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삶을 살아오면서 가장 운이 좋았던 점은, 처음으로 사회를 알게 될 때에 훌륭한 프로, 선배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삶이나 한마디 말들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데 기준점이 되어 주었고, 이것이 결국 오늘을 살아가게 해 주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죠. 제가 만화를 연재하던 당시 ‘영 매거진’ 편집장이시던 세키 상도 삶의 기준을 마련해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2000년대 초 저는 ‘영 챔프’에 일본통신 칼럼을 연재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편집장분들 인터뷰를 하러 찾아가곤 했더랍니다. 당시 고단샤 편집부에는 소파가 비치되어 있었고, 편집부마다 텔레비전도 비치되어 있어 항상 뉴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인터넷으로 뉴스를 실시간으로 알기 어려우니, 텔레비전 뉴스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라는 편집부원들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이었지요)
아침에 찾아가니 세키 상은 소파에 누워서 졸고 있었습니다. 아마 늦은 밤까지 작가를 접대했거나 마감에 쫓기며 원고 입고 후 체크하는 작업을 했던 탓이겠죠. 그는 흐릿한 눈으로 날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현석 씨 왔어?”
그리고는 고쳐 앉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저도 비디오카메라를 돌리면서 굉장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영 매거진의 편집방침이나 운용에 대한 철학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조금 전까지 지쳐있던 편집장의 눈빛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석 씨, 흔히들 세상에서 말하는 ‘영 매거진’의 라이벌 잡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다들 ‘모닝(モーニング)’을 말할 거예요. 대조해서 말해주는 게 더 이해가 쉬울 터이니, 그 잡지와 비교해서 말을 해 보겠습니다.
자아, 모닝은 세상을 위에서 조망하는 잡지예요. 왜 그럴까? 그건 그 잡지를 대변하는 사상이 ‘인생의 승리자를 위한 잡지’라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그 잡지는 굵직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정치나 출세, 역사처럼 큰 것들이 키워드죠. 그래서 그 잡지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누굴까요?
맞습니다. <시마 사장>이예요. <창천 항로>의 조조도 있지요. 이들은 모두 성공한 자, 거룩한 사람, 초인, 영웅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바라보고 큰 그림을 그리며 끌고 가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모닝’은 성공한 샐러리맨들이나 도심부에서 일하는 유력한 사람들도 즐겨 봅니다. 대학생들도 즐겨 보죠. 하지만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들 ‘영 매거진’ 독자는 공사판 노동자나 트럭 운전사 등 육체 노동을 하는 낮은 직급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점심때 도시락을 사 먹으면서 우리 잡지도 같이 사고, 밥 먹고 깔깔 웃은 뒤 버립니다. 교외에서도 많이 팔립니다. 우리는 자동차 만화가 많은데, 직접 운전을 해야 하는 교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동차에 흥미가 많아서 그런 거죠.
자,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다보는 이야기가 흥미로울까요? 별반 재미가 없겠죠. 그건 완전히 다른 사람들 이야기거든요. 우리 잡지 주인공 캐릭터들은 비겁자, 패배자, 겁쟁이, 울보입니다. 네, 바로 <도박 묵시록 카이지>의 카이지가 우리 얼굴이죠.
하지만 현석 씨, 그러면 우리는 ‘모닝’지보다 못한 잡지입니까? 전 아니라고 봐요.
‘모닝’은 세상을 위에서 바라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안에서’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인간의 자세한 면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디테일합니다. 그래서 땀 냄새와 살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그런 만화를 만듭니다. 이게 ‘영 매거진’을 이끄는 철학이라면 철학입니다.”
이 답변에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끔 밤에 술 한 잔 먹고 이 말을 되새김질하면서 울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만큼 대단하나 이야기라서 그렇지요.
저 이야기 안에는 ‘영 매거진’을 준비하는 작가와 잡지에서 일할 부하 편집자들에게 해주어야 할 모든 말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력독자층, 만화들의 성향, 팔리는 지역, 그리고 캐릭터 제작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성에 대해서까지. 이 짧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강렬하게 웅변하고 있지요. 참으로 리더다운, 명쾌한 발언이지요.
이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큰 사람들’이 앞에서 기준이 되어 준다면, 삶은 결코 허투르게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게 해준 운명에도 감사하고요.
아기를 재우고 잠시 상념에 빠져서 써 봤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