐오가 있는 곳엔 차별에 있게 되고, 차별은 혐오에 기반을 둬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몸의 두 개의 얼굴이라 할 수도 있다.
인간의 혐오 심리 원인으로는 여러 요소가 있을 수 있다. 본능적,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 등이다. 가장 기반이 되는 것은 당연히 본능적 요소이다. 바로 ‘나와 다르고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 방어와 공격 기제’이다. 그런데 이것의 근간은 선악으로 판단되는 무엇이 아니라 가치 중립적인 생명체 반응인 자기보호본능, 자기유지본능이다.
‘나와 다른 것’을 향하는 혐오
인간만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원세포 생명체들부터 당장 이러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것, 뭔가 낯선 것, 뭔가 해로울 것 같은 대상이나 환경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물론 반대로 자신에게 필요하고 이미 잘 사용하고 적응하고 있는 것이라면 스스로 접근하고 섭취하려고도 한다. 방향만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 다를 뿐 생명체가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가지는 기본적인 ‘거부, 허락’의 쌍생성, 쌍소멸 현상인 것이다.
이것을 가장 드라이하게 표현한 것은 ‘밀침과 당김’이 될 수 있다. 아니다 싶은 것은 밀쳐내고, 맞다 싶은 것은 자기에게로 당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물러남과 다가감’이다. 실험판 위에서 자기에게 좋은 물질이나 해로운 물질을 마주한 원세포 생명체인 아메바를 떠올려보면 된다. 그리고 아메바 이상의 아무리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라도 결국 그 기본 반응은 동일하다. 인간의 경우엔 이 반응이 단순한 물리, 생리적 현상만이 아니라 추상적인 심리적,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볼 수 있다.
처음은 중립적이고 드라이한 ‘밀침과 당김’이지만 이제 의식 현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이것에 심리적 방향성이 더해져서 ‘싫고 좋음’이 된다. 그리고 이것의 감정적 밀도가 높아지면서 ‘혐오와 집착’이 된다. 점점 그 양상이 강해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은 사실은 이 본능적 요소들의 확장판, 왜곡판, 착오판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모두 나름의 타당한 근거와 이유를 갖다 대지만 기질 애초 본능적 ‘밀침과 당김’ 기능의 오해일 뿐인 것이다.
애초 ‘밀침과 당김’은 당연히 아무런 잘못이 없다. 생명체의 자기보호 반응인데 무엇 잘잘못이 있을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 과도하게 될 때, 오류가 있을 때, 심한 편향성이 있을 때, 환상이 끼어들 때, 불필요할 때이다. 즉 본래의 자연스러운 밀침과 당김 현상을 넘어 불필요하고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싫음과 좋음’, ‘혐오와 집착’이 될 때이다. 그런 확장 적용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나와 네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부분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본능적 거부, 공격의 반응은 자신과 다른 것, 낯선 것을 경계함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인데 주로 편도체 등의 뇌의 변연계 수준에서 일어날 것이다. 다분히 동물적 반응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 동물들과 달리 대뇌피질을 많이 발전시켰다. 특히 인간적 특성인 이성 기능의 본부인 대뇌 전전두엽 영역이 핵심이다.
‘모든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이다’라는 말이 있다. 뇌과학 실험과 연관해서 나온 말이다.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인종의 자신을 보여 주었을 때, 인종차별주의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가 뇌에서 공통적으로 자연스러운 거부와 경계, 혐오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핵심은 그 후이다. 그 ‘다른 것’에 대한 뇌의 첫 자동 반응 후에 이제 그 사람의 전전두엽에서 그것을 이성적으로 잘 처리해서 더 커지지 않게 하고 진정시키는 것이 반인종차별주의자들이 하는 것이란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그냥 자신의 그 본래의 반응, 첫 느낌에 대해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그대로 연결 및 확장시켜서 실제 인종 차별과 혐오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반전이 있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인종의 아이들과 함께 성장한 경우엔 위와 같은 실험에서 그 본능적인 거부, 혐오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뇌가 ‘괜찮다’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것, 낯선 것에 대한 우리 뇌의 본능적 거부 반응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같이 성장한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성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사회적 교육이나 문화 운동을 통해 그러한 반응을 조절하고 지배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를 위해서.
그래서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인종 차별만이 아니겠다. 남녀 차별, 성소수자 차별, 경제적 계층 차별, 사회적 계층 차별, 지역 차별, 나이 차별, 외모 차별, 종교 차별, 신념 차별, 서로 다른 생각에의 차별 등 모두가 해당된다.
지난 역사를 보면, 시대와 장소마다 그 시대 장소의 ‘혐오와 차별’의 과제가 있었고 그것이 하나하나 정복되고 해체되어 온 과정임을 알 수 있다. 한 시대에 넘어서기가 불가능할 것 같던 혐오도 노력으로 다음 시대에는 해체되곤 했다. 점점 그 범위가 확장되고 세밀해져 가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 변화는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어찌 보면 개인적, 집단적 전전두엽 기능의 성숙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류의 성숙화인 것이다.
참고 이야기 하나. 혐오 기제의 본능적 요소와 관련하여 어떤 자료에서는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의 구분과 연관된 재밌는 이야기도 있다. 진화심리학 쪽 이야기이다.
이 관점에서는 소위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은 외부의 오염물에 대한 거부 반응, 경계 반응이 좀 더 심하다고 한다. 즉 자신이 그 오염물들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해를 입는 것에 좀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이 인간의 생각, 분별, 언어, 개념화 기능과 합쳐지면서 좀 더 추상화되고 확장되고, 이제 그런 불결하고 더러운 오염물들만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 낯선 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것도 단지 하나의 관점이자 설명에 불과하므로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꽤 흥미로운 해석임은 분명하다.
‘나’를 향하는 혐오
그런데 이러한 본능적 요소와 그에 기반한 개인, 집단, 사회, 문화적 혐오의 요소 외에 주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자기 미움’ 혹은 ‘자기혐오’의 심리의 투사 기제이다. 이 접근법에서는, 개인과 집단의 ‘자기혐오’가 내적으로 건강하게 처리되고 치유되지 못하고 억압, 왜곡, 변형, 악마화 되면서 이것이 외부 대상으로 투사된 것이 ‘타인 혐오’가 된다. 개인과 집단의 의식 모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앞서 설명한 것은 우리에게 있는 외부 대상에 대한 ‘다른 것,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 경계심’이 원인이었다면, 이 관점에서는 이제 그 원인과 별도로 우리 자신의 내적 요인을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두 요소 모두 각각 고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인간은 모두 자기보호본능, 자기유지본능 등의 자기를 위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만족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구나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뿐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럽거나 부족감을 느낀다. 이것이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대책 없이 자족하고 만족하며 더는 바랄 것 없다고 한다면 자신과 삶의 변화를 위해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부족감, 불만족감, 불만감 등은 나름의 효능이 있다.
문제는 그 ‘정도’이다. 즉 자기 미움이나 자기혐오를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긍정적 변화, 발전, 유지 등에 유용하게만 한다면 괜찮지만 그 어떤 의도로 하든 자기 미움과 자기혐오는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된다. 심신의 힘을 빼앗기고 심리적으로 자꾸만 부정적 측면이 쌓이게 된다. 심지어 실제 그것 때문에 노력도 많이 하고 성취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불만족, 부족감 등은 적당히만 쓸 일이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우리 인간에게는 ‘정신적 관성’이란 것이 있어서 본인이 어떤 심리나 감정 등을 계속 가지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에 관성이 붙어서(혹은 그러한 뇌신경망이 형성되어서) 자동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사실’로 느끼고 여기게 된다. 즉 나의 발전, 나의 변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과 도구로 사용한 ‘자기 불만족’이 어느 순간부터 ‘사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말이다. 무엇을 잘하든 못 하든 그렇게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충분해질 때도 있다. 그리고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계속 그렇게 잘 살면서 이제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들도 함께 챙겨주고 보살피고, 전체가 좀 더 나아지게 되는 방향으로 살면 된다. 문제는 그렇지 못할 때이다. 스스로에 해단 자기 불만족이 스스로를 잠식하게 될 때이다. 불필요하게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자기 미움, 자기혐오의 기제를 선명히 눈치채고 그것을 해체하고, 넘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위해서 좋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브런치의 ‘자기 미움’ 매거진에서 구체적으로 써 왔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자기혐오’의 심리가 내부적으로 정리되지 못할 때, 그것을 스스로 부정하게 되면서 외부로 투사해서 결국 불필요하게 타인을 혐오하게 되는 ‘타인 혐오’의 현상에 대해서 좀 더 정밀해 살펴보는 게 목적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만든 자기 미움, 자기혐오 심리의 정체와 구조를 잘 눈치채고 그리고 내부적으로 그것을 건강하게 정리하고 극복해서 더 이상 불필요한 자기 미움 기제를 가지게 되지 않는다고 해 보자. 그 사람이 과연 타인들을 불필요하게, 부당하게 혐오할까? 답은 당연히 ‘아니다’이다.
물론 앞서 말한 본능적 요소, 사회적, 문화적 요소 등에 의해서도 타인 혐오는 일어난다. 그러나 같은 문화 속에 있더라도 모두가 똑같이 불합리한 혐오를 일으키진 않는다. 즉 개인적인 차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도 어떤 이들이 혐오하는 것을 어떤 이들은 혐오하지 않는다. 같은 문화권에 산다 하더라도 어떤 이는 혐오하는 것을 어떤 이는 혐오하지 않는다. 혹은 다소 거부감을 가지더라도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런 개인적인 차이는 어떻게 해서 생기는 걸까?
여기에서 바로 ‘타인 혐오는 자기혐오의 투사이다’라는 말이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이 처한 시대적, 지역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처지에 속할 수 있다. 그러한 환경적 요소는 개인의 가치관, 신념,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적, 거시적 차이와 별개로 특정 시대, 지역, 환경 안에서 왜 개인들은 타인에 대한 혐오 성향에서 차이를 보일까?
그 원인이 어떻든 우리 각 개인은 ‘자기혐오’의 심리를 가진다. 그리고 이것을 건강하게 처리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처리되지 못한 자기혐오는 자신의 여러 요소, 능력, 처지, 상황 등에 대한 부정의 감정을 만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면 이제 그것을 외부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못나고, 부족하고, 불만족스럽고, 틀렸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말이다.
사실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나의, 내 내부의 부정적인 것들은 실제는 그런 게 아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여기고 믿고 있을 뿐이다. 설사 수정이 필요하고 고치는 게 필요하다면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그 ‘존재함’ 자체를 문제 삼고, 허락 및 허용하지 못하고, 없는 듯 여기고, 억제하고 억압하고, 분리 및 회피하는 건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스스로도 힘들어질 뿐이고 외부로도 투사된다. 건강하고 능동적으로 ‘기꺼이 품어주면서 넘어서 버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본질은, 그것들이 결코 ‘부정적인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 처리하거나 혹은 잘 품어 주면 되는 것들일 뿐이다.
본래 자기 미움은, 잘난 나와 못난 나를 설정해서 잘난 나가 못난 나를 공격하고 부정함으로써, 즉 자기를 희생양 삼음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는 아주 묘한(그러나 실패한) 자기 구원의 기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타인 혐오’로 투사되면 타인을 공격하고 부정함으로써, 즉 타인을 희생양 삼음으로써 자기를 구원하는 구도가 되는 것이다. 대상만 다르지 같은 전략이다.
이 두 가지 구도가 모두 사용된다. 우리들 인간은 그렇게 교묘한(하지만 멍청한) 구석도 있는 족속인 것이다. 하지만 모두 실패한 전략이고 스스로에게 속는 것일 뿐이다. 어느 경우든 바라는 구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구원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추락’ 같은 게 없으므로 구원도 없다는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상상해서 그것을 이루려 하니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심리적 차원에서의 말이다.
또한 타인 혐오는 사실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유지를 위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타인이 뭔가 잘못 되어야, 내가 뭔가 그들보다 나아야 내 존재성, 내 가치가 유지되는 게 아니기에. 내 존재의 의의와 타인들의 상태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이러한 투사성 타인 혐오는, 그러므로 두 가지로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애초의 자기 미움, 자기혐오 문제를 해결해서이다. 내가 가지는 타인 혐오가 실제 그 대상의 문제와 부족함, 틀림, 불만족스러움과는 상관 없이(상대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 쪽에 근본 원인이 있음을 선명하게 알아채는 것이다. 이 알아챔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투사성 타인 혐오, 부당하고 부적절한 타인 혐오는 점점 힘을 잃는다. 대신 객관적이고 건강한 분석고 이해 그리고 반응이 일어난다. 이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다.
물론 타인과 세상에게 항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혐오가 아니라 정당한 분노의 마음도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모두를 위해 잘못되어가는 상황을 바로 능동적으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의사를 표현하고 주장하고 또 행동도 취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타당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적 두려움의 착오 때문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이나 오류 때문에 그리고 자기혐오의 투사 때문에 생기는 부당한 타인 혐오들은 알아채고 해체시키고 넘어서야 한다.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해서.
그렇지 못하면 자신은 뭔가 정당하게 타인들을 혐오한다고 느끼겠지만 실제는 자기와 타인 모두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장은 그걸 느끼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힘들게 되고 고통스러워짐을 알게 된다. 설사 자신은 무감각해짐으로 느끼지 못하더라도 타인들은 힘들게 됨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불합리한 타인 혐오를 하는 이들 중에 스스로를 전혀 미워하거나 혐오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실제 그의 내면 심리와 사고방식,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인식하는 관점을 보면 여러 가지 문제와 한계 그리고 제한이 보인다. 특히 스스로에 대해서 그렇다. 다만 그러한 자기 부정성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그 인정을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에) 외부로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추가로, 조금은 다른 관점이지만 한 집단 내에서의 타인 혐오 현상은 사실 그 집단의식을 하나의 의식으로 봤을 때 그 집단의식의 자기혐오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개인이 자신이 자신을 미워하는 기제가 이제 집단의식 한 덩어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자기 미움, 자기혐오가 잘못된 기제이고 전략이듯이 집단 내에서의 상호 혐오 혹은 타인 혐오도 마찬가지다. 해당 집단 혹은 공동체,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기만 할 뿐이고 혼란만 더할 뿐이다. 개인의 의식이 스스로와 화해하고 스스로를 수용하듯이 집단의식에서도 동일한 해결로 나가야 한다.
참고 이야기 둘. 때로 표면적으로 보면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나 혐오 등의 심리 없이 잘 사는 듯하면서 타인들을 부당하게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이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지만 실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상이나 자아감은 그리 건강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다만 겉으로 표현이 안 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타인 없는 자기는 병증의 자기’임을 알아야 한다. 즉 타인에 대한 고려나 배려가 없는 자기는 건강한 자기가 아니라 병증으로서의 자기인 것이다.
마무리하며
우리, 자신을 실제가 아닌 조건화된 타인 혐오에 매몰되지 않게 하자. 다른 것,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 거부와 경계와 공격성이, 필요할 때는 그것을 사용하지만 필요치 않을 때는 그러한 본능적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고 해서 내버려두지 말고, 그것의 정체가 무엇임을 알자. 일어난다고 해서 그대로 반응하지는 말자.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사실이라고 여기지 말자. 일어난다고 해서 무조건 중요하다고 여기지 말자. 필요에 따라, 적절성에 따라, 유용성과 효용성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응하자. 나의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만약 실제로 그게 아니라면 과감하고 용기 있게 끊어 버리자. 멈추어 버리자. 그냥 품어 준 다음에 그냥 넘어서 버리자. 우리에겐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 모두의 능력인 ‘생각의 힘, 통찰의 힘’을 사용하자.
그리고 ‘자기혐오’ 문제를 해결하자. 이것은 우선 자기를 위해서 좋다. 그래서 외부로의 불필요한 투사를 일으키지 않게 하자. 또한 자기혐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해서 외부 대상을 향한 타인 혐오가 되는지를 알아채자. 이것은 나만 해야 하는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가 서로에게 좀 더 우호적이 되고 불필요한 혐오, 경계, 공격, 충돌, 미움, 무시 등이 줄어들 것이다. 집단과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우리에겐 그럴 수 있는 힘이 있다.
원문: 필로 이경희의 Brunch
책 <자기 미움>의 출간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책 ‘자기 미움’이 출간되었습니다. 좋은 출판사 ‘북스톤’에서 정성 들여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브런치에서 ‘자기 미움’을 주제로 연재해온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 책의 부제처럼 이 책이 많은 분에게 ‘가장 가깝기에 가장 버거운, 나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책의 내용 중엔 우리 자신의 ‘자기 미움’ 심리와 더불어, ‘정체성 문제, 감정 다루기, 상처 넘어서기, 타인과의 관계’ 영역에서 실제 도움이 되는 이해와 구체적인 실천법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