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라티우스는 벽에 걸려있던 세 자루의 보검을 내렸다. 로마의 적 알바롱가 왕국과 싸울 아들들을 위해서였다. 갑옷으로 무장한 삼형제가 호라티우스 앞에 섰다. 집안의 여인들은 서로에게 기댄 채 흐느끼고 있었다. 호라티우스는 아들들에게 검을 건넸다. 삼형제는 오른손 주먹을 왼쪽 가슴에 가볍게 대었다가 손을 펴며 팔을 뻗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아버지를 향한 인사였다.”
명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 대한 묘사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실물을 본 적이 있는데 삼형제가 로마식 경례를 하는 모습에서 강렬한 결의와 충성을 느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모양이다. 로마제국의 부활을 약속했던 그는 자국 내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하는 데 효과적인 자극제가 필요했다.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경례 방식을 이탈리아군에 들여왔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자긍심에 고취되었고 국민들은 이탈리아가 다시 로마제국이 된 것처럼 열광했다. 히틀러도 이것이 인상적이었던지 로마식 경례를 본떠 나치식 경례를 만들었다. 독일이 과거 신성로마제국이어서였을까? 나치식 경례는 독일에서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나치 패망 후 70여 년이 지난 2016년 3월 28일. 벨기에 브뤼셀 광장에 난데없이 나치식 경례가 등장했다. IS 테러 희생자를 주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사이에 스킨헤드족이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에게 이미 패망한 나치 독일의 경례를 하게 만든 것일까?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Maslow)는 ‘욕구 단계설’에서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소속 욕구를 제시했다. 인간은 1단계 생리 욕구 2단계 안전 욕구가 해결되면 3단계인 소속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 소속 욕구는 단순하게 어느 집단의 명단에 이름이 추가되는 것 따위로 해결되지 않는다. 집단에는 집단을 대표하는 정체성이 있다. 어느 집단에 소속된다는 것은 집단의 정체성에 공감하고 동화되는 것이다. 이것을 만족하였을 때 인간은 소속감을 느끼며 욕구를 충족하게 된다.
집단의 정체성에 동화된 사람은 자신의 소속감을 표출하고 싶어 한다. 소속감의 표출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심벌이다. 해적은 해골 모양의 깃발로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기업의 CI나 브랜드 로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애플 마니아는 아이폰이나 맥북을 사용할 때 드러나는 애플 로고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자부심은 애플의 정체성에 대한 공감을 근간으로 한다. 집단의 정체성이 매력적일 때 집단의 심벌은 추종자들에 의해 표출되면서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간다. 추종자는 심벌을 소유하고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심벌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강한 전파력을 가진 것이 있다. 나치식 경례 같은 <아이덴티티 제스처(Identity Gesture, IG)>가 바로 그것이다.
심벌은 인쇄물이나 깃발같이 디자인된 실체가 필요하다. 반면 IG는 신체만 온전하다면 언제든지 바로 표출할 수 있는 즉시성을 가지고 있다. IG는 집단의 정체성에 생명을 불어넣고 스스로 움직이며 확장하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스킨헤드족이 나치식 경례를 하면 나치의 정체성은 되살아나고 추종자들의 소속감이 충족된다. 그들이 인사를 나눌 때마다 나치의 민족우월주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전파된다. 이러한 즉시성과 반복성은 IG가 심벌보다 우월한 전염력을 가지게 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나치식 경례같이 사악한 것만 IG가 되는 것은 아니다. IG는 기업이나 제품의 브랜드를 알리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티핑 포인트>에서 티핑 포인트(어떤 상품이나 아이디어가 갑자기 기존의 상태를 깨고 폭발적으로 전파되는 극적인 순간)를 발생시키는 조건으로 ‘고착성’을 설명한 바 있다. 고착성은 말 그대로 굳게 들러붙어서 변하지 않는 성질을 의미한다. 전파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쉽게 기억되고 잊히지 않게 만드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간결한 메시지를 반복해야 하고 고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갑작스럽지만 지금 당장 “무한!”이라고 외쳐보자. 만일 당신이 “도전!”이라는 외침과 장풍 제스처를 떠올렸다면 IG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몸소 체험한 것이다. <드래곤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이 에네르기파(카메하메하)를 떠올렸을 것이다. 에네르기파는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기술이다. 드래곤볼을 못 본 사람은 있어도 드래곤볼을 보고 에네르기파를 흉내 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드래곤볼 팬이 만든 에네르기파(카메하메하) 영상
에네르기파를 흉내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드래곤볼에 나타난 손오공의 의협심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에네르기파를 쏘는 순간 손오공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드래곤볼의 팬들은 에네르기파를 흉내 내며 수없이 많은 패러디 창작물을 쏟아낸다. 에네르기파가 드래곤볼 브랜드에 대해 바이럴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한자씩 천천히 외치며 기를 모으고 발사하는 에네르기파는 간결한 메시지면서도 정의, 희망, 권선징악 등과 같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에네르기파를 흉내 내며 손오공과 한몸이 되는 체험은 일체감과 함께 드래곤볼 브랜드에 대한 강력한 고착력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IG에 의해 고착력을 가진 브랜드는 단어의 의미에 걸맞게 오랜 기간 기억된다. 드래곤볼은 32년이 지난 지금까지 애니메이션과 게임으로 제작되고 있고, 무한도전은 10년 이상 장수하고 있다. 최근 무한도전이 장풍 제스처를 하지 않고 있는데 브랜드 파워를 생각한다면 좋은 일이 아니다. 이것이 장기화되면 프로그램 수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콘텐츠 산업은 제품 자체가 이야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IG를 만들어내고 확산시키기 용이하다. 하지만 IG가 콘텐츠 산업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IG는 마치 인사처럼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을 하기로 한 집단의 약속이기 때문에 제품이나 서비스의 팬덤(Fandom)에서 이 약속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다면 IG로 브랜드의 고착력을 강화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한국의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인증>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증은 내가 업로드한 사진이 퍼오거나 조작한 것이 아니라 직접 촬영한 것임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보편적으로는 사진을 찍을 때 종이에 닉네임을 적어서 함께 찍는 방식을 취하지만, 타 커뮤니티와 차별되는 특이한 방식으로 인증하는 커뮤니티가 있다.
<일간베스트>는 이름의 첫 모음 ㅇ과 ㅂ을 본뜬 손 모양을 만들어서 인증한다. 일명 <일베 손 인증>이다. 2013년 일베 회원 중 하나가 재미 삼아 만든 일베 손 인증은 순식간에 크게 확산되어서 일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IG가 되었다. 최근에는 일베 회원이 운영하는 가게임을 나타낼 목적으로 인터넷 배너 광고에 일베 손 인증 마크가 등장할 만큼 그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홍대 조형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베 손 인증
일베의 IG에는 지역주의, 반 노무현, 여성 혐오의 정체성이 담겨있다. 일베의 IG인 손 인증은 일베에 대한 자부심의 표출이며, 자부심의 근간은 일베의 정체성에 있다. 일베 회원들이 커뮤니티 게시판에 인증 글을 올릴 때마다 일베의 IG는 반복되어 행해지고 그들은 그 행위에서 지속적으로 소속 욕구를 충족하게 된다. 일베의 IG가 지속되는 한, 나치의 예와 마찬가지로 일베는 바퀴벌레와 같은 질긴 생명력을 유지할 것이다.
지금까지 IG의 여러 가지 예를 들었는데 이 외에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IG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브랜드가 더욱 오래 지속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브랜드 스토리나 콘텐츠 혹은 팬덤 속에서 IG를 만들어 보기를 권한다. IG는 간결한 메시지로써 고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스스로 확산되는 훌륭한 마케팅 도구가 될 것이다.
원문: 여현준의 Bru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