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엄마’
내가 처음 ‘엄마’가 되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엄마로 살기 위해서 내 삶을 포기하진 않을 것이라 결심했었고, 그게 오히려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이 틀렸다고 여기진 않지만, 내가 더 나이를 먹고 아이들이 많이 커버리고 나니 좀 다른 생각도 든다.
인간이 양육자의 절대적인 사랑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기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 기간에 대부분의 부모들은 육아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 사실 늘 조바심을 내며 살게 된다. 실제로 대다수의 여성들은 육아와 자신의 삶을 병행하기 위해 수퍼우먼이 되어야 하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경력 단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지나고보니, 내가 그 경력 단절의 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배울 수 없었던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배운 시간 역시 내가 내 삶을 포기했던 시간이 아니라 나를 좀 더 깊어지게 해주는, 분명 ‘내’ 삶의 시간이었다는 생각 말이다.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
언제까지나 안아달라, 잠들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달라, 곁에 있어달라 할 것만 같아서 때로는 귀찮고 힘들기도 했던 아이가 예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내가 안으려고 팔을 벌렸을 때 내 팔을 나보다 억센 손으로 잡으며 “엄마, 왜 이러셔?” 할 때, 당혹감에 쩔쩔맸던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아이를 안아주는 일이 아니라 아이를 놓아주는 연습을 해야했다.
그 때쯤이었나?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먼저였나보다. 나는 내 입장에선 야단을 치고 있는데 아이 입장에선 나랑 싸우고 있는 거라는 걸 인정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아이를 독립적 인격으로 존중한다는 건, 바로 그런 뜻이더라. 한편, 이걸 인정하고나면 때때로 나는 아이랑 몹시 유치하게 싸우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어떤 해방감과 ‘폼나는 어른’이긴 글렀다는 좌절감, 그 양가감정에 몹시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절대적인 사랑과 보호를 필요로하는 시기엔 아이에게 충분히 사랑과 보호를 주지 못하다가, 정작 아이가 아이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놓아줘야 하는 시기엔 아이들을 붙잡고 마치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기라도 할듯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일매일 겪는 실패
엄마가 되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엄마가 된 나도 이렇게 힘들고, 좋은 엄마가 되는 일에 매일매일 실패한다는 것. 사실 나는, 옆지기는 결혼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 위해 결혼을 결심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아이들이 나를 아직 엄마가 아니라 ‘깨비 아줌마’라고 부르던 시절, 아이들과 나는 가장 행복한 관계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면 참 생각이 복잡해진다.
다만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엄마 노릇은 처음 해보는 일이고 첫 아이에게든 둘째 아이에게든 엄마 노릇은 매번 처음이라는 거. 그 뿐인가? 다섯 살짜리 아이 엄마 노릇도 처음이고, 열 여덟 살짜리 아이 엄마 노릇도 처음이다. 아이가 커가는 매 순간 매 년, 처음 하는 엄마 노릇. 그리고 엄마 노릇 역시 실패를 거듭하면서 배워가는 거라는 사실.
모든 개별적인 관계들
한편 나는 내가 엄마로서 이런 걸 느끼고 있다고 해서, 내 부모와 저절로 화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는다. 내 부, 모, 나, 내 자식들 모두가 각자 자기 삶을 감당해야하는 사람들이며, 그 모두가 각각의 관계일 뿐이라서 관계의 모든 숙제는 또 각각 풀어야할 문제라는 것.
어쨌거나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해 본 일 중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역시 ‘엄마’ 노릇이고, 모든 인간관계가 어렵지만 역시 가장 어려운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다.
원문: 명인 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