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연예 뉴스는 ‘서태지-이지아 이혼 소식’이었다. 그때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마음속의 완전무결한 문화자산이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며 구설수의 중심에 놓이다니.
그 중에서도 가장 괴로운 것은 내 안의 연예인 ‘서태지’의 이미지와 몰래 결혼생활을 했던 일반인 ‘서태지’의 이미지가 상충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 결심을 했다. 다시는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으리라고, 이런 식으로 내 감정을 소진하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2016년 6월, 박유천 사건이 터졌다.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연예인을 바라보고 규정하는 시각은 그대로인 것 같다. 실시간 검색어에 박유천을 비롯, ‘박유천 성폭행’, ‘박유천 화장실’ 등 관련 단어가 도배하다시피 하고 페이스북 타임라인, 트위터 타임라인 등에서 완전 난리가 났으니까. 그때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제 각 언론사들마다 자료화면으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엄청 써 대겠군.”
아니나 다를까, 미디어에서는 <성균관 스캔들>의 캡처 화면이 계속 나왔다. 박유천은 일전에 그 드라마에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원칙을 지키고 임금을 향해서도 거침없이 쓴소리를 쏟아낸 ‘이선준 유생’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연기는 그저 연기다. 하지만 언론사들은 언제나 ‘이미지 낙차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례로 예전에 황수정 마약 사건 때도 그랬다. 사건 자체보다는 ‘청순한 예진 아씨가 어떻게?’ 식의 기사가 주를 이뤘다.
‘이미지 낙차’란?
우리나라 언론만 이런 것은 아니다. 1995년 ‘휴 그랜트 매춘 사건’이 터졌을 때 모든 영어권 언론이 일제히 반복해서 강조했던 게 바로 ‘우아하고 귀족적인 영국 영어를 쓰는 배우가 어떻게?’ 였다.
“나 참, 귀족적인 말을 쓰는 것과 사생활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라고 반문하고 싶기도 하나, 사실 충분히 상관있다. 실제로는 아무 상관 없는 별개의 문제지만, 이미지상으로는 아주 많은 상관이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본인들이 소비하고 싶은 스타의 ‘이미지’이지 팩트가 아니니까.
이미지 낙차가 클수록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거나 큰 감동을 받는다. 여기서 복면가왕 최고 화제의 인물인 ‘우리동네 음악대장’ 하현우를 한 번 살펴보자.
그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나도 이전에는 하현우가 누군지 몰랐다. 만약 조용필이나 이선희 등 대형 가수가 나왔더라면 9연승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9연승을 했더라도 이렇게까지 큰 화제성이 있진 않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감히 조용필이나 이선희의 내공을 논하자는 게 아니라, 너무나 유명한 가수들이기 때문에 예상외의 반전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하현우는 ‘무의 충격’과 ‘엄청난 실력’이 제대로 충돌해 무시무시한 파급 효과를 냈다.
이것은 갈등 관리 모델로도 잘 알려진 토마스 킬만 표다. 서로 다른, 혹은 상충하는 이미지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고전적인 모델이다. 설명을 더 해보자.
갈등 관리 모델의 예시
1. Collaborating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누나들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귀여운 미소년의 이미지와 거칠면서도 묵직한 상남자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영역에 있지만 <태양의 후예>에서 송중기는 collaborating을 이뤄냈다. 얼굴은 여전히 여리여리하고 아가 같은데 직업은 특전사 대위란다. 완벽한 collaborating의 전형이다.
신라호텔 이부진 사장이 직원들과 같이 족발집에서 회식을 했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별게 다 기사로 나온다고 눈살 찌푸린 사람들도 있었을 테지만 충분히 기사 가치가 있다. 이슬 한 방울도 프랑스제 커틀러리로 썰어 먹을 것 같은 재벌의 이미지와 신발을 벗고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소주와 함께 먹어야 제맛인 족발로 대변되는 서민의 이미지는 족보 자체가 다르니까 말이다.
2. Competing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가 충돌하지만,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경우다. 예를 들어, 돈을 너무 안 쓰는 구두쇠 이미지와 돈을 펑펑 쓰고 다니는 풍족하고 헤픈 이미지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만약 자기한텐 하나도 안 쓰면서 남을 돕는 일에는 앞장선다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는커녕 존경스러운 이미지가 생성된다.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성격과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성격 역시 상반되는 이미지이지만, 배우 김명민의 경우 본인의 연기에는 한없이 엄격한 반면 촬영장 스태프들한테는 무척 자상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김명민은 ‘명민좌’로 불리며 안티 세력도 별로 없다.
3. Avoiding
이건 최악의 경우다.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이미지가 충돌해서 부정적인 효과를 내는 경우인데 지금 박유천의 이미지가 딱 이 상황이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고 방송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잘 재단된 포장지 같은 것이지만 이렇게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사회나 소수다.
“아니,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그렇게 올곧고 원칙주의자였던 이선준 도령이 성폭행을, 그것도 화장실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박유천을 함부로 비난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맞지만, 법적 결과에 상관없이 박유천의 이미지는 이미 최악이다.
사실 착한 역할, 멋진 역할을 많이 맡을수록 이미지 리스크 또한 크다. 그리고 연예인 못지않게 종교인이나 교육인들도 같은 문제에 직면할 때가 많다. 아니 목사가 어떻게? 내지는 아니 학교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이미지 선입견’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직자든 교육자든, 직업적 윤리를 제외하면 그들이 특별히 더 거룩할 것이라는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4. Accommodating
나쁜 이미지이긴 하지만 설명이 가능하면 오히려 긍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 이병헌, 김구라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차갑고 막말을 내뱉는 독설가의 이미지는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으나 ‘난 원래 이렇다. 내가 언제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했나? 그런 건 유재석이나 하라고 해.’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면 이미지의 틈새 시장 또는 이미지의 블루 오션 창조가 가능하다.
영국의 대표적 록 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리암 갤러거 형제가 그랬다. 이 둘은 맨날 싸우고 맨날 서로 헐뜯고 비난하기 바쁘다. 팬들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런데 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우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폭력적인 성향이 있다, 형은 동생이 재수없고 동생은 형이 재수없다, 하지만 서로의 음악적 재능만큼은 인정한다.’ 라는 태도로 나왔다. 본인들이 그렇다고 인정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이해하기 쉽게 토마스 킬만 표 위에 각각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연예인들을 분류해 보았다. 사실 연예인, 유명인, 사회적 공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나름대로 이미지 낙차 관리를 하고 있다. 연애의 밀당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미지 낙차다.
고수들은 이미지 낙차 관리에 능하다. 반전 매력, 츤데레 캐릭터 등도 같은 말이다. 시종일관 계속 잘해주는 사람보다는 나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상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자상함은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이 배가된다.
반대로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너 왜 그래?’ 하고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이 욕을 먹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 경우는 억울하기 그지없다. 난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상대방의 이미지 틀 안에서 상대방이 멋대로 판단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혼자 무인도에서 사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난히 오해를 많이 받는다면 본인의 이미지 낙차 값이 Avoiding 안에 떨어지는 게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 낙차가 생긴다는 것은 욕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에겐 늘 서로 다른 욕망이 끊임없이 부딪친다. 예를 들어, 때론 청순하고 싶기도 하지만 때론 요부처럼 섹시하고 싶기도 한 게 인간의 마음이다. 무식할 정도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옛날 어머니들의 삶을 존경하면서도 그와 동일하게 세련되고 지적이고 현대적인 어머 상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존재한다. 프리랜서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면서도 불안한 건 싫고 조직의 비합리성을 비난하면서도 안정된 생활은 포기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어느 페친의 담벼락에서 “엄마도 섹시하면 안 되나? 엄마도 여자임을 주장하면 안 될까?” 라는 내용의 글을 보았다. 물론, 당연히 된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엄마 이전에 아가씨였고 그 이전에는 어린이였다. 엄마라는 역할을 맡기 전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지금은 거룩한 모성의 엄마이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내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선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하나의 인격체다.
그런데 우리는 한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역할이 요구되고 또한 여러 가지 욕망이 끊임없이 부딪치며 그에 따라 여러 가지 고민도 생성되고 분출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막장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고 코미디 프로에서 자주 패러디하는 대사 하나를 살펴보자.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충고한다.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그러면 상대방은 이렇게 응수한다.
“나다운 게 뭔데?”
그러게나 말이다. 세상에는 100% 이성적인 사람이란 없다. 마찬가지로 100% 감정적인 사람도 없다. 100% 내성적인 사람도 없으며 100% 외향적인 사람도 없다. 아무리 밝아 보이는 사람도 우울할 때가 있고 아무리 염세적인 사람도 삶의 기쁜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라는 말은 굉장히 무식한 말이다.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는 만물의 영장 인간을 단세포 원생동물처럼 생각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발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