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_창녀다” 해시태그 논쟁 관련해서는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서로 상반되는 입장의) 글들에 ‘좋아요’를 누르는 일 이외에는 특별히 입장표명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러 페이스북 지인의 상당히 날선 주고받음을 보고, 그리고 그 사이에서 스스로의 입장을 설정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를 인식하게 되면서, 어떤 형태로든 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일단 <나는_창녀다#>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게시물 중 전체공개로 읽을 수 있는 모든 게시물, 약 150여 건의 사례를 훑어 보았다.
1.
지금까지 내가 읽은 사례들에 국한해서 볼 때, “나는_창녀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이 비판적으로 공론화하고자 하는 대상은 크게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을 것 같다.
1) 가장 중요한 타깃은 한국 사회에 매우 넓게 유포되어 있는 (주로 젊은) 여성의 성적 대상화다. 여기에서 두 가지 동일시가 이루어지는데, 첫째로 모든 ‘여성인 사람’은 다른 정체성 및 특성과 무관하게 오로지 여성 정체성으로만 간주되며(“네가 어떤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너는 여성일 뿐이다”), 둘째로 여성 정체성은 오로지 성적인(sexual) 존재, 구체적으로 “창녀”=남성 성욕의 대상일 뿐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두 명제의 귀결은 자연스럽게 “네가 여성이라면, 네가 어떤 사람인가와 무관하게 오로지 (남성들의) 성욕의 대상으로서의 창녀일 뿐이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나는_창녀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적 대상화와 연결되어 있지만 세분화해서 볼 필요가 있는 공격대상은 남성지배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중구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①남성들의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성적 대상화에 자원복무할 것을 강요받으며 ②이러한 성적 대상화에 참여한다고 간주되는 여성은 바로 그 이유로 “창녀”라는 비난과 모욕의 대상이 된다.
즉 이 사회는 한편으로 여성에게 “창녀”가 되길 요구하면서 동시에 그 요구에 따른다는 이유로 “창녀”라고 비난한다. 이런 답없는 양자택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여성상, 곧 “성녀”가 되는 것이 제시되는데, 사실 이 또한 남성적 규범에 따라 자유로운 주체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종속적이다. “나는_창녀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은 이러한 ‘어느 선택지를 골라도 똥이 되는’ 논리적 구도를 겨냥하고 있고, <메르스 갤러리 저장소3> 페이지에서 공유한 게시물은 이러한 입장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3) 1)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좀 더 직관적인 비판대상은 여성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구매가능한” 성적 대상=”창녀”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업로드된 사례들 중 적지 않은 경우에서 자신이 남성의 성욕에 부합해 행동하는 대가로 알바 자리에서부터 구체적인 액수가 제시된 사례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인 반대급부를 제의받은 상황에 놓인 경험을 분노를 담아 토로하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①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적 대상이자 ②화폐 등으로 판매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되었으며 ③그 상황이 명백히 권력관계, 즉 화폐구매를 통한 남성의 여성지배라는 구도를 되풀이한다는, 즉 자기 자신이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이 암묵적으로 포함된다.
2.
적어도 여성주의자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사람들 중 1번 항목에서 나열된 목표 및 그것을 위한 수많은 고백들의 의의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논쟁의 지점은 이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위해 “창녀”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어떠한 함의를 (자신도 모르게) 되풀이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효과”를 낳는가?
여러 근거가 제시되었지만, 내 생각에 오해와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을 제외하고 나면 “나는_창녀다” 비판자들의 입장을 가장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창녀다”라는 발화는 여성 일반이 일상적으로 “창녀”로 불리도록 하는 여러 사회적 기제들에 대한 비판적 의도를 담고 있는데, 이 발화는 “창녀”를 부정적, 비하적 표현으로 사용하는 용법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비판적 자의식 없이 수용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는 1번의 세 항목 모두에 해당될 수 있으며, 특히 1), 3)의 경우에는 좀 더 분명하다.
바꿔말하면 누군가 “나는_창녀다”라고 발화할 때마다 그 발화 자체가 “창녀”의 비하적인 의미를 되풀이하고 강화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창녀”는 상당히 추상적인 비하적 표현으로서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사회의 소수자 집단으로 간주되는)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하며, 두 용법은 (일부 이 운동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절대로 쉽게 분리될 수 없다. 내게는 “행동, 사고의 수준이 모자란 사람”과 “장애인”을 동시에 지칭하는 “병신”이란 단어의 두 용법 사이의 거리보다 오히려 “창녀”의 두 가지 용법 사이의 거리가 더욱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창녀다”라는 발화의 기본 메시지는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창녀라는 욕을 먹어야 하는 현실이 문제다”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발화 자체에 “창녀는 매우 기분 나쁜 욕이다”라는 규정이 함축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창녀”를 특정 소수자 집단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한, “나는 현실의 창녀를 혐오/비하한 게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 단어를 사용한 것뿐이다”라는 식의 ‘진짜 의도’에 기댄 재반론은 사실 설득력이 없다. 이 비판 자체가 발화의 의도가 아니라 그 의도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효과를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남자애들끼리 서로 욕으로 “호모 새X”란 말을 쓰면서 “나는 의도는 동성애 혐오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욕설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게 사실이라고 해서 그 언어사용이 덜 문제적이 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3.
2번의 비판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제시된 논리 중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다음 글의 댓글에서 제시된 논리다(내 생각에 본문에서 언급된 병신/빨갱이의 구별은, 필자가 어떤 의도에서 그걸 제시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논의를 더욱 꼬이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필자는 “창녀”라는 단어를 전복적으로 사용하는 실천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창녀/비창녀의 구별’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 사회에서는 결국 모든 여성이 창녀일 수밖에 없지 않냐”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결과적으로 “창녀”라는 단어 자체를 전복적으로 전유할 수 있게 된다면, 현실의 성매매 노동자에 대한 표적화된 경멸, 나아가 “창녀”라는 단어에 함축된 사고,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지배를 당연시하는 사고 또한 폐기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발화자들의 비중이 몇이나 될지, 그리고 이러한 논리가 과연 전체 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이러한 재반론은 분명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재반론의 논리가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여성의 성적대상화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성매매/성적대상화 자체를 경멸하는 사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우리 모두는 이 사회에서 사실상 창녀나 다름없다”라는 비판적 인식은 그 자체로는 “그러니까 성매매/성적대상화에 응하는 것은 비하할 일이 아니야”라는 진술과 같지 않다. 내가 이 차이에 주목하는 까닭은 특히 창녀/비창녀 간 ‘분리의 철폐’ 혹은 ‘연대’와 같은 표현을 사용할 때 이것이 필연적으로 성매매 노동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채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거칠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성적 대상화 혹은 현재 (남성의 지배와 밀접히 연결된) 한국의 성매매노동 자체가 사회적으로 강요된 것이며 궁극적으로 폐기해야 할 것인가(“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의 성적대상화 자체를 폐기하자”)?
- 성적 대상화 혹은 성매매노동은 정상적인, 그러니까 남성집단의 혐오, 경멸, 성적 지배가 배제된 일상적인 행위로서 승인받아야 하는가(“성적대상화 혹은 성매매로부터 부정적인 것들을 씻어버리자” / “주체적인 성적대상화/성매매노동을 만들자”)?
현재까지의 “나는_창녀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은, 이 발화의 “전복적 성격”을 옹호하는 논리를 포함해서, 적어도 내게는 사실상 전자의 행보를 갈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보인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경우 필연적으로 현재의 성매매 노동자 중 상당수를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며, 사실상의 “창녀비하”를 되풀이하는 게 아니냐는 반론에 지속적으로 직면할 것이다(그렇다고 두 번째 선택지가 더 쉬운 길인 것도 아니다).
결론
여기까지의 정리에서 도달한 결론은, 이 논쟁이 운동의 옹호자와 비판자 어느 쪽이든 상대방을 쉽게 무너트릴 수 없으며, 어느 길로든 결국 성매매 노동과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_창녀다” 해시태그 달기 운동이 진지한 운동으로 지속하고자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현실의 “창녀”에 대한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원문: begray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