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성차별을 해소하기 보다는 정당화하는 역할을 더 많이 했다. 본인이 여성에 대해 가장 많은 임상경험을 축적했으면서도 “대체 여자가 원하는 건 뭐냐?(what women wants?)”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프로이트(S.Freud). 그는 “해부학은 운명이다“라고 말했다. 여자에게는 남근이 없어서 거세당할 불안이 없고, 그래서 도덕성을 습득할 이유도 없다는 거다.
유구한 성차별의 역사
이 정도로 황당하지는 않아도 최근까지 많은 심리학자들이 남녀 성차이의 기원을 좌뇌와 우뇌의 차이나 호르몬의 차이, 혹은 진화과정의 차이에서 찾아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같은 책에서 제시한 남녀의 차이는 매우 미세한 것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사소한 차이도 의미 있어 보였고 꽤 많은 지지자들도 만들어냈다.
물론 성차별이 심리학자들만의 탓은 아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남녀의 목숨 값은 전혀 달랐으니 말이다. 근대사회에서도 여자는 2등 시민 취급을 받았다. 1870년부터 흑인 남자의 투표권을 인정한 미국에서 모든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해가 1920년이다.
실제 생물학적 요소도 분명히 성차별에 기여했다. 예컨대, 저기 멀리 뭔가 움직이는 물체가 보이면 인간의 생물학적 뇌는 그 물체가 동물인지 사람인지를 판별하려고 든다. 일단 그 물체가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구별하려 든다. 그 다음에야 그 남자 혹은 여자가 몇 살쯤 되어 보이는지, 나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진다.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인간을 구별하는 첫 번째 기준이 바로 성별이었으니 성차별이 그토록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변화의 움직임
하지만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 변화는 계속되었다. 성차별도 그렇다. 현재 한국의 대통령은 여성이며, 유럽연합을 이끄는 독일의 최고 권력자 역시 여성이고, 미국의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도 여성이다. 성차별의 임계점이 온거다. 그 임계점은 최근 서울 강남지하철 역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현상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나는 것 같다.
나는 왜 많은 여성들이 이 사건에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지금까지 이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 더 신기하니까. 만약 이 사건이 낙도 섬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상황의 특수성 탓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같은 일이 한국에 사는 어느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 이전, 이후에도 여성을 겨냥한 강력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나는 그보다는 남자들이 신기했다. 그 현상을 불편하게 여기는 ‘일부’ 남자들 말이다. 그 남자들의 심리는 뭘까?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으리라. 분명한 건, 그들이 느끼는 불편은 추모와 성토의 대상인 ‘남자일반’을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특히 억울함을 느끼는 남자들은 그들 스스로 토로하듯 자신이 남자라는 이유로 혜택보다는 희생만을 강요당한 사람들이다. 내 탓도 아니고 남자라 덕본 것도 없는데 욕만 먹으니 이게 뭔가 싶은 거다.
물론 예전에 비해서 남자들의 삶이 더 고통스러워진 건 분명하다. 그리고 어떤 여자들은 노력도 하지 않고 남자에게 편승하는 삶을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특정한 여자들이 특정한 시기에 그것도 많은 댓가를 치르고 얻는 기회일 뿐이다. 동일한 조건을 가진 남자와 여자를 비교했을 때, 한국 사회는 언제나 여자에게 더 가혹했고 지금도 그렇다.
권한을 누리는 자들은 자기 권한의 본질을 인식하기 어렵다.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고 여기기 쉽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제3자의 눈에는 얼마나 오만하거나 무신경하거나 혹은 잔인해 보이는지도 쉽게 놓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 앞에서 사람들이 슬퍼할 때 그 애도의 ‘방식’이 눈에 거슬린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보기 불편하지 않은 방식으로 애도해야 그것이 다른 의도가 없는 순수한 슬픔임을 인정해주겠다”는 태도 자체가 얼마나 오만하고 잔인한지 그들은 몰랐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런 태도가 사실은 그 사건에 책임이 있는 권력자들의 편을 드는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했을 거다. 자신에게 실제로 그런 권력이 없다 할지라도 그런 태도를 가짐으로써 마치 자신이 그 권력 집단의 일부인 양 여길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강남역 비극에 대한 추모현상에 대해서도 일부 남자들이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 애도만 하면 되지 왜 정신병자 개인이 저지른 잘못을 빌미로 남자 전체를 싸잡아 욕하느냐며 그 때문에 이 추모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남자들 중에는 분명히 세월호 애도에 대한 시비질에 분노하던 이도 많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까?
소외된 자들이 변화에 저항한다
로버스 케이브 국립공원에서 12살 짜리 아이들을 독수리 부족과 방울뱀 부족으로 갈라 집단 간 갈등을 조장해보았던 무자퍼 셔리프(M.Sherif)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두 집단이 갈등을 그치고 협력을 하려고 할 때, 이에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자기 집단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던 아이들이었다. 셔리프는 그 이유를 이렇게 추론했다.
그 아이들은 자신이 비록 이 집단에서는 가장 낮은 지위이지만 적어도 상대 집단 인간들보다는 더 우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자존감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려고 하니 저항할 수밖에. 자칭 어버이 연합이나 자칭 엄마부대의 구성원들을 보라. 그들에게 남은 건 자신이 기득권 집단의 일부라는 허위 집단정체성뿐이다. 그 허상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지위를 포기하지 못한다.
결론은 이렇다. 요즘 남자 일반에 대한 혐오 혹은 비난이 부당하게 느껴지더라도 우리 남자들은 울컥해선 안 된다. 그건 스스로의 지위를 비하하는 일이다. 성차별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걸 고쳐보려던가 최소한 악화시키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그게 더 나은 남자가 되는 길이다.
원문: 싸이코짱가의 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