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은 우리 곁에도 많거니와 역사를 바꾼 말 한 마디도 부지기수다. 물론 말 한 마디 때문에 없던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바싹 마른 들에 기름까지 뿌려진 위에 떨어지는 불씨 하나는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 불씨 없이는 불이 나지 않는다.
1987년 6월 항쟁 때 사람들을 격동시킨 한 마디는 “탁 치니 억”이었다. 그래도 명색 치안 총수가 4천만을 상대로 팔팔한 청년이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고 엄숙하게 거짓말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치를 떨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개새끼들 봐라. 보자보자 하니까.”
임오군란이 폭발하기 전 13개월만에 급료로 받은 쌀에 모래가 섞인 걸 보고 기가 막혀 항의하는 군인들에게 민겸호의 하인이 “싫으면 다시 내놓든가” 로 삐딱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의 전함 포텐킴에서 구더기가 드글거리는 고기가 보급되자 이에 항의하는 병사들 앞에서 군의관이 “썩은 부분을 제거하면 먹으면 됨.”이라고 속없이 뇌까리지만 않았더라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그들이 얼마나 상대방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뭣도 아닌 주제에 다른 편 세상을 얼마나 얕잡아보고 있는지를 증명했고 그들이 무심코 흘린 말의 불씨는 누구도 주체 못할 들불이 되어 스스로를 삼켜 버렸다.
주유소 기름탱크 옆에서 담뱃불을 태연하게 붙이는 사람의 종류는 두 가지다. 죽으려고 작정을 했든지 아니면 기름탱크가 아니라 물탱크라고 생각하든지. 전자의 사람은 주저하기라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라이터돌 당기는 일에 하등 거리낌이 없고 주변 사람들의 어이를 앗아갈 만큼 태연하다. 자신이 있는 것이다. 불이 날 리가 없고 탈도 날 리가 없고 겁내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대개 망언은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내가 이러는데 니들이 어쩔래.” 하는.
최근 이 정부의 고위직이나 사회의 이른바 ‘지도층’들 사이에서 이전 시대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무슨 노무현 김대중 정권 때 이야기가 아니라 전두환이나 박정희 정권 때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다나는 치도곤을 맞고 파면되거나 바짝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복창을 하다가 쫓겨가거나 최소한 사람 취급 받지 못한 채 보따리를 싸야 했을 말들이 너무도 스스럼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천황폐하 만세 부른 미친놈이 아직도 그 자리에서 편안히 월급받으며 ‘진상 조사 중’인 것은 이제는 축에도 들지 않는다. 국가 장학 재단의 고위인사는 대학 졸업하면 빚쟁이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불운한 인생들 앞에서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는 천하의 개소리를 늘어 놓았고 국방부 장관은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 안에서 한 젊음이 짐승처럼 두들겨 맞고 가래침을 핥아먹고 숨이 막혀 죽어간 사건을 두고 “그런 작은 사건 가지고 뭐라 하지 마라.”는 식으로 서슴없이 말하는 사회가 됐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주유소가 아니라 수영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붙붙은 담배꽁초가 아니라 횃불을 처넣어도 푸시시 꺼디고 마는 안전지대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해 본들 이 우매한 백성들은, 개 돼지들은 술이나 퍼먹으면서 으어 더러운 세상 욕하다가 오버이트하고 컨디션 한 병 먹고 다음날 되면 귀신같이 일어나 하루 일과에 충실한 무녀리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말할 수가 없다.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하고, 국민들은 먹여만 주면 되는 개 돼지고, 1%가 99%를 지배하는 게 마땅하다는 투로 얘기한 내 또래의 ‘고위직’ 교육 공무원 또한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전두환 때 박정희 때에는 철권을 휘두를지언정 정권 스스로 찔리는 구석이 있어선지 이런식으로 사회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이들에게는 용서가 드물었다.
전두환 때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는 공무원이 있었다면 다음날 구속됐을지도 모른다. 삼미슈퍼스타즈 김진영 감독이 심판에 항의하다가 벌인 몸싸움을 고위층이 보고 저거 구속시켜 해서 구속될 정도였으니 무슨 죄목으로든 철창행을 했을 것이다. 농민의 아들임을 툭하면 막걸리 먹으면서 과시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어느 덜떨어진 공무원이 “99%는 개돼지.”라고 했으면 그는 남산에 끌려가서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혼이 나가서 사직서를 쓰고 신문에 대가리 숙이는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났을 것이다. 이건 전두환이나 박정희가 착해서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무서워하는 게 있었고 꺼리는 게 있었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이 시대에는 그 거리낌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람을 정말로 개돼지로 보는 것이다. 무슨 취급을 받든 어떤 경멸을 듣든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로 정리되는 망부석들의 세상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자기에게 월급주는 국민들에게 개돼지라는 호칭을 선사하고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고 우기는 저 잘난 행정고시 출신 망나니의 망언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군주정에서는 군주가 어리석으면 나라가 망한다. 동시에 민주정치에서는 국민들이 멍청하거나 무력하면 나라도 그 뒤를 따른다. 일단 이 고위공직자 나향욱이라는 자부터 자신이 어디에다 불 붙은 재를 털고 다녔는지를 깨우치게 해 줄 필요가 있고 나아가 다른 자들에게도 가르쳐 줘야 할 명제가 있다. “사람 무서운 줄 알아라.”는.
저 나향욱으로 하여금 복수의 무서움과 버림의 공포를 알게 하자. 저 자리에서 끝장을 내고 전관예우 받아 어디서 편하게 못먹고 살도록 추적하고 폭로하고 자신의 개돼지 망언을 제 팔을 부러뜨리고 제 혀를 뽑는 고통 속에 후회하도록 하자. 사람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사회는 결국 더 큰 복수를 받는다. 복수를 받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사람 무서운 걸 알게 해 주자.
원문: 김형민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