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흉가는 별 게 아니다.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으면 그 집은 흉가가 된다. 멀쩡히 도배 깔끔하게 해 놓고 비워 놓은 집에 며칠만에 갔더니 에어컨 배관 구멍으로 새가 들어와 새똥을 갈기고 간 걸 보았다. 사람 손을 안 타면 그렇게 집이 망가진다. 거미가 줄을 치고 벌레가 모여들고 쥐들도 대담해진다. 그러다보면 흉가가 되는 것이다.
흉가가 되면 가끔 사람들이 온다. 흉가 구경한다고. 경향 각지에는 의외로 흉가들이 많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흉가도 하나 둘이 아니다. 나도 촬영차 그 몇 군데를 돌아 본 적이 있는데, 그 중의 한 곳이 경북 영덕 장사 해수욕장 근처의 흉가였다.
2.
네비게이션이 없을 때라 인근에서 물어 물어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인근 영덕 군민들은 열이면 열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 집에 뭐한다고 가니껴?” 다들 이상한 듯 쳐다보면서.
우리가 찾은 흉가는 ‘언덕 위의 하연 집’ 같은 전망좋은 위치에 있었다. 원래는 횟집으로 지어진 듯, 허물어진 수족관 흔적이 보였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은 귀신쫓는다는 팥죽 자욱이 선연한 가운데 깨진 유리창과 산더미같은 쓰레기,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괴기한 분위기로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좀 낭패가 난 것이, 1층에는 깔끔하게 수리된 방에 사람이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의 계시로 보따리 싸서 이 집에 들어왔다는, 무속인인 듯 보이나 완강히 그 호칭을 거부하며 ‘불자’를 자처하는 부부였다.
“이 집에 들어와서 제가 보름 전에 전기를 넣었어요. 그런데 전기공 하는 얘기가 이 집은 12년 동안 전기가 끊겨 있었대요.” 그러니까 사람의 발길이 끊긴 것이 12년은 족히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다음 나오는 질문. “왜 그렇게 인적이 끊겼을까? 당신은 무섭지 않은가? 여기서 귀신 본 적은 없나?” 그 말을 듣고서 불자 부부 중 아내가 담담하게 하는 이야기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지금 선생님 눈에는 아무 것도 안보이지요? 하지만 지금 이 집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우리랑 함께 있어요. 저는 부처님 원력 의지하니까 괜찮지만 보통 사람들한테는 이 집이 끔찍한 집이지요. 내가 왜 사람이라고 하냐면, 정말 사람처럼 이 집을 들락거려요. 수십 명 수백 명이…”
3.
불자는 귀신들이 매우 ‘착하다’고 했다.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떼로 뭉쳐 다니는 ‘떼귀신’들이긴 하지만 해꼬지한 적은 없고 유순하다고 했다. 그들은 누구일까.
이 궁금증에는 마을 사람들이 더 그럴 듯한 대답을 주었다.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양동작전, 즉 진짜 작전을 적에게 숨기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몇 군데 해안 지역에 상륙작전이 펼쳐진 적이 있다고 했다. 문제의 흉가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사 해수욕장이 그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그 LST에 탄 거는 국군이 아이라 학도병이었다카대. 훈련도 안받은 그 어린 아~~들이 상륙을 하다가 인민군들한테 몰살을 당했다 카더라고. 그 학도병들을 떼로 묻은 기 그 집 터라 카대. 그 언덕 전체가 묘지였다카거덩. 공사한다고 땅 팔 때 유골이 많이 나왔다 카더라고…”
서늘해지는 등골을 감싸안으면서 분위기를 돌려 보려고 옆에 있던 대학생 체험단의 리더격인 학생에게 물어 보았다. 아주 냉철한 듯한 어투로 . “넌 귀신 같은 거 믿냐?” 그러자 그 학생은 제 속을 들여다보듯이 말을 되받았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유가 있으니 결과가 생기겠죠.”
“이유?”
“PD님은 그 학도병들이 귀신이 될 것 같지 않아요? 억울해서라도?”
“……”
“산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귀신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요.”
“……..”
4.
작년 23일 아침, 신문에 정일권 당시 육군 참모총장의 작전명령서가 복원됐다는 기사가 떴다. 흠칫 놀랐던 것은 이 명령서에 바로 이 장사 상륙작전이 등장한 탓이었다. 육군 작전 명령 제 174호였다. “육본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상륙 감행시켜동대산(東大山/포항북부 소재)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 제1군단의 작전을 유리케 하라”는 당시 정일권 참모총장의 친필명령서이다.
놀라운 건 군사편찬위 양영조 군사연구부장의 말이다. “당시 투입된 학도병을 언급한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공식 문건이다.” 즉,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돼 죽어간 학도병들은 그때까지 ‘비공식’ 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꿈도 많고 열기도 넘치고 하고픈 것도 허다했던 그 반짝이는 나이에 피를 토하며 죽어가면서 그들은 공식적인 전사자 취급도 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학도병들은 무려 10시간의 사투 끝에 장사 해수욕장 근처 200고지(언덕 위의 흉가에서 내다보이는 그 산인 것 같다)를 점거하고 1주일을 버텼다. 퇴각을 위해 LST가 왔지만 밧줄에 매달려 철수 작전을 벌이던 중 인민군의 박격포가 집중되자 LST 함장이 밧줄을 끊어 버렸다. 해변에는 수십 명의 학도병이 남아 울부짖었다고 했다.
가까스로 배에 올라탄 학도병들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그들을 향해 인민군이 새까맣게 죄어들어오는 모습이었다. 700여 명이 상륙했지만 몇 명이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부산으로 귀환했을 때 신성모 국방 장관이 엉겁결에 내뱉은 말을 학도병들은 평생 잊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들 어떻게 살아왔니?”
물론 반가움이 극에 달하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신성모의 캐릭터를 아는 이로서 저 말이 그리 살갑지는 않다.
5.
누렇게 떠 버린 종이와 희미한 글씨 사이에서 언덕 위의 하얀 집을 떠올린다. 그 집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우물물을 퍼먹고 노래도 부르고 발도 구르고 가끔 쌈박질도 했다는 ‘떼귀신’들의 명복을 빈다.
이제는 정말 평화 속에 쉬시기를,
만약에 또 한 번 그대들처럼 불행한 소년들이 또 나올라치면
다시금 몰려나와 위정자들의 꿈 속에서 악다구니 쳐 주시기를.
“이 개새끼들아, 또 우리 같은 귀신 만들 참이냐 ”하면서.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