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국민, 2등 국민>은 조선일보 송희영 논설위원의 글이다.
이 글은 우리나라가 1등 국민과 2등 국민으로 나뉘어 있음을 지적한다. 1등 국민은 거대조직의 도움을 받는다. 협회, 노조, 조합의 도움을 받는다. 반면 2등 국민은 그런 도움을 일체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송희영 논설위원과 같은 취지로 주진형 대표는 평소 한국사회가 ‘원청’과 ‘하청’으로 양극화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송희영 논설위원과 주진형 대표의 진단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한국사회는 ‘1등 국민’에 속해있는 자본/노동이 있고, ‘2등 국민’에 속해있는 자본/노동이 있는 셈이다. 혹은 ‘원청 자본/노동’과 ‘하청 자본/노동’의 대립관계가 존재한다.
근데, 문득 의문이 든다. 그럼 도대체 이러한 원청/하청, 혹은 1등/2등의 모순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이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최근에 생긴 것인지를 제대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순의 구조를 밝히고, 실타래를 풀어서 해법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일종의 <동태적 접근>이 필요한 셈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재벌의 낙수효과>가 멈춘 것이 갈등이 증폭하게 된 핵심 원인이다.
낙수효과가 그친 후
1970년대 박정희가 방위산업 육성을 이유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게 된다. 한국 재벌의 성장은 냉전적 체제대결 상황에서 ‘전시에는 방위산업, 평시에는 중화학공업’의 캐치프레이즈 하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적인 성장을 한다.
재벌의 성장-중화학공업-낙수효과는 90년대 중반까지도 같은 맥락을 갖게 된다. 1997년 IMF로 일시적인 위기를 맞지만, 외환위기는 생산-제조업 분야에서의 위기라기보다는 ‘금융-외환적’ 요인이 컸다고 봐야 한다. (크게 보면, 1997년의 IMF 구제금융은 ‘준비되지 않은’ 외환-금융 자유화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재벌-중화학공업은 계속 성장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는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마치 존 롤즈의 정의론에 나오는 것처럼, 낙수효과가 작동되었기에 ‘최소 수혜자’의 입장에서는 임금 격차가 조금씩 커져도 감당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벌어졌던 1997년 IMF 구제금융의 충격과 별개로, 2000년대 즈음부터 세계 경제 전체가 일대 변혁을 맞이하게 된다. 인터넷, 자동화, 세계화, 제조업의 첨단화, 브릭스의 부상, 중국과 인도의 부상 등이 진행된다. 세계경제 전체가 고도화되는 반면, 한국은 어정쩡한 수준에 끼여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일부 회사들은 그나마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했지만…
한국의 경제발전은 관료가 주도한 계획경제였다. 방위산업의 일환으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당시 국가의 자본이 부족했기에 불가피하게 재벌을 방위산업(중화학공업) 육성의 하위 파트너로 삼게 된다. 당시의 경제성장은 냉전 상황 속에서 북한과의 체제대결의 연장이었다. 마치 북한의 천리마 운동처럼 남한도 ‘속도전’이 중요했다.
- 아주 오래된 중앙집중 권력의 특징
- 북한과의 체제대결을 위한 속도전의 필요성
- 모방중심 수출주도 공업화 전략
- 국가와 민간의 자본은 빈약한 상태… 등이 맞물려서,
- 고시-행시-사시-임용고시 등 각종 자격증 시험으로 상징되는 (의도적으로 특권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인재육성 전략’을 취하게 된다.
결국, 좋은 일자리는 법조인-공무원-교사-의사가 대부분이었고, 90년대가 되면서 재벌의 계열사들 언저리에 있는 일자리도 좋은 일자리에 속하게 된다. 그 밖의 경제주체들은 경제성장에서 파생되는 (부동산값 상승, 소비 활성화 등의) ‘낙수효과’로 인해 소득증대 혜택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박정희식 경제성장 전략 덕택에 우리는 <압축적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낙수 효과>가 멈추게 되자, 박정희 시스템의 모든 장점은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속도전의 필요성 때문에 불가피했던 인재육성 전략은 정확히 ‘지대’(Rent)로 작동하게 된다. 투자회수기간이 길어서 재벌을 방위산업(중화학공업)에 합류하도록 유인하기 위해 제공하던 각종 ‘독과점적 특혜’ 역시도 ‘지대’(Rent)로 작용하게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인재육성에 대한 특혜는 자격증 시험 형태로 지대(rent)가 작동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 가장 우수한 엘리트 인적 자원들이 생산, 혁신, 경쟁촉진의 선구자가 아니라 오랜 고시낭인 생활 이후 ‘지대에 안주하는’ 선봉에 서게 되었다. 또한, 후자에 해당하는 재벌에게 제공되던 특혜는 독과점적 산업구조로 작동해서 경쟁촉진을 저해하고 질식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정부는 양극화를 조장하지 않는다, 대책이 없을 뿐
90년대 중후반을 넘어가면 양극화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다만 당시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는 군부독재의 잔재와 싸우던 민주화 확장기였기에 양극화는 덜 주목받았다. 양극화에 대한 본격적인 주목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하게 된 셈이다.
상황을 조금 더 냉정하게 돌이켜본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중에서 ‘양극화를 조장한’ 정부는 없다고 봐야 한다.
김영삼 정부는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을 통해 나름대로 구체제와 싸우기 위한 고군분투를 했고, 김대중 정부도 나름대로 국민기초생활 보장법, 고용보험제도 도입 등을 통해 고군분투를 했다. 그에 비하면 노무현 정부는 뭔가 시끌벅적했으나 제도적인 성과와 업적에서는 초라한 편이었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좀 다르다. 이명박 정부는 실제로 양극화를 조장한 측면이 있다. 왜? 가장 중요하게는 (부자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대규모 감세조치를 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도 양극화를 조장했다고 평가하긴 무리가 있다. 증세의 정치적 부담과 이미지는 최대한 피하면서 야금야금 ‘우회적인’ 증세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통적인 과오가 있는데, 그것은 과거에는 순기능으로 작동하던 <박정희식 경제발전 체제>가 고령화-세계화-산업구조의 고도화 및 첨단화-세계 경제의 변화 등과 맞물려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크게 작용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과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흔히 비정규직 중심으로 일자리가 늘어나면 <질 좋은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질 좋은 일자리>는 ‘원래부터’ 재벌-공공부문-(자격증 시험과 연동된) 전문직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은 심지어 1970년대까지도 자본주의라고 하기에는 매우 민망한 ‘농업경제’에 가까운 나라였다.
(*80년대 소위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 어쩌구 하는 PD강단 좌파들의 분석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엉터리들이었다.)
관료주도 계획경제와 재벌의 연합에 기반을 뒀던 낙수효과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고령화는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관치의 전통이 있기에 국가는 여전히 재벌에게 강했지만, (퇴직후 노후불안에 노출된) ‘개인으로서의 관료’는 자본에 취약해졌다.
자본에 포획된 관료는, ‘포획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다시 관치와 규제권력을 선호하며 강화할 유인을 하게 된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인데, 왜냐하면 관치경제의 애초 발생원인이었던 <‘계획경제’가 사라진 이후의 관치>이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의 본질은, <규제권력을 활용한+포획의 몸값 극대화를 위한+생계형 관치>이다.
이러한 모든 현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박정희 체제’를 대체하는 성장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제주체가 <기존의 체제에서 ‘잇속 챙기기’>에 나서게 된 것이다. 개별 행위자들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불합리한 선택이 이뤄지는,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양대 주역이었던 공무원(공공) 부문과 재벌들에 속하는 자본과 노동은 서로 경쟁적으로 참호를 쌓고, 세계화-첨단화-고령화 위협에 맞서 잇속 챙기기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 행위는 별도의 플랜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박정희 때 하던 대로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주 조용하게 조금씩 조금씩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가 공공부문-재벌-대기업의 참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그나마 원래 그렇게 살던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저학력자가 대부분이어서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체념하며 살아가면 되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민주화된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래서 평생 최루탄 한번 구경해 본 적이 없는, 게다가 고생 고생해서 비싼 학원비 써가며 좋은 스펙을 쌓고, 고학력과 영어로 무장한 2030세대에게 이러한 대한민국은 이해 불가의 세계였다. 그게 바로 힐링, <안녕하세요> 열풍, 안철수 현상, 헬조선, 각종 수저론 등이 등장하게 되는 본질이다.
우리가 무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대안의 본질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드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박정희 체제를 대체하는, 21세기 버전의 새로운 성장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박근혜 정부와 재벌을 비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국민을 등쳐 먹으려는 발상이다. 고령화, 저출산, 세계화, 지식정보화, 지식서비스업의 비중증가, 전세계적인 제조업 첨단화와 산업구조 고도화는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것도 아니고, 재벌이 추진한 것도 아니다.
박근혜 정부와 재벌의 문제는 오히려 무능에 있다. 근데 <무능>의 관점에서 보면 야당도 만만치 않고, 한국의 언론, 지식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체로 우리는 모두 무능했고, 세상의 변화에 둔감했고, 우리를 둘러싼 모순의 구조를 제대로 직시하는 것에 매우 무능했다. 용호상박 수준이며, 도긴개긴 수준이었다.
(*허구한날 신자유주의 타령하는 진보-좌파의 수준이나, 허구한날 종북좌파 타령하는 보수-우파의 수준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수십년동안 무능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유능해질 수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능을 타인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은폐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태의 본질을 더더욱 직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임기 후반으로 접어들며 심판론의 위협을 받게 되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유혹을 받게 될 것이고, 한국의 야당-진보 세력도 매한가지이다.
공자 왈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게 진짜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간 우리가 모두 대체로 무능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 박정희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성장동력 만들기는 일단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게 ‘청년 문제’와 ‘헬조선 론’의 진짜 본질이며, 해법이기도 하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