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완주군 고산읍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평소 지방의 재래시장 다니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던 차에 고산 미소시장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다녀왔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소시장은 고산지역의 아름다움과 많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그다지 성공적인 장소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지역 개발에는 보편성과 지역성의 문제가 있습니다. 보편성의 문제란 더 많은 사람들을 그 지역에 불러오고 그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역성의 문제란, 보편성을 지향하면서도 단순히 보편성에 매달리기만 하면 그런 개발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보편성이 있지만 동시에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자기만의 지역성을 달성하지 못할 때 개발은 그저 ‘싸구려 짝퉁 만들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실패는 때로 아주 치명적이 되기 쉽습니다.
고산 미소시장의 실수들
지역개발의 일환으로 행해질 수 있는 지역 시장개발에 있어서 ‘보편성’이란 이런 것입니다.
“깨끗한 시장이 좋다. 또 요즘 체험하기가 인기가 좋다니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시장이 좋다. 그 시장에는 요즘 도시에 가면 많이 있는 카페도 있고 될 수 있으면 수제 버거 같은 도시의 먹거리도 있으면 좋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 좋다는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것들은 대개 대가를 요구하며 주어진 자원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서울과 전주에서 옳은 것이 고산에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깨끗한것도 체험위주로 꾸미는 것도 카페나 햄버거 가게를 만드는 것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뿐이라면 핵심이 없어집니다. 말하자면 짜장면이 그릇이 좋으면 좋지만 그릇만 좋고 짜장면 맛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산 미소시장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좋다는 말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사람들은 고산을 반복해서 찾지 않거나 광고성으로 글을 쓴 것같았습니다. 제가 가봤을 때 사람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거기서 일하시는 분의 말을 들어봐도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산 미소시장은 명백히 망해가고 있는 시장이었고 손님이 거의 없는 시장이었습니다.
고산 미소시장에 도착하면 처음 느끼는 것은 이름만 시장이지 마치 작은 고속도로 휴게실 같은 구조와 외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장이라고 하면 대개는 골목의 구조로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가게가 그 길의 양편으로 늘어서 있고, 사람들을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조금 더 가면 어떤 것이 있을까?”를 기대합니다. 또 어느 정도 이상의 가게 수를 가지고 다양성을 만족시킵니다.
그런데 고산 미소시장은 주차장에서 봤을 때 전체 가게들이 한꺼번에 다 보이는 구조입니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구조는 돈을 상당히 투자한 것 같은 깨끗한 모습들이나 조각상이나 무대장치에도 불구하고 겨우 ‘이게 다야?’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시장의 설계로 있을 수 없는 실수 입니다. 일본에 살 때 저는 여러 지역 상가를 둘러보았지만 이런 구조를 가진 곳은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백화점도, 시장도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게다가 고산에 사는 주민들은 도시의 백화점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것 같은 이런 모습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지만, 전주나 혹은 더 멀리 사는 도시민들을 부르겠다는 의도라면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도시 사람들이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는 이유는 그곳이 ‘자신들이 사는 곳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도시를 탈출했더니 어설픈 도시가 있더라는 식이어서는 답이 없습니다.
고산 지역이 디즈니랜드를 건설하는 것처럼 돈을 많이 들일 수는 없으니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흉내의 결과는 그저 어설픈 도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의 특색을 드러내지 않은 시장 개발이란 언뜻 보면 좋아 보이지만, “왜 거기에 가야 하나?”라는 질문 앞에서 답할 수 없게 만듭니다. 도시의 쇼핑몰이 훨씬 더 좋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 바로 요즘 전국 각지에서 인기를 얻는 5일 재래장들인데요.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둘러본 5일장들은 나름의 재미와 보람을 주고 있었습니다.
일단 지나치게 투자를 많이 하면 물건값이 쌀 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재래시장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다양한 물건과 싼 가격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실종된 인간적인 교류입니다. 마트 직원은 극단적으로 말해 기계나 자판기 같아서 요즘 맛있는 물고기가 뭔지, 제철 채소가 뭔지를 상담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은 소매상이지만 자기 가게의 주인들인 재래시장의 상인들과는 이런저런 책임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정도 가능하고 말입니다. “이 오이를 살 테니 상추는 끼워주세요”라던가 “요즘은 냉이가 좋다”라는 말따위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도시에서 얻기 힘든 것이 또 이런 인간적인 교류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은 깔끔함이 지나치면 오히려 줄어듭니다. 어수선한 가운데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고산이 5일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재래시장은 고산 미소시장과는 다른 장소에서 열린답니다. 그리고 고산 미소시장에서 한두 블록 걸어가면 상설 농산물시장 같은 곳이 또 있었습니다. 고산처럼 작은 동네의 자원을 이리저리 분산시켜 버리니, 그곳을 찾아간 사람들이 고산 미소시장에 가면 점심도 사 먹고 하루 서너 시간은 점심도 먹고 구경도 하면서 보낼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고산에 있는 수변공원이나 다른 가게들 그리고 주변의 그 아름다운 초록 풍경들이 다 소용이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걸 계획한 사람은 지역 개발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발전적 계승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제게는 고산 미소시장과 그 주변의 공원들이 작은 4대강 공사처럼 보이더군요.
지역개발의 기본적인 문제 : ‘왜 고산인지’ 생각해 봤는가
성공과 실패는 워낙 여러 가지 요소에 딸린 것입니다. 그래서 일률적으로 이게 좋다는 말은 당연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론은 있습니다.
일단은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산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 사람들이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스타 따위는 먹어본 적도 없는 노인들밖에 없는 마을에서 파스타 가게를 열면 자기 자신들도 먹지 않고 맛있는 파스타가 되기도 어려우니 그걸 먹겠다고 외지인이 먹으러 올 이유도 별로 없습니다. 노인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5일장 행사가 종종 경쟁력을 가지는 이유는 그런 과거 문화에 대해 노인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골이라고 해서 반드시 천편일률적으로 5일장같은 것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지역의 특성이 있으면 다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고산의 모습에서 ‘고산의 사람’은 별로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저 책상 앞에서 보편적으로 요즘은 이게 좋아 저게 좋아하고 기획하고 돈을 쓴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고산은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자연 속을 거닐고 싶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입니다. 하지만 자연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생태마을로 단장해서 마을 전체를 산책길로 가꾸고 기존에 있던 상가들을 단장하는 것으로 충분히 멋질 수 있는 곳인데 기존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곳에 놀이동산 비슷한 상가를 만든 듯한 것은 씁쓸함이 컸습니다.
그런 식이면 기존의 주민들은 그다지 그 개발의 수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농촌에 카지노가 들어오면 카지노 기술이 없는 기존 주민이 무슨 혜택을 받겠습니까. 비슷하게 개발하면서 기존 주민의 특징과 강점을 고민하지 않으면 개발이 설사 엄청난 투자로 성공하더라도 기존 주민에게 별로 혜택을 주지 않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지역개발의 첫 번째 조건은 지역 사람들이 공동체 정신 아래 모여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지역 주민들이 협동하고 단결하여 뭔가를 이뤄내려고 하며 서로를 아끼고 지역을 아끼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죠. 한탕 해서 떠나는 것이 소원인 사람만 우글대면 그런 개발은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공동체가 없다면 그런 공동체를 이뤄낼 지도자가 존재하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도 저도 없는 가운데 관공서의 누군가가 지역민과 동떨어져서 예산을 집행하고 개발을 추진한다면 개발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요.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