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트럼프는 워싱턴포스트로부터 자신의 캠페인을 취재할 수 있는 기자 출입증을 빼앗았다. 자신이 하는 말을 왜곡하거나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지어내서 공격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하나의 기사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소유주가 된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와는 벌써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렇게 출입증을 빼앗긴, 혹은 빼앗겼던 언론사도 포스트가 처음이 아니다.
사실상 미국의 메이저 언론사들은 트럼프에 대해 내놓고 적대적이다. 신문, 방송사는 여성이나 이민자 문제 등 미국사회에서 민감하게 생각하는 이슈들에 대해 공인으로서 하기 힘든 말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호의적인 기사는 내기 쉽지 않고, 거기에 기존 언론사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하면 (가령, 대표적인 보수 매체 폭스뉴스는 경선 내내 트럼프에 적대적이었다) 정치적 아웃사이더인 트럼프가 자신이 언론보도에서 차별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트럼프는 자신의 진지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가장 힘든 정치인이 되었다. (물론 그 차별을 누가 초래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후보가 한 자극적인 막말과 진지한 정책 중에서 신문사가 어느 쪽을 더 크게 보도할지를 트럼프가 모를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거래의 기술>은 그런 트럼프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다. 즉, 트럼프가 말하는 트럼프가 바로 이 책이다.
30년을 해온 플레이
하지만 착각하지 말 것은, 이 책은 미국 정치인들이 출마 전에 의례적으로 한 권 내는 “출마용 자서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바마의 <희망의 대담함 Audacity of Hope>이나, 조지 W. 부시의 <A Charge to Keep>, 힐러리 클린턴의 <Hard Choices> 같은 책들이 그런 책이고, 그런 책들은 나름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트럼프의 책은 그렇지 않다. (참고로, 한국과 달리 미국의 대선후보들의 그런 책들은 출판기념회를 통한 모금활동에 사용하기 위해 내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는 후보들이 연설회를 통해 돈을 모은다).
<거래의 기술>은 트럼프가 대통령은 꿈도 꾸지 않았을 1987년에 나온 책이고, 나오자마자 인기를 끌면서 지금의 트럼프의 이미지를 만든 책이다.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 Mein Kampf>에 해당하는 트럼프의 책이 <거래의 기술>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책에는 정치적인 주장도 야심도 없다. 1980년대의 트럼프는 오로지 돈을 벌고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관심이 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관심사를 하나 더 꼽자면 바로 ‘대중의 관심 끌기’이다. 물론 그 점에서는 히틀러의 책과 비슷하겠지만, 그건 모든 정치인의 관심사이고 트럼프의 “장래의 희망”을 굳이 이 책에서 찾자면 바로 그런 대중의 관심을 아주 좋아했다는 사실 정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미 1980년대에 그 연습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원래 소질이 있던 인물이 대중 다루기와 언론 플레이를 30년 넘게, 그것도 미국 미디어의 한복판인 뉴욕에서 해왔다는 사실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트럼프의 중요한 경력이자 자산이다.
대선후보의 싹수 찾기
이 책을 읽으면서 30년 전의 트럼프의 말에서 지금의 트럼프의 모습, 혹은 “싹수”를 찾게 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2016년의 안경을 끼고 1987년의 책을 보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고, 그래서 나는 애써 그걸 피하면서 <거래의 기술>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하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모든 기술은 이미 30년 전에 마스터한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책에 등장한다. 특히 그가 자신의 “사업 스타일” 11가지를 설명하는 2장은 과연 경쟁후보들이 얼마나 자세하게 읽었는지 궁금할 만큼 지난 몇 개월 동안 경선에서 보여준 트럼프의 전략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언론을 이용하라’는 항목을 보자.
언론은 항상 좋은 기삿거리에 굶주려 있고, 소재가 좋을수록 대서특필하게 된다는 속성을 나는 경험을 통해 배웠다. (중략) 언론이 항상 나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떤 때는 긍정적인 기사를 쓰지만 어떤 경우에는 헐뜯는 기사가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순전히 사업적인 관점에서 보면, 기사가 나가면 항상 손해보다는 이익이 많기 마련이다. (p. 82)
트럼프는 <뉴욕타임스>라는 신문을 콕 집어서 예로 들면서 “흥미로운 것은, 개인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는 비판적인 기사일지라도 사업적인 측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고 쓰고 있다. 1987년에.
위의 인용문에서 ‘사업’을 ‘정치’로 바꾼 것뿐 트럼프는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종종 미국의 메이저 언론사들을 향해 ‘너희들 무슨 수작하는지 다 안다’고 할 때 그는 정말로 다 안다고 봐도 된다. 같은 게임을 같은 장소에서 30년을 하면 아무리 눈치가 느린 사람이라도 마스터가 될 수 밖에 없다.
진실게임
정치인이나 그 어떤 사람이 쓴 책이라도 자서전, 혹은 (미니 자서전 격인) 회고록(memoir)이라면 자신에 대한 호의적인 편견이 가득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읽어야 한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실제보다 크게, 주위의 사람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실제보다 작게 묘사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작업은 자서전을 쓰기 전에도 누구의 머릿속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그것을 감안하고 본다고 했을 때 미국 언론과 <거래의 기술>은 흥미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2016 미국 대선 업데이트’ 페이지를 운영하느라 읽고 듣는 미국의 주류 언론에 등장하는 트럼프는 <거래의 기술>에 등장하는 트럼프와 많이 다르다.
하지만 “트럼프가 부풀렸겠지”라고 쉽게 단정하기는 힘들다. 가령, 주류 언론의 보도 만을 들으면 트럼프의 아버지는 이미 부동산 재벌이었고, 아들인 트럼프는 그런 아버지의 돈을 받아 뉴욕에서 쉽게 돈을 번, (그가 주장하는) 자수성가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거래의 기술>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 트럼프가 말하는 자기 아버지는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가지 못하고 일찌감치 사업에 뛰어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저렴한 집을 짓는 소규모 부동산업자였다. 도널드 트럼프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집집마다 월세를 받으러 다니면서 부동산을 배웠고, 그런 일로는 큰돈을 벌기 힘들다는 판단에 맨하탄에 진출해서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건물을 짓기로 하고 20대의 나이에 배짱 하나로 뉴욕의 대규모 부동산업자들과 정면대결을 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국 주류 언론들이 칠하는 “아버지의 돈으로 쉽게 돈 번” 사람만은 아닌 것 같다. 즉, 남들보다는 쉽게 벌었지만,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 순서를 따지면 언론의 그런 보도는 <거래의 기술>에 대한 대응이다. 즉, 이 책이 주장하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는 모른다. 결국에 가서는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는 <라쇼몽>이 되더라도, 한쪽만을 믿기로 애초부터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는, 비록 혼돈에 가까워도 많은 주장을 함께 듣는 것이 진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법이다.
New York, New York, U.S.A.
이 책의 한국판 표지는 흥미롭다. 1980년대에 큰 화제를 모았던 아티스트 바바라 크루거의 그래픽 작업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모로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1987) 같은 작품으로 1980년대 호황기의 미국 상업문화를 이야기했던 크루거의 시각언어는 이 책에 잘 맞는다. <거래의 기술>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트럼프가 “나는 이렇게 부동산 거래를 한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책이고, 이 책의 절반 이상은 그런 거래가 진행된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다. 2016년의 트럼프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전반부가 더 끌릴 것이고, 사람들에 따라서는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뉴욕의 과거 즉, 트럼프가 사업가로서 성장하던 1970, 80년대 뉴욕의 부동산 시장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거래가 더 재미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묘사하는 뉴욕은 젊은 독자들에게는 낯설다. 가령 이런 대목이 그렇다.
나는 원래가 낙천주의자인 데다가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당시 뉴욕 시가 안고 있는 문젯거리를 오히려 좋은 기회로 보고 있었다. 나는 퀸스에서 자랐기 때문에 맨해튼이 항상 살기에 가장 좋은 곳, 또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을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믿고 있었다.
1946년생인 트럼프가 자라던 시절의 뉴욕은 지금처럼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낙천주의”적인 전망대로 뉴욕은 그 후로 세상의 중심이 되었고, 한 때 정비되지 않은 끔찍한 슬럼과 마약상으로 가득했던 그 도시가 황금빛의 화려한 도시로 성장하던 시기는 트럼프가 뉴욕의 대표적인 부동산업자로 성장하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스토리에 따르면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에게도) 그의 “비전”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는 그런 비전을 뉴욕이라는 하나의 도시를 넘어 미국에도 품고 있는 것이다. 즉, 트럼프는 그런 “꿈팔이”를 하고 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라)”는 트럼프의 슬로건은 바로 그런 꿈을 팔기 위한 광고문구이지만, 사실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에 대선 캠페인 슬로건으로 사용한 것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트럼프가 뉴욕의 부동산업자로 성공해서 당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게 된 이 책 <거래의 기술>을 쓰게 해준 그 시기가 레이건의 재임 기간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트럼프가 왜 레이건의 슬로건을 재활용하기로 했는지 잘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대선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작년 여름만 해도 뉴욕타임즈의 데이빗 브룩스는 “트럼프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다. 다른 어젠다가 있다”고 단언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말이 되었다). 그의 말대로 80년대 미국의 힘을 되찾으려는 것일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트럼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무슨 일을 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가 하는 말은 그런 우려가 현실적인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진정한 재미는 게임을 한다는 사실이다. (…)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사업들을 하나로 묶으면 어떤 모습이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별 신통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을 성사시키도록 도와준 알맞은 순간들을 포착했을 뿐이니까. (p. 89)
이제 트럼프는 그런 한쪽의 우려와 다른 쪽의 큰 기대를 안고 힐러리 클린턴과 대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는 11월의 대선에서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트럼프의 스토리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