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9일 개봉한 <500일의 썸머>는 역대 재개봉작 중 처음으로 개봉 첫날 관객 1만 명을 돌파했다. 그전까지 기록은 <인생은 아름다워>와 <이터널 선샤인>이 1만 명에 살짝 못 미치는 수치로 갖고 있었다.
재개봉작들은 대개 ‘다양성 영화’로 분류돼 관객 1만 명 정도를 손익분기점으로 하는데, 이 영화는 평일인 수요일 첫날 이미 목표치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500일의 썸머>가 선전하며 박스오피스에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졌다. 옛 영화와 최신 영화가 동시에 ‘톱 10’ 차트에 오르며 경쟁을 펼친 것이다. 이날 <500일의 썸머>는 10위에 이름을 올렸는데 11위와 12위에는 개봉 2주차에 접어든 신작 <비밀은 없다>와 <서프러제트>가 있었으니 옛 영화가 새 영화에 굴욕을 안긴 셈이다.
2009년 제작된 <500일의 썸머>를 비롯해 <피아니스트>(2002), <환상의 빛>(1995),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바그다드 카페>(1987), <불의 전차>(1981), <벤허>(1959), <남태평양>(1958) 등, 요즘 극장에 걸린 개봉작들의 포스터들을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고 있는 듯하다. 가깝게는 6년 전, 멀게는 무려 56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가 상영 중이거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재개봉은 최근 2~3년새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나 무한도전 <토토가> 열풍 이후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기 시작한 30~40대의 소비력이 동력이었다. <러브레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영웅본색> 등 그들이 추억을 공유하는 영화들이 차례로 극장으로 불려 나왔고 5만 명 내외의 관객을 동원하며 수입사에게 짭짤한 흥행수입을 안겨줬다.
한때의 유행으로 여겨졌던 재개봉 열풍, 그러나 올해 들어 그 바람이 더 거세지고 있다.
작년 11월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이 태풍급 흥행을 기록하며 기폭제 역할을 했다. 무려 49만 명이 관람했는데 이는 10년 전 개봉 당시 기록인 17만 명을 훌쩍 넘어선 수치다. 이로 인해 ‘불 꺼진 영화도 다시 보자’는 바람이 거세지며 배급사들이 앞다퉈 옛날 영화들의 카탈로그를 뒤적이고 있다.
재개봉 영화는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에서 배급사에겐 비교적 리스크가 적은 모험이다. 판권 비용은 신작보다 저렴하고 여기에 음질과 화질을 개선하는 ‘디지털 리마스터링’ 비용으로 편당 대략 2000만 원 정도를 들이면 새로운 영화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또 영화 제목만으로 홍보가 되기 때문에 마케팅 비용이 적게 들고 극장 개봉 이후 IPTV 등 2차 판권 시장에서 선전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그러나 옛날 영화라서 시의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배급사에게 최대 위험요소다. 그래서 사회적 분위기와 개봉 시기를 조율하는 게 중요하다. 최근 재개봉작들은 겨울에 <러브레터>, 여름에 <500일의 썸머> 등 시즌에 어울리는 영화로 계절 마케팅을 펼치거나 블록버스터 신작과 연계해 개봉 일정을 잡기도 한다. 56년 전 제작된 <벤허>가 리메이크작 개봉과 맞물려 7월 성수기에 정면 승부를 펼치는 것이 이런 경우다.
재개봉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대작이거나 혹은 마니아 취향이거나.
전자는 <벤허> <남태평양> <아마데우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첩혈쌍웅> 같은 영화들로, 개봉 당시 대히트해 대형 단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던 실버세대부터 영화에 대해 들어봤지만 본 적은 없는 젊은 세대까지 아우르는 작품이다.
후자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냉정과 열정사이> <피아니스트> 등 취향을 저격하는 영화들로, 주로 30~40대 관객을 노려 마케팅을 펼친다. SNS를 통해 문화적 취향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이들이 홍보를 대신해 주기에 배급사 입장에선 일석이조다.
<500일의 썸머>는 젊은 여성들의 감수성을 정확히 꿰뚫은 영화고, <바그다드 카페>는 1990년대 커피숍들의 벽면을 도배했을 만큼 예쁜 포스터로 더 유명한 영화인데 정작 본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재개봉 붐이 옛날 영화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지면서 예전에 수입되지 않은 영화를 이참에 새로 들여오는 경우도 있다. <불의 전차>와 <환상의 빛>이 그런 경우다.
1982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불의 전차>의 경우 반젤리스의 테마음악이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스포츠 영화지만, 정작 국내에서 개봉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 기독교 단체의 후원 속에 한 수입사가 영화를 들여왔다.
또 1995년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는 극찬 속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촬영상을 받은 <환상의 빛>은 감독에 대한 팬덤이 20년 전 작품의 수입으로 이어진 경우다. 남편이 자살한 뒤 미망인이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통해 동전의 양면 같은 삶과 죽음에 대해 차분하게 관조하는 작품으로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 등으로 이어지는 고레에다 감독의 주제인 ‘기억과 상실’의 근원을 살펴볼 수 있는 영화다.
예전 같으면 흥행을 담보하지 못해 극장에 걸리지 못하고 VOD 시장으로 직행했을 작품들이다. 하지만 <불의 전차>는 개봉 2주차를 맞은 지금 관객 2만 8000명을 모으며 조용히 달리고 있고, <환상의 빛>은 각각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같은 감독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팬들이 찾아주길 기대하며 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요즘처럼 콘텐츠가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시대, 역설적으로 느리고 화질도 좋지 않은 옛날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울림이 큰 콘텐츠는 시대가 지나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회자된다는 것이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쓴 문장이다. 그의 말마따나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고 언제 어디선가 반복된다. 그런데 쿤데라는 이렇게 덧붙였다.
“중요한 것은 반복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옛날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을 2016년의 한국 관객들에게 꼭 필요한 문장 아닐까.
원문: 유창의 창작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