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윤경 의원의 개입에 대해 개인 대 개인의 재산권 분쟁에 현직 국회의원이 끼여드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썼는데, 아주 장황하게 형식적 법치주의 극복의 맥락에서 반박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 있어 씁니다.
사적 소유권의 탄생
1206년 동쪽에서 칭기스칸이라는 인물이 몽골 고원을 통일할 즈음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존왕의 실정으로 귀족과 왕실 간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1215년 만들어진 것이 하나 있는데, ‘대헌장(마그나카르타)’이지요. 이 마그나카르타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과거 ‘왕’과 ‘귀족 영주’, ‘농노’ 사이의 중층적 소유 관계를 사적이고 배타적 소유 관계로 전환하는 계기가 됩니다.
만약 이 마그나카르타가 없었다면 먼 훗날 ‘엔클로저 운동’으로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는 일도 없었으며, 그 부르주아의 형성과 ‘근대 민주주의’의 태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마그나카르타를 기점으로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탄생했고, 전제 왕권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신민의 재산 소유권 규정하는 일이 사라집니다. 바로 근대 의회와 법치주의에 근간하는 입헌 군주제의 시발점은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의 시발점도 다름 아닌 헌법 제정을 통한 입헌 군주제, 법치 하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전제 왕권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테니스코트의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 사건이라는 ‘국민의회’ 해산 거부 사건이었지요.
재미있게도 배타적 소유관계를 통한 완전한 사적 소유를 긍정한 사람은 ‘자본가 계급’ 그리고 주류 경제학의 선구자 뿐만이 아닙니다. 칼 마르크스 또한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향후 공산주의 사회로 나갈 것이라고 했지만 인류의 체제 발전 과정에서 중세 봉건사회에서 중층적 소유구조가 해체되고, 배타적 소유 관계가 성립함으로서 자본주의로 변화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만큼 배타적 소유관계, 사적 소유의 형성이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역사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큽니다. 사적 소유라는 개념이 없다면, 민주주의의 근간인 개인의 많은 권리 개념이 창출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분이 이런 역사성을 깡그리 무시한 주장을 일삼기도 합니다.
국회의원/시민단체가 개인 대 개인의 분쟁에 끼어드는 것은 정당한가
어쨌거나 국회의원이 사회의 분쟁에 중재자로 나서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개인 대 조직의 구도 혹은 조직 대 조직에서만 긍정되는 편입니다. 여기서 조직은 ‘노조’, ‘기업’, ‘국가’를 이야기합니다.
그외에 개인 대 개인의 신분의 분쟁에서는 정치인은 나서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개인 대 개인 간에도 강자와 약자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형사상’의 문제가 아닌 민사적 문제에서는 입법권자가 개입하여 어떤 주장과 결과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사법부 권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은 ‘입법권자’로서 입법 권능으로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고, 이러한 입법권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기업 혹은 단체의 분쟁에서는 정치력으로 중재를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의원 시절에 현대차 노조와 사측 분쟁의 중재자로 나선 것이지요.
저는 또한 ‘시민사회 단체’의 개인 대 개인 분쟁 개입도 매우 경계합니다. 어디까지나 시민사회가 실력 행사를 통해 협상하고자 하는 것은 ‘협상 테이블의 마이크’ 혹은 ‘의회 권력의 일부’입니다. 즉, 노조의 실력행사나 시민사회(소비자) 단체가 기업에게 실력을 보여주는 것은 협상력을 얻기 위함입니다. 엄연히 조직 대 조직의 관점에서 투영되는 사안들입니다. 하지만 리쌍과 그 포차 점주와의 관계가 이런 협상테이블을 시민사회 단체가 주선해야 할 사안일까요.
게다가 실력 행사 자체가 결과이자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되죠. 배타적 소유관계에서는 한 쪽의 재산권 행사에 장애가 발생하면 그것은 명백한 손해가 됩니다. 즉, 시민사회 단체나 국회의원과 같은 권력자가 개인 대 개인의 분쟁에 개입하는 순간 누군가의 ‘손해’를 구체화하는 형태가 됩니다. 이건 전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쟁점으로 특정 개인의 손해를 강요하는 행동일 뿐이지요.
개인 대 개인의 재산 분쟁에서 시민사회의 조직 행동은 그 자체가 결과로 투영됩니다. 미 군정과 대한민국 초기에 서북청년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시민단체였습니다. 한때는 자유진영을 돕는다는 의미였지만 그들이 개인의 친일 행적과 사상을 조사하여 실력 행사에 들어갔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손해를 봤습니다.
만약 국회의원과 시민단체가 개인 대 개인의 분쟁에 깊숙히 개입하는 세태를 가정해봅시다. 그들이 멋대로 판단한 강자와 약자 구도는 실력행사를 통해 구체적인 손해와 희생을 만들어냅니다. 그 자체가 ‘누군가의 재산권’에 개입하는 법치 바깥의 권력이 됩니다. 이걸 따뜻한 정치 혹은 사회적 맥락 운운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와 상가임대차보호법 문제 많은 거 모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공감합니다. 임의적으로 임대료를 올려서 쫓겨나고 상권 자체가 죽어버리는 악순환의 연속 모르는거 아닙니다. 그러나 특정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처럼 법률 대항력을 갖추고 행정적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사회적 강자가 아닌 이상, 개인으로서의 민간은 그러한 강자로 취급해선 안 됩니다. 시민사회 단체의 개입과 국회의원이라는 정치인의 개입도 오히려 금기시 되어야 하고요.
게다가 이러한 실정법 체계의 약점을 문제삼아 실정법 외의 실력 행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투영한다는 것은 결국 과거 서북청년단처럼 사적 복수와 사적 재판을 용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결국 맨파워가 곧 강자가 되고, 사회와 제도를 규정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사적이고 자의적인 분쟁 해결의 금지
밖에서 사적 복수와 사적 재판을 하지 말라고 만든 게 의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입니다. 밖에서 총 들고 싸움하고 누군가의 재산을 마음대로 못 건드리게 하기 위해 만든 게 그 원칙들입니다. 입법권자는 그 사안에 공감하면 그에 걸맞는 법안을 제출하고, 자신의 의회 권력과 정치력을 활용하여 통과시키면 됩니다.
그러나 사적인 개인 간의 재산권 분쟁에 개입하고, 민사적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결국 큰 이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권리를 소모적 이슈로 활용하는 게 됩니다. 시민단체도 마찬가지가 되지요. 그 활동을 통해 단체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확인하는 소모적 쟁점으로만 소비될 뿐입니다.
그 사안이 불만이면 법제를 바꾸도록 해야지 모든 개인 대 개인의 분쟁에 쫓아가면서 실력을 행사한다? 도와줘야 할 사람과 옳고 그름은 누가 판단하죠? 개인의 재산 문제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맘상모’가 서윤수 대표의 단체이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추신. 전 2년 전 해당 건물에서 서윤수 대표의 사정에도 공감했고,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 방향에도 찬성했던 사람임을 밝힙니다. 지금도 임차인의 대항력을 높이기 위한 많은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이 입장과 별개로 개인 대 개인의 분쟁에 단체와 사법부 외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매우 크다는 입장임을 밝힙니다.
원문: 임형찬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