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S모 방송사의 SNS 코너에서 단무지가 고구려 시대에 일본으로 전래된 것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적이 있다. 이 코너에 의하면 타쿠앙은 고구려 시대의 승려였던 택암이라는 자가 일본에 건너가 단무지를 전래했다는 것.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S모사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흔히 타쿠앙이라고 불리는 ‘타쿠안즈케(沢庵漬け)’는 일본 에도시대에 고안된 전통 반찬 중 하나이다. S모 방송사에서 소개한 에피소드처럼 전란에 먹을 게 없어서 고안된 음식도 아니다. 오히려 에도시대에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반찬으로 통했던 음식이다.
‘타쿠앙’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일본 전국시대 말기에서 에도시대 전기에 걸쳐 도쿠가와 막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일본 임제종(중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선종의 한 유파)의 승려였던 타쿠앙 소호(澤庵 宗彭)가 고안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참고로 타쿠앙 소호는 그의 이름보다는 에도 시대에 그가 사용했던 법호인 토우카이(東海)로 더 유명하며, 에도시대 초기를 다룬 일본의 사극에서도 주로 ‘토우카이’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히에이잔 엔랴쿠지의 주지이자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천태종 승려였던 료우겐(良源)이 스님들이 수행할 때 먹기 위한 음식으로 고안한 ‘죠우진보우(定心房)’가 그 기원이라는 설도 있으며, 타쿠앙 소호가 엔랴쿠지의 절간에서만 먹던 이 음식을 대중화시켰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현재 엔랴쿠지에 전해 내려오는 단무지는 타쿠앙과는 그 조리법 및 보존법에 큰 차이가 있다.
엔랴쿠지에서 상품으로도 판매하고 있는 죠우진보우는 먼저 말린 무를 짚과 흡사한 고본(미나릿과에 속하는 강한 향이 나는 여러해살이 풀)으로 감싼 후 소금에 절여 오랫동안 숙성을 시켜 만든다. 반대로 타쿠앙의 경우 무를 며칠간 말린 후 밀기울이나 미당(쌀로 얻는 당분)과 소금에 절여 몇 달씩 숙성을 시켜서 만든다.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는 고추를 함께 넣어 약간 매콤한 맛이 나도록 숙성을 시키기도 하고, 남부 지방에서는 다시마를 함께 넣어 숙성시키기도 하며, 토호쿠 지방에서는 감나무 껍질을 넣어 특이한 향을 가미하기도 한다.
타쿠앙은 에도시대 중기까지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반찬 중에 하나로 통하며 일반 서민들에게는 판매되지 않았다. 주로 에도에 상주하는 사무라이들과 하타모토(막부의 장군 및 장군가를 수호하는 호위무사들을 일컫는다)들의 밥상에서나 볼 수 있는 음식이었다. 이것이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이다.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을 거쳐 대중화된 것이다.
에도 시대를 거치며 여러 가지 요리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응용법 중 하나는 ‘신코마키(新香巻)’라고 불리는 초밥이다.
신코마키는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초밥 중의 하나이다. 샤리(스메시라고도 한다)에 타쿠앙을 넣어 김으로 말아낸 얇은 초밥이다. 참치를 넣은 텟카마키, 오이절임을 넣은 캇파마키와 함께 얇은 김말이 초밥 중에 하나로 유명하다.
여담이지만 S모사의 타쿠앙의 한반도 기원설에 대한 주장은 중도뉴스에서 소개한 ‘닥꽝(단무지)의 뿌리는 한국이었다?’라는 기사를 참고로 한 듯한데, 이 중도뉴스의 기사에는 심각한 역사적 왜곡 및 오류가 담겨있다.
첫 번째. 고구려 승려인 택암이 반찬도 없이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전국시대 병사들과 백성들의 모습이 안타까워 단무지를 고안하였으며, 이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을 보고 도쿠가와 장군이 승려의 이름을 따 ‘타쿠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해 보면 서기 668년에 멸망한 국가에서 온 스님이 서기 1467년에서 1615년 사이에 나타나는 고대 음식을 전래해 주고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뭐 이건 그냥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에 아무거나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니 가볍게 무시해도 될 성질의 왜곡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 이런 가벼운 성질의 왜곡 또한 그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지양해야 할 것이지만)
두 번째. 전국시대로 타임슬립을 한 그 승려가 단무지를 나누어주는 걸 보고 이를 그 승려의 이름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는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는 에도 막부 3대 장군이다. 이 사람은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의 아들인데, 그가 에도 막부의 3대 장군으로 취임한 것은 1623년의 일로 에도 막부에서 전국시대가 끝났다고 공표한 1615년으로부터 무려 8년이나 지난 태평성대의 시대의 일이다. 이에미츠의 시대는 이미 조선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상태이고 전국시대는 실질적으로 아버지 히데타다의 시대에 그 막을 내렸으며, 막부에 의한 무사어법도가 공표되어 새로운 세상이 된 이후이니까.
세 번째. 중도뉴스에서는 타쿠앙의 한반도 기원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고승대덕전>이라는 문헌을 등장시킨다. 고승들의 전기를 집성한 이른바 고승전(高僧傳)이라는 것은 중국 남북조시대를 대표하는 양나라의 승려 혜교(慧皎)가 저술한 고승전을 표준으로 하며, 후대에 중국, 한국, 일본, 타이, 베트남 등에서 이름 높은 승려들의 삶을 소개한 여러 종류의 책자를 의미한다. 혜교의 고승전이 가장 유명하나 후대에 같은 명칭의 문헌이 상당히 많이 편찬되었기 때문에 혜교의 버전은 양나라 시대에 편찬되었다 하여 양고승전(梁高僧傳)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간략하게 양전(梁傳)이라고도 한다.
문제는 일본에서는 현재 고승전이라고 불리는 문헌이 적게 잡아도 30여종이 넘게 존재하는데, 고승대덕전이라는 명칭의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중국 및 대만의 경우 고승대덕전이라는 명칭의 고문헌이 수 권 존재한다.
중도뉴스에서는 또한 ‘호기우라 노키오’라는 역사학자가 고승대덕전을 소개하면서 타쿠앙이 고구려의 승려였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일단 호기우라 노키오라는 역사학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네 번째. 음양오행을 중요시해 노란색으로 물들였다는 이야기. 뭐든 갖다 붙인다고 다 좋은 스토리가 되는 게 아니다. 일단, 전통적인 방식으로 타쿠앙을 만들면 색이 모두 노랗게 되지 않는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타쿠앙은 노란색보다는 갈색을 띠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는 밀기울이나 미당에 호기성 간균의 한가지인 고초균이 포함되어 있어 변색이 되는 것이다.
다만 타쿠앙의 경우 어떤 것은 노란색에 가깝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것은 갈색에 가깝게 되는 등 전통적인 제조방식을 따르면 그 색이 통일되지 않았다. 이것이 보기에 흉하다고 여긴 사람들은 색을 통일하기 위해 강황의 덩이뿌리를 말린 울금을 넣거나 치자나무의 열매를 우려낸 물을 넣어 색을 입히는 경우가 있었다. 이 작법은 에도 말기에 이르러 정착된 것이고, 타이쇼~쇼와 시대를 거치며 타쿠앙이 대량생산되면서부터 아예 황색 색소를 이용하는 케이스가 정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울금이나 치자열매액을 넣는다 해도 우리가 흔히 아는 노란색의 타쿠앙이 되지도 않는다)
참고로 고초균은 간균과의 일종으로, 공기나 흙에 있는 비병균성 균이다. 홀씨를 형성하여 저항력이 강하고, 글리코겐을 다수 함유하고 있어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산을 생산해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타쿠앙이 강한 산미를 내는 이유는 밀기울이나 미당에 포함되어 있는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산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전국시대에 일본에는 전란으로 인하여 백성들과 병사들이 먹을게 없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추후에 시간이 나면 진중식과 전국시대의 먹거리에 대한 글로 대신할까 한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 당시에도 먹을거리 아주 많았다. 대표적인 예시로 매실절임의 일종인 우메보시를 들 수 있겠다.
애국심 고취하는 것도 적당히 하자. 지나친 국수주의는 화를 부르기만 할 뿐이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니 말이다.
원문 : 성년월드 흑과장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