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Guardian의 「How should we treat science’s growing pains?」를 번역한 글입니다.
《가디언》의 과학란에서 이미 지적했듯 재현 가능성에서 측정 기준의 남용 및 동료 평가의 문제점들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모든 양태에서 과학의 위기와 맞붙는 기획은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과학의 위기가 결국 해결될 것이고, 그것이 과학을 향한 신뢰의 일반 위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에 훌륭한 근거를 제공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 ‘과학’이 물질적 혜택과 더불어 진리와 성실 둘 다의 핵심적인 문화적 상징이 더 이상 아니게 된다면,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광범위할 것이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폭로됨으로써 과학의 위기를 촉발한 비행들의 배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고찰해야 한다.
환경의 조합이 뭐가 잘못되어버렸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 된다는 것은 명료하다. 이전 조건에서 진화한 통제 및 보상 체계는 여러 면에서 반생산적인 게 되어버렸는데, 과학자들이 저항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도착적 장려책을 제공했다. 문제는 과거의 ‘리틀 사이언스’에서 현재의 ‘빅 사이언스‘ 또는 ‘산업화된 과학’으로의 변환에 의해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부패 압력이 현대 과학의 구조적 조건의 결과라면, 그 조건의 중대한 변화가 부재할 때 그런 압력은 무화할 수 있는가? 우리는 새로운 조건이 어떻게 새로운 압력을 초래하는지 탐구해야 한다. 과학적 기획의 지속적 양적 성장에서 두 가지 친숙한 질적 양태가 있다.
첫 번째 양태는 공동 사회, 즉 게마인샤프트(Gemeinshaft)의 상실이다. 모든 공동체 및 하위 공동체가 매우 커져 직업적 관계에서 개인적 친숙함이 지배적인 게 아니게 된다. 예전의 비공식적 보상 및 제재 체계는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 새로운 이익 사회, 즉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조건에서는 그런 친숙한 통치 과업들이 ‘객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과학의 통치 과업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은 곧바로 부패를 초래한다. 그런 체계라면 무엇이든 농락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양태는 엄청나게 증가된 과학의 자본 집약 전개에 동반된다. 전형적인 발견의 맥락은 더 이상 시험관을 든 과학자가 아니다. 산업적 규모에서 노동 분업이 이루어진 거대한 실험실이다. 생산물에 관한 소비자들의 규율이 부재할 때 이미 쓸모가 없어진 그런 비공식적 체계를 제외하면 질 통제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이런 새로운 체계가 지배적인 것이 되던 바로 그때 잔인한 운명의 사건에 의해 세 번째 요소, 정체 상태가 침투했다. 과학이 자체를 재생산하는 과학의 사회적 하위 체계, 즉 대학원생들의 훈련과 인증은 최소한 유의미한 소수자를 모집할 가능성에 의존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작을 것이다. 과학의 전통적인 일정 성장 속도도 과학자의 경력 과정 동안 소수의 신참자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전망도 사라지고, 모집이 막다른 궁지에 빠지며, 현존하는 연구자 집단들이 압착 당할 때, 많은 병리학적 현상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명백한 것은 연구 작업의 프롤레타리아화다. 신참자(그리고 교사)들은 평생 어떤 보장 권리도 없고 연구책임자의 호의에 의존해 갱신이 이루어지는 단기 계약직들의 전망 일련을 직면하게 된다. 독립성과 정직성이라는 고상한 이상을 유지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된다.
이런 가혹한 조건에서 질은 도구적인 것이 된다. ‘우수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실용적인 행위가 되고 ‘영향’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과학적 엄밀성을 향한 자기희생적인 탐구는 저널들 사이에서 능숙하게 움직이며, 흥미로운 결과를 얻기 위해 p-해킹(p-hacking)에도 몰두할 필요성으로 대체된다. 그런 조건이 10년 전에 존 이오니디스(John Ionnidis)가 알아낸 비참한 결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깊은 원인이 작용한다. ‘싸구려 과학’ 또는 심지어 ‘저속한 과학’으로 부를 수 있는 것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수준 이하의 것이라는 점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 문제는 기준이 점진적으로 떨어져서 엄밀한 과학적 작업의 기본 솜씨가 쇠퇴하게 된 지난 수십 년 동안 강화되었을 것이다. 증거로서는 통계적 실천의 현재 상태가 있다. 그 가운데 최선의 것은 가능한 한 정교하고 자기 비판적인 것이지만 모욕적인 것도 많이 존재한다.
우리 문제의 다른 한 요소는 과학의 자화상이다. 과학 생활에 관한 이상적인 초상화들의 긴 역사가 존재한다. 이것들은 과학의 상징이 요청된, 조직 종교와 벌인 이념 투쟁들의 자연적인 결과였다. 과학 이념의 복잡한 역사에서 전환점은 포퍼(Popper)와 라카토스(Lakatos)가 쿤(Kuhn)과 파이어아벤트(Feyerabend)의 신랄한 비판에 맞서 계몽주의적 이상을 옹호한 최근 1960년대에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회고해 보면 어느 진영도 그때 이후로 지배적인 것이 된 질에 관한 쟁점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중에 ‘과학 전쟁‘ 동안, 사회학적 비판가들이 과학의 인식론적 토대는 공격했지만, 과학적 실천의 불완벽성은 공격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초기 작업의 주요 쟁점으로 삼았지만, 과학자들 사이에서 진가를 아는 청중이 있는 내 책 『과학적 지식과 그것의 사회적 문제들(Scientific Knowledge and Its Social Problems)』에도 그것은 강단의 과학철학 공동체에서 감지할 만한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했다.
사전의 적절한 논의가 없었던 결과로서 과학 공동체는 질의 위기가 발발했을 때 대처할 채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물론 모든 층위에서 질에 관한 쟁점과 관련해 광범위한 비공식적인 친숙함이 있었다. 하지만 일화들은 본격적인 공적 논의를 위한 자료가 결코 되지 못했다. 이제 과학 공동체가 따라잡는 중이지만 《뉴 사이언티스트》도 인정하듯 갈 길이 멀다.
장면은 결코 전적으로 우울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최초로 과학 내부에서 쟁점이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진정한 정치체가 출현했다. 티머시 가워스(Timothy Gowers) 경이 윤리적 근거에 의거해 한 메이저 출판사에 대한 강단의 보이콧을 요청했을 때 과학의 자화상과 사회적 실재가 돌이킬 수 없게 변했다.
과학이 저질이 되거나 부패될 수 있다는 것, 전 분야가 수십 년 동안 오도될 수 있다는 것(콜레스테롤과 설탕에 관한 영양학을 보라), 그리고 몇몇 기초 분야가 경험적 시험의 어떤 전망도 부재한 가운데 진전되어야 한다는 것에 관한 대중의 각성을 감안하면 이전 세대의 소박한 실재론은 현재의 실재들과 무관하다는 점에 있어서 전적으로 중세적인 것이 된다.
시민 과학, 차고 생물학, DIY 과학, 블로그권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확대된 동료 공동체의 실천들을 비롯한 과학적 실천의 미확정적 형태들과 이루어지는 더 깊은 상호작용들이 확실히 존재한다. 기성 과학 내에서 현실 시험이 연구보다 더 시급한 과학 자문의 책임을 진 사람들이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깨달았다는 징표가 존재한다.
다른 한 중요한 전개는 과학 내부에서의 ‘동료 공동체’의 확대다. 연구자들을 기술자, 교사, 자문가 등 여러 종류 가운데 한 종류의 직업적 과학자들로 간주한다. 직업적 책임성에 관한 이 쟁점은 런던의 과학 평의회에 의해 촉진되었다. 질과 정직성은 이제 많은 포럼에서 논의되며, 전체 상황은 『벼랑 끝에 선 과학(Science on the Verge)』라는 새 책에서 체계적으로 검토된다.
이런 긍정적인 전개 중 어느 것도 과학적 지식의 새로운 사회적 문제 해결을 보장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대로 과학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다. 과학에 기반 둔 전쟁, 금융 조작, 그리고 환경 약탈 기술을 감안하면 문명적 파국의 가능성은 여전히 강하다. 최소한 이제 뚜껑은 열렸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우리 문제와 모순점을 대면할 수 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원문: 사물의 풍경