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 길지 않은 연구자 이력 거치는 동안, 중도에 공부 관두는 분들 참 여럿 봤습니다. 석사 논문도 못(안) 쓰고 탈주/해방/도망/포기한 친구, 제자, 선·후배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얼굴들이 수없이 막 떠오르고… (어디서 뭣들 하시는지). 앞으로도 많겠지요. 또 기껏 힘들여 석사·박사수료 다 해 놓고도 박사 논문을 포기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지요. 더 복잡한 이유를 지닌 또 다른 얼굴들이 몇 떠오르고…
이놈의 길이 어렵기 때문이겠지요. 공부하는 데 따르는 ‘기본적’ 고통에다, 오늘날 인문·사회계 대학원생의 가난을 고려하면요. 일부 대학원에서의 불합리한 관행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말입니다.
2.
누구나 연구자가 돼야 할 것도 아니고 될 필요도 없습니다. 적성에 안 맞으면 못하는 거고 안 하면 됩니다. 다른 좋은 일 많… 이렇게 쓰기는 어렵네요. 이 헬-저임금-차별 사회에서.
아무튼 오늘날 한국에서 인문학 학위 해서 빛 안 나고, 돈은 물론 안 되는 건 다 압니다. 평생 적절한 사회적·경제적 보상은커녕, 괄시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인문학의 보람’이나 ‘공부의 마력’ 때문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은 청춘들은 늘 있어요. 때로는 말리고 싶지요. 판타지는 없어야 되니까요.
그런데, (인문학) 연구자의 ‘적성’이란 도대체 뭘까요?
3.
처음부터 주어진 적성은 없다고 봅니다만 당연, 공부와 글쓰기(!)를 좋아해야죠.
그리고 1)세상과 인간과 이론에 대한 관심, 이게 중요한데, 사실은 글쎄 그보다는… 쇄말적인 것, 오래된 것, 스러져 간 것들, 그래서 왠지 웅숭깊어 뵈는 것들에 대한 오타쿠적인 관심도 존중받지요. 오히려 이런 걸 진짜 ‘학(學)’이라 간주하는 경향도 있어요.
그 다음이 2)논리와 문어의 구성 능력 따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 하다 보면 저절로 늡니다. 두뇌의 특성에 따라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성에 맞고 좋은 지도를 받으면 금방 그 분야의 언어와 논리의 매트릭스를 익힐 수 있죠. ‘문리(文理)’란 물론 오랜 내공이지만, 집중적으로 고생하는 논문 집필·심사 과정 몇 달 사이에 확 터지기도 하던데요. 여럿 봤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석사 논문이란 얼마나 쉬운 거냐고 늘 주장하는데…)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은, 3)남들에게 자기 글과 내면·수준을 보여주고 그게 졸라 쪽팔려도 견딜 수 있는 ‘적당한’ 자의식입니다. 너무 여리거나 유치한(주로 석사), 또는 지나친 완벽주의(주로 박사)는 학위 못 하게 만듭니다. 잘못하면 마음의 병만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도 훈련에 따라 좋아질 수 있습니다.
인문학 하는 이들이 대개 소심하지 않습니까? 거의 누구나 일종의 반복·경험을 통한 심리·인지치유-훈습 같은 과정을 밟는 거겠지요. 자기 글이 주는 만족과 쪽팔림의 롤러코스트 때문에 반복되는 ‘조울’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경력이 오래된 연구자들도 그렇습니다. 결국, 외로움을 견디면서도 같이 공부/소통하는 능력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위에 쓴 것과 반대로, 또는 1에 해당하다가 남들보다 훨씬 오래 걸려 거북이 스타일로, 또는 개인적인 상황이나 경제적 문제 때문에 다른 일을 하다가 늦게,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면서, 또는 어려운 조건 혹은 가난과 싸워가면서, 그야말로 눈물 나는 노력으로 해내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적지 않겠지요.
4.
사정이 어려워 그만둬야겠다는 어느 친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프네요. 또 석박 논문 심사 시즌 막바지라, 새삼 생각도 복잡하고요.
모쪼록 인문학(일부 사회과학 포함) 대학원 공부 여전히 하고 있는 사람들은 힘내고, 안 하고 있는(싶은) 사람들도 기죽지 말고, 또 괜히 자기나 인문학 미워하지 말라는 뜻에서, 또 인문학 하는 사람들끼리 아껴줘야 한다는 것도 다시 상기하면서 글을 줄입니다.
원문: 천정환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