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 명사 초청 세미나에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님이 오셨다. 이 분은 인공지능과 머신러닝에 대해 정통하신 뇌과학자신데, 알파고 이후 여러 곳에 초청 강연을 다니신다고 한다. 강연에서 보고 느낀건 인공지능의 위대함보다, 직업인으로서의 위기감이었다.
인공지능이 할수 있는 것 이상의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산업은 결국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이었고, 예로 자동차 관련 산업을 들었다. 인공지능이 자율주행을 가능하게 한다면 ‘운전기사’라는 직업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 정도는 예상했던 바이지만, 한발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효율적으로 자동차를 공유(카쉐어링)하는 시기가 오면 자동차의 수요가 90%까지 줄어들 것이고, 결국은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직업인의 대부분이 실직자가 될 것이란 그분의 이야기는 가히 충격이었다.
글쎄, 이 위기가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될까? 인공지능을 주도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하는 일부 회사를 제외한 모든 회사와 모든 산업들은 이 위기를 겪을 것이다.
그래서 구원투수가 필요하다. 이 구원투수는 인공지능이 해낼 수 없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최고의 효율을 계산해내는 상대와 숫자로는 싸울 수 없다. 숫자로 싸우지 않는, 전자 두뇌의 계산이 이길 수 없는 영역은 무엇일까?
정답은 크리에이티브에 있다
제조업부터 IT산업까지 앞으로의 부가가치는 크리에이티브에서 생겨날 것이고, 그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는 ‘크리에이터’는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크리에이티브와 크리에이터를 내재화 하고 있는 회사가 많지 않다. 특히 규모가 큰 대기업들은 ‘광고 대행사’라는 이름의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를 선정하여 그들에게 전반적인 마케팅 전략과 크리에이티브를 맡기고 있다. 전통적인 산업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마케팅 예산이 상당하니 비딩을 붙이면 잘나가는 광고대행사들이 우르르 몰려 경쟁PT를 한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전략과 크리에이티브 중에, 오너나 의사결정권자의 입맛에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광고대행사에게 크리에이티브의 제작과 매체 운영을 일임하면 된다.
광고대행사의 입장에서는 크리에이티브 팀을 꾸려 놓고, 여러 클라이언트의 일을 맡기면 되니, 크리에이터들에게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다. 참고로 규모있는 광고대행사의 크리에이티브팀은 최소 2개 이상의 클라이언트의 일을 하고 있다. (작은 클라이언트만을 담당하는 팀은 열 개에 가까운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외주 크리에이티브’의 문제점
하지만 흐름이 빠르게 바뀌면서, 이러한 전통적 방식이 더이상 효율적이지 않게 되었다. 회사가 크리에이티브를 외주로 줄 때(광고대행사에 크리에이티브를 맡길 때)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 속도가 느리고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단계’가 많아지면서 생기는 문제는 속도와 변질이다. 속도는 느려지고 내용은 변질된다. 속도를 얘기하자면, 윗선에서 받은 과제를 고민해야 할 마케팅 실무선이, 별 생각 없이 광고대행사에 넘긴다. 광고대행사는 또 캠페인 담당자부터 시작해서 크리에이티브 팀을 거치며 최소 일주일은 날아간다. 최소한의 단계만 생각해보면 OT에서 결과물까지는 “클라이언트 임원(의사결정권자)-클라이언트 실무(주로 마케팅 팀)-광고대행사 AE-크리에이티브 팀-PD-프로덕션”의 단계를 거쳐 한다.
여기에 결과물이 온에어되기 전에, 혹은 업로드되고 나서 수정이라도 하나 생기면 그것도 그것대로 일이다. 최소 서너개의 연락망을 통해 수정요청이 전달되면서 여기에서 발생하는 시간적, 내용의 Loss도 상당하다. 수정 뒤에는 위 프로세스의 역순으로 수정물이 전달된다. 따라서 생각보다 간단하다고 생각한 수정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게 된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시간과 비용이 늘어나는 것만큼이나 큰 문제는, 전달코자 하는 내용이 변질된다는 것이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내용들이 뒤섞이고, 개인의 의견과 판단이 더해지면서 난장판이 된다. 만약 클라이언트 임원이 크리에이티브 팀에 직접 과제를 준다고 하면 팀의 크리에이터들은 아마 깜짝 놀라고 말 것이다. 의사결정권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임원-마케팅 실무-AE”를 거쳐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플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둘, 클라이언트의 비전과 전략을 100% 이해하지 못한다.
대행사는 말 그대로 남의 일을 대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크리에이티브’를 대행하고 있는데, 클라이언트는 대행사에게 회사의 모든 사정을 이야기해주지 않고, 대행사가 해야 할 부분만 떼서 얘기해 주게된다. 대행사는 주어진 과제에 대해 고민을 하지만, 그 과제가 주어지게 된 더 큰 맥락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럴 경우 대행사가 준비한 내용을 보고 자연스럽게“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은데, 우리 회사가 가려하는 방향과 좀 안 맞아요”라는 말이 나온다. 이럴 때 눈치껏 접지 않으면, 애매모호한 피드백이 왔다갔다하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나가리’된다.
셋, 어딘가에서 돈이 샌다.
사람을 거치면 돈을 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부가가치를 만들어냈는지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사람에게 모든 걸 맡기면 된다. 0에서 1을 만들어냈으니, 1만큼의 일에 대한 보상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세스가 많아지면 필요하지 않는 역할에도 돈을 쓰게 되고, 관리도 되지 않는다.
클라이언트는 생각보다 많은 견적을 받아보게 되지만 대행사를 통하기 때문에 세부 견적과 인력투입에 대해 판단할 수 가 없다. (견적을 보면 카피료, 기획료 명목으로 기본 몇백만원이 책정되지만, 대행사에게 그것만 주지는 않는다.)
넷,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정말 별로인 캠페인에 수백억 마케팅 비를 쓰고 나서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클라이언트에게 대행사는 훌륭한 면피의 수단이다. “대행사가 별로라서”, “대행사가 제안한 대로 했을 뿐인데” “다른 대행사와 비교해서 여기가 최선” 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다.
반대로 대행사가 져야 하는 책임도 별로 크지 않다. 작게는 대행사 내 AE팀, 크리에이티브 팀을 바꾸는 정도에 그칠 때도 있고, 크게는 대행사를 바꾸거나 기존 대행사를 포함하여 경쟁PT를 붙이기도 하는데, 이정도 책임은 클라이언트가 낭비한 돈에 비해 미미하다.
크리에이티브 인력의 내재화
이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개선할 수는 있다. 클라이언트 내부에 크리에이티브를 책임질 담당자 혹은 팀을 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다.
- 의사결정권자, 유관 부서와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할 수 있다.
- 회사의 비전과 전략을 이해하고 있다.
- 내부에서 직접 아이디어를 내거나, 대행사를 운영할 경우 그들의 크리에이티브를 평가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줄 수 있다. 프로덕션에 있어서 대행사 역할까지 맡아서 직접 업체와(프로덕션, 디지털 에이전시)와 일을 할 경우, 견적과 일정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 크리에이티브에 대해 책임을 질, 혹은 책임감을 느낄 담당이 명확해진다.
그렇다면 회사가 해야 할 일은, 크리에이티브를 담당하기에 적합한 담당자를 신중히 뽑고, 일단 뽑았다면 그 담당자의 경험과 실력을 신뢰하고 보다 긴밀하게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전에 ‘당신의 회사에 카피라이터가 필요한 이유’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도 마찬가지로 요즘 시대에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크리에이티브 인력의 내재화’가 필요함을 설명하기 위해 썼다. 광고대행사가 아닌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 일한지 일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출처 : Songha Lee의 Medi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