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와 함께 유명 블로거가 추천한 음식점에 갔다. 입구가 카페 카운터처럼 되어있었는데, 천장에 걸린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마쳐야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몰리는 식사시간에는 매장 밖으로 긴 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밖으로 늘어선 줄을 보고 맛있는 집인 줄 알 것이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매장은 썰렁했다. 주문하는 동안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도 없었다. 우리는 무얼 먹을지 정한 후 주문을 했다. 뭔가 잘못됐는지 직원이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원과 우리 사이에는 카운터 테이블이 가로막고 있었다. 매장의 음악 소리는 너무 컸다. 우리는 직원이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메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옆에 있던 메뉴판을 펼쳐 보았다.
그제야 주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뜨거운 맛과 차가운 맛 중 하나를 정해야 했고, 레귤러와 라지 사이즈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음료도 아니고 음식인데 이런 걸 골라야 한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종업원의 설명을 못 알아들은 친구가 다시 물어보았다. 종업원은 조금 짜증이 난 말투로 다시 설명했다. 역시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때쯤 무엇이 잘못된 건지 이해한 나는 친구에게 설명하고 메뉴를 다시 골랐다.
우리는 드디어 자리에 앉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접시를 들고 앞으로 가서 사이드로 먹을 튀김을 골라야 했다. 이것 역시 종업원이 설명해줬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고 손짓을 보고 나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다음엔 선불로 계산을 해야 했고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음식을 먹고 나온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1987년 영국 뉴캐슬. 조니는 깊은 절망감에 빠져있었다. 그의 희망과는 다르게 개인용 컴퓨터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면서 삶에 유용한 도구로 자리 잡아갔기 때문이다.
조니는 심각한 컴맹이었다. 당시 가장 대중적인 PC는 IBM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도스를 운영체제로 하고 있었다. PC는 조니의 전공분야인 산업디자인에서도 중요한 도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니는 난독증이 있었고,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는 DOS는 조니에게 마치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니의 좌절감은 갈수록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니는 이상한 컴퓨터를 만나게 된다. 컴퓨터 화면에는 복잡한 명령어 대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본체 옆에는 줄로 연결된 쥐를 닮은 버튼이 있었는데 버튼을 움직이면 화면에 있는 화살표도 따라 움직였다. 화살표를 그림에 대고 버튼을 누르자 프로그램이 실행됐다. 조니는 순간 강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 같은 컴맹도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그 컴퓨터의 본체에는 사과 모양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2007년 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맥월드 콘퍼런스(Macworld Conference)에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발표가 있었다. 발표자는 스티브 잡스였다. 그는 현재 출시되어있는 타사의 스마트폰들을 나열하여 보여줬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관객에게 질문했다. 그것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하단에 위치한 40%였다. 하나같이 제품 전체의 40%를 컴퓨터 키보드의 축소판인 복잡한 쿼티 자판이 차지하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타사의 스마트폰들을 신나게 혹평한 후 드디어 애플의 신제품을 보여줬다. 전면의 약 90%가 화면으로 되어있는 스마트폰이었다. 전화를 걸어야 할 때는 화면에 전화기 버튼이 떴고, 음악을 들어야 할 때는 뮤직 플레이어 버튼이 떴다. 그리고 메시지를 입력해야 할 때는 쿼티 자판이 떴다.
조잡한 수십 개의 플라스틱 버튼은 필요 없었다. 화면을 터치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가능했다. 아이폰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이 순간을 전설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전설을 디자인 한 사람은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 난독증 컴맹이었던 바로 그 조니였다.
잡스가 애플을 떠나 있을 동안 소프트웨어 시장은 MS의 윈도우가 주도하고 있었다. 윈도우의 휴지통, 드래그 앤 드롭, 드롭다운 메뉴, 마우스 등과 같은 주요 개념들은 모두 애플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지만 십여 년간 큰 변화가 없었다. 변화는커녕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버튼을 추가하는 바람에 MS에서 만든 소프트웨어의 메뉴는 마치 비행기 계기판처럼 복잡했다. 그럼에도 잡스가 없는 애플은 MS에 밀려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1997년 애플의 적자는 무려 10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때 잡스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별 영향력 없었던 디자인 팀을 회사 내 최고의 위치로 격상시켰다. 디자인팀의 리더는 조니였다. 잡스와 조니는 하루에 1회 이상 미팅을 가졌다. 항상 붙어 다니는 두 사람에게 자이브(Jive, 잡스와 아이브의 합성어)라는 별명도 생겼다. 잡스가 오기 전까지 애플은 제품에 디자인을 입혀왔었다. 자이브의 애플은 달랐다. 이제는 디자인이 제품이었다.
잡스의 디자인 철학은 직관성이다. 단순하고 명확해서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그의 이상향이다. 조니는 미니멀리스트다. 필요 없는 것은 극단적으로 제거하는 게 그의 디자인 철학이다. 잡스는 소프트웨어 디자인에 있어서는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이 주는 직관성을 선호했다. 스큐어모피즘은 실물을 묘사하는 디자인 때문에 단순함을 해칠 우려가 있었지만 조니의 미니멀리즘이 균형을 잡아줬다.
두 사람의 시너지는 1998년 아이맥을 탄생시켰다. 2001년에는 아이팟이 나왔고 2007년에는 아이폰이 출시됐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람들이 일상적인 컴퓨터 활용을 위해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계기판 같은 MS의 소프트웨어를 피했다.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신 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네티즌이 인터넷을 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모든 인류가 인터넷을 한다. 아이패드가 출시됐던 2010년 1분기. 애플은 32억5천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자이브의 소프트웨어들이 단순하다고 해서 MS의 것보다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기능이 많으면 버튼도 늘어나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자이브는 어떻게 단순함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비결은 간단했다. 자이브는 사용자가 어떤 목적으로 앱을 사용하게 될 것인지를 먼저 고민했다. 그 고민을 바탕으로 꼭 필요한 메뉴만 보이게 하고 나머지 메뉴는 특정 상황에만 노출되도록 숨겨두었다. 숨기기 힘들 정도로 기능이 많으면 기능에 따라 여러 개의 앱으로 분리했다. 모두 드러나 있을 땐 혼돈 상태였던 메뉴들이 적절한 곳에 숨겨지자 특별한 메뉴가 되었다. 일반인과 전문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디자인이었다.
이런 디자인이 소프트웨어에서만 가능할까?
한국의 스타벅스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항상 아메리카노다. 작년 한 해만 약 5,180만 잔이 팔렸다.
대다수가 이렇게 메뉴판에 있는 메뉴를 주문하겠지만 숨겨진 메뉴도 있다. 그중 하나가 트윅스 프라푸치노(Twix Frappuccino)다.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메뉴는 아니다. 트윅스 프라푸치노를 달라고 주문하면 스타벅스 직원도 알아듣지 못한다. 스타벅스는 원래 음료에 첨가되는 재료별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데 트윅스 맛이 나는 커스터마이징이 인기를 끌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주문법은 이렇다.
캐러멜 프라푸치노에 헤이즐넛 시럽 한 펌프랑 자바칩 다 넣어서 같이 갈아주시고요, 초코 드리즐이랑 캐러멜 드리즐을 컵 벽에 먼저 뿌려주시고 내용물 부은 다음 그 위에 휩 올려주세요. 그리고 통 자바 따로 더 올려주시고 그위에 다시 초코 드리즐이랑 캐러멜 드리즐 듬뿍 뿌려주세요.
미국에서 인기가 많은 ‘인 앤 아웃 버거(IN-N-OUT Burger)’도 메뉴판 메뉴는 손으로 꼽힐 정도로 적지만 숨겨진 수많은 옵션이 있다. 몇 가지 예로 들자면 ‘3 by 3’ 옵션은 패티가 3장 치즈가 3장 들어간다. ‘애니멀 스타일’ 옵션은 패티가 머스터드와 함께 구워진다. ‘플라잉 더치맨’ 옵션은 빵을 빼고 패티 2장에 치즈 2장이 녹여져서 나온다. 이 모든 것을 메뉴판에 표기했거나 일일이 손님에게 물어봤다면 스타벅스도 인 앤 아웃도 지금처럼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음식점의 실제 메뉴는 가능만 하다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메뉴판에 보이는 메뉴는 인기 있는 추천 메뉴들로 한정시키는 것이 좋다. 그리고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이상 한 번의 선택으로 주문이 완료되어야 한다.
대다수 사람은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골라야 하는 옵션이 많아서 주문 시간이 길어진다면 그것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선택의 고문이 된다. 숨길 때 더 특별해지는 선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맛있게 먹고 있는 옆 사람을 본 고객은 ‘저건 어떻게 주문하는 거지? 나도 다음에는 저것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숨겨진 선택은 게임에서도 통한다. 가장 훌륭한 게임 디자인은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되 마스터하기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좋은 예로 지금은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20년 넘도록 장수하는 게임 〈철권〉을 들 수 있다. 〈철권〉은 남코(Namco)가 만든 대전 액션 게임이다. 이 게임의 매력은 버튼을 아무렇게나 눌러도 캐릭터가 멋진 무술을 펼친다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버튼을 연타하는 것만으로도 중수 정도의 플레이어는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고수들의 세계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레버를 움직이고 버튼을 누르는 조합에 따라 수없이 많은 콤보기, 연계기, 필살기가 가능하다. 고수들은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도 고급 기술을 발휘해 손에 땀을 쥐는 역전극을 연출해낸다. 침팬지도 플레이가 가능할 정도로 쉬운 게임이지만 단순한 몇 개의 버튼 뒤에는 복잡하고 화려한 격투 기술들이 숨겨져 있다. 이것이 철권이 장수한 비결 중 하나인 것이다.
고객 접점(MOT, Moments of Truth)에서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는 음식점, UI, 게임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중요하다. 고객에게 너무나도 이롭고 멋진 서비스를 한 번에 많이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이해하지만, 고객 입장에서는 혼돈이며 선택의 고문일 뿐이다.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것들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숨기는 것이 좋다.
숨겨진 선택들은 혼돈이 아니라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서비스 혹은 제품은 단순해서 누구나 즐기기 쉬운 것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순한 매력을 만들어내는 숨겨진 선택의 법칙이다.
원문 : 여현준의 Bru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