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대표의 기본소득 언급 이후 기본소득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나는 기본소득정책 자체에 대해서 좋고 나쁨을 논할 만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고, 따라서 성급하게 호오를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2016년 7월 15일 진보진영의 기본소득논의를 비판하는 정의당의 조성주가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은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 동의여부를 떠나 한 번쯤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기본적인 주장은 한국 진보정치의 기본소득논의가 “서로가 더 진보적이라고 경쟁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진보진영 내부가 언제부턴가 기본소득에 집착하기 시작한 이유도 결국은 선명성 경쟁이나 이슈선점의 의도가 더 강하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야할 대상이며,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을 포함해 “사회안전망의 획기적인 강화, 노동시장내의 불평등의 완화, 부족하기 그지없는 복지체제의 확충, 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등에 더욱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장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보이지만, 이 글이 내 눈길을 끄는 건 무엇보다도 그 수사와 논리구조가 오늘날 한국 진보정치의 언어에 새로이 출현하고 있는 경향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성주가 보여주는 진보 언어의 새로운 경향
먼저 조성주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관을 역설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부분, “나는 진보정당의 정책이나 비젼이 그런 정치적 강박에서 출발하기 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는 문장에서 시작해보자. 그는 자신의 최종적인 토대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선정한다.
1) 80년대: 노동자, 민중, 약자의 살아있는 현장 VS 관료, 전문가 집단의 정치적 고려
“살아있는 현장”이 정치적 인식론을 위한 특권적인 장소의 위치를 갖게 된 것은 80년대부터 흔히 있는 일이었는데, 그중 가장 흔한 패턴은 노동자·민중·약자로 대표되는 “살아있는 현장”과 (보통 협잡과 타락의 근원으로 그려지는) 정치적 혹은 (기계적이고 무감동한 관료·전문가 집단으로 표상되는) 실용적인 정책적 결정을 대립적으로 놓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9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쉽게 볼 수 있으며, 오늘날 평범한 진보정치 지지자들의 언행을 살펴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민중주의라기보다는 80년대 엘리트 대학생들의 감성을 묘사하는 구도이지만, 김홍중 선생이 제시한 “진정성 VS. 속물”이라는 (2000년대 후반부터 문학-진보들의 의식을 사로잡은) 구도는 사실 이것의 한 판형이다.
이러한 구도는 특히 민주-진보진영의 존재감이 커진 2000년대에 와서 우파들의 커다란 도전을 받는다. 전통적인 우파와 뉴라이트가 공유한 “포퓰리즘” 같은 키워드가 잘 함축하고 있듯, 진정성은 일종의 비합리적인 감상주의로, (민중의) “살아있는 현장”은 전체적인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 퇴행으로 이해되며, 여기에 대항하는 (“신자유주의”와 같은 키워드로 뒷받침된) 우파적 정책은 합리적 현실주의로 제시된다.
2) 2000년대: 살아있는 현장-진정성-감상주의-포퓰리즘 VS 합리-현실-실용
2008년의 광우병/FTA 반대 촛불집회가 우파들에게 어떻게 설명되었는지를 보면 이 도식이 정말 잘 드러나는데, 집회참가자들이 “괴담”에 의해 “선동” 당한 비합리적인 “군중” “떼” “좀비”라는 규정은 합리주의·현실주의(좋은 것) 대 비합리적 감상성(나쁜 것)이라는 논리를 전제하며 또 전파한다. 그리고 2008년을 기점으로 우파들이 제시한 구도는 본격적으로 좌파적 수사학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진정성에 기대는 정치는 “감성팔이”라는 혐오표현이 유행한다는 데서 볼 수 있듯 점차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있다.
(물론 80-90년대의 감성을 고수하는 지지자들이 남아있는 이상 이 수사학이 설득력을 얻는 집단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젊은 세대의 지지자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양가적인 뉘앙스로 사용되었던 “패션좌파”, “강남좌파”와 같은 표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변화과정이 지금의 거친 서술만큼 직선적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짚어둔다.)
그러한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여기서 조성주의 글이 흥미롭게도 “현실”과 “살아있는 사람들” “구체적인 삶”과 같은 수사적 언어를 정책적 실용주의와 연결하고, 한국 기본소득 운동론자들의 입장을 “정치적 강박”과 같은 공허한 구호와 등치시키는 걸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전통적인 순수주의·진정성(좋은 것) VS. 실용주의·정책적 고려(나쁜 것)이라는 수사적 배치가 실용주의·정책(좋은 것) VS. 유행·패션·구호(나쁜 것)라는 구도로 대체되는 것 자체는 앞서 설명했듯 1990-2000년대를 거치며 좌파 민중주의 수사학의 구도가 우파 수사학에 점차 침식되고 무력화되는 흐름에서 볼 때는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며, 전통적인 진보 수사학을 따르는 이들에게 조성주는 우파적 수사학의 구도를 차용하는, 그래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진짜로 중요한 것은 조성주의 글이 우파 대중정치의 수사학에서는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현실”, “삶”, “구체”, “사람들”과 같은 키워드를 감상주의에 기초한 미학적 층위가 아니라 실용주의·정책적 합리주의와 같은 영역에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3) 조성주의 수사학: 살아있는 현장-현실, 합리, 정책, 실용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바로 “투박하고 재미없게”와 같은 수식어다. 이 표현은 기존의 민중·진정성=감상주의/미학이라는 도식을 민중·진정성=(투박하고 재미없는)정책 고려·설계라는 도식으로 이행시킬 수 있는 교두보가 된다.
요컨대 조성주는 좌파의 ‘진정성/거짓’이라는 가치판단의 도식을 우파의 ‘현실주의·정책/감상·이미지·비합리’라는 도식과 융합함으로써 ‘진정성=현실주의·정책/감상·이미지·비합리=거짓’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식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기초해서 자신을 ‘현실주의/정책론자/진보’라는 새롭게 등장한 포지션에 배치한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수사학 및 위치선정의 첫 번째 강점은 바로 2010년대 한국에서 (특히 40대 이하의 세대에게) 매우 넓은 지분을 획득한 정치적 현실주의를 더 이상 우파 수사학의 전유물로 남겨두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이 조성주가 아직 본격적인 의회정치에 들어서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지자층이 좌파에서부터 합리적 보수주의자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우파적 합리주의·현실주의의 수사학이 (“민생”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노동자를 포함해 전통적인 “민중”에 대응하는 집단을 제대로 다루지 못함은 물론, 진정성을 감상주의로 몰아붙이다보니 정작 스스로의 부패를 막고 윤리적 정당성을 제시할 언어 자체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면, 조성주의 수사학은 우파가 포기한 윤리적 정당성을 자기의 것으로 끌어오면서 윤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요컨대 조성주의 언어·입장은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어진 좌우파의 언어투쟁에서 양쪽의 강점을 모두 끌어올 수 있다는 점에서 당분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우파의 젊은 세대에서는 여기에 비견될만한 입장·언어가 출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전혀 청년정치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새누리당 유승민의 최근 인터뷰는 한 번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이러한 수사학이 조성주의 정치적 성공을 그 자체로 보증하는 것은 아니며, 더불어 이 언어 또한 갑작스럽게 출현한 돌연변이도 아니다. 나는 조성주가, 적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87년 체제의 성립 이후 진보진영이 정당정치로 들어오면서부터 점차적으로 진행된 지난 30년 간의 역사적 변화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드디어 과거와의 연속성이 아니라 변화와 단절을 공개적으로 외치기 시작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분명 새로운 정치를 대표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진보세력이 과연 그를 수용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으며, 그가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의 비례 6번이라는 사실상 실효성 없는 순서를 부여받은 것은 진보세력 내에서 청년정치 및 “현실주의/정책론자 진보”라는 포지션이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밟아나가야 할 길이 결코 짧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인 조성주의 성패와 별개로, 그가 구축해나가는 언어 및 입장의 점유율은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